유비는 어떻게 너그러운 군주로 각색되었을까

[서평] 이나미 리스코의 <삼국지 깊이 읽기>

등록 2007.07.02 10:14수정 2007.07.04 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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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표지 ⓒ 작가정신

중국 고전 연구의 '시오노 나나미'라 불릴 정도로 유명한 이나미 리스코가 <삼국지 깊이읽기>란 책을 펴냈다. 진수가 탄생시킨 역사서 <삼국지>는 시대에 따라 민중의 기호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하고 재창조되어 문학작품으로 진화했다. 이나미 리스코는 <삼국지 깊이읽기>를 통해 그 진화 과정을 명쾌하게 보여주고 있다.

서진 시대에 살던 진수가 역사서 <삼국지>를 편찬한 시기는 3세기 무렵이다. 명나라 초기 나관중이 허구적 문학 세계를 구축한 <삼국지연의>를 완성한 시기가 14세기 중엽이니 그 시차는 천 년 이상이다. 천 년이란 긴 세월만큼 <삼국지>와 <삼국지연의>의 차이도 많다.

진수의 <삼국지>에 비해 나관중의 <삼국지연의>에서 확연하게 달라진 점은 노골적인 촉나라 정통론이 부각된다는 점이다. 이는 동진의 습착치의 <한진춘추>에서 제기된 촉나라 정통론과, 배송지의 <삼국지주> 인용 서적들과 <세설신어>에서 부각된 조조 간웅설을 이어받아 <삼국지연의>가 완성되었다는 것이다.

습착지가 정면으로 내세운 촉나라 정통론은 남송의 주희에게 계승되어, 그후 주류를 차지하는 역사관이 되었다. 이런 역사학의 흐름은 야담이나 희곡 같은 민간 연예 속에서 키워진 다양한 삼국지 설화에서 <삼국지평화>로, 나아가서는 <삼국지연의>로 이어지는 허구의 촉나라 중심의 시각을 확립시켰다고 한다.

<삼국지>가 <삼국지평화>를 거쳐 <삼국지연의>로 재탄생되기까지 어떠한 변화가 있었는가. 이나미 리스코는 다양한 사례를 들어 비교하면서 <삼국지>가 시대의 변화에 따라 어떻게 변화하고 재창조되었는지를 확인시켜주고 있다.

유비가 황건적 토벌에 공을 세운 후 안희현의 위(尉)로 부임했을 때 일어났던 독우 살해사건에 대한 서술에서 어떠한 차이가 있는지 비교해보자.

먼저 진수의 <삼국지> 기록을 살펴보자.

선주(유비)는 황건적 토벌에 공을 세워 안희현의 위로 임명되었다. 군(郡)의 독우가 공무로 안희현에 왔을 때, 선주(유비)는 면회를 청했지만 거절당했기 때문에 억지로 밀고 들어가 독우를 꽁꽁 묶고 200번이나 곤장을 때린 다음 관인의 끈을 끌러 독우의 목에 걸어주고 말뚝에 묶어놓고 관직을 버리고 도망쳤다. (촉서, 선주전) (63쪽)

이 기록을 보면 독우의 오만한 태도에 격분해서 곤장 200대를 때린 주체는 유비로 그려지고 있다. 나관중의 <삼국지연의>에 등장하는 너그럽고 어진 군주로 묘사되는 유비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다음은 <삼국지평화>의 기록을 살펴보자

장비는 유비의 부임이 늦어졌다는 이유로 유비를 책망한 정주 태수를 살해했다. 조정이 이 사건을 조사하도록 파견한 독우는 고압적으로 유비를 범인으로 단정하고 그를 체포하려 한다. 유비 옆에 있던 관우와 장비는 격분하여 관청으로 다급하게 달려간다. … (중략) … 장비는 유비를 의자에 앉힌 뒤, 독우를 관청 앞으로 끌어내어 말을 매는 말뚝에 묶어놓고 가슴 언저리를 채찍으로 백 번이나 때렸다. 독우가 숨지자 장비는 시신을 여섯 토막으로 절단하여 머리는 북문에 걸어놓고 팔다리는 관청의 네 귀퉁이에 매달았다. (63~64쪽)

독우를 채찍으로 때려 죽이고 시신을 토막 낸 주체는 장비로 그려진다. 유비의 행동에 대해서는 어떤 형태의 설명도 없다.

마지막으로 나관중의 <삼국지연의>의 서술을 보기로 하자.

장비가 달려들어 독우의 머리채를 잡아챘다. 장비는 독우를 관청 밖으로 질질 끌어내어 말뚝에다 꽁꽁 묶었다. 그리고는 버들가지를 꺾어 독우의 볼기를 힘껏 때렸다. 나뭇가지가 십여 개나 부러졌다.

유비가 울적한 기분에 빠져 있다가 관청 앞이 소란스러워 곁에 있는 사람에게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그러자 사람들이 "장비 장군이 어떤 사람을 묶어놓고 관청 앞에서 때리고 있는 중이라고 합니다"하고 대답한다.
… (중략) … 독우가 유비를 보고 사정했다.

"유공, 제발 목숨만 살려주시오."
유비는 원래 마음이 너그러운 사람이라, 장비를 꾸짖으며 독우를 풀어주려고 했다.(65~66쪽)


<삼국지연의>에서도 독우에게 폭행을 가하는 건 장비였다. 곤장도 채찍도 아닌 버들가지라 독우를 죽일만한 상황도 아니었다. <삼국지평화>에서 유비의 행동에 대해 아무런 설명도 없었던 데 비해서 <삼국지연의>에서는 독우를 때리는 장비를 꾸짖으며 독우를 풀어주려고 한다.

정리해보자. <삼국지>에서는 독우에게 곤장을 때리도록 명령한 인물이 유비로 그려졌지만, <삼국지평화>에서는 장비가 직접 채찍으로 폭행을 하고 유비는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는 것으로 묘사됐다. <삼국지연의>에서도 장비의 폭행으로 그려졌지만 유비는 폭행을 만류하는 것으로 서술됐다. 유비를 너그럽고 어진 군주로 묘사하려는 의도가 확실하게 드러나고 있는 셈이다.

이나미 리스코는 독우 살해사건 외에도 다양한 사례를 들어 삼국지에서 삼국지연으로 이어지는 천 년 이상의 변화를 흥미 있게 추적하고 있다. 조조는 어떻게 간교하고 교활한 인물로 각색되었는지, 관우가 어떻게 지성과 인성을 갖춘 이상적 무인으로 그려지는지, 제갈량이 어떻게 인간을 뛰어넘는 전지전능한 신처럼 꾸며지는지….

삼국지 마니아를 자처하는 이들은 꼭 한 번 읽기를 권한다. 더불어 과거의 역사가 어떻게 서술되고 변화되고 재해석되고 각색되는지를 알고 싶은 이들에게도 일독을 권하고 싶은 책이다.

덧붙이는 글 | 김석희 옮김/작가정신/10,000원

덧붙이는 글 김석희 옮김/작가정신/10,000원

이나미 리츠코의 삼국지 깊이 읽기

이나미 리츠코 지음, 김석희 옮김,
작가정신, 2007


#진수 #나관중 #삼국지 #삼국지연의 #유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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