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적인 버팀목, 세상을 떠나다

[태종 이방원 116] 태조 이성계의 죽음

등록 2007.07.04 08:19수정 2007.07.04 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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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자 양녕대군이 명나라에서 돌아왔다. 한양은 축제 분위기였다. 거리는 결채(結綵)하고 육조가는 들떠 있었다. 좌정승 성석린과 육조판서는 서교에 나가 세자를 맞이하고 안평부원군 이서를 비롯한 공신은 영서역에서 영접했다. 기로와 영의정치사(領議政府事致仕) 권중화는 홍제원에서 맞이하고 각사의 관원들은 반송정에 도열했다.

세자가 이끄는 사신단이 문무백관의 환영을 받으며 입성했다. 세자가 명나라를 방문하여 환대를 받았다는 소문이 도성에 파다하게 퍼졌다. 반송정에서 돈의문에 이르는 길에는 도성의 백성들로 메워졌다. 태종 이방원은 사신단을 환영하는 잔치를 광연루에서 베풀었다.

"내가 보기에 네 모습(刑體)이 장대(壯大)해져서 옛날과 달라졌구나."

태종 이방원은 아들이 대견했다. 불과 7개월 만에 보는 아들이지만 많이 큰 것 같았다. 나이도 어린 것이 황제의 나라를 방문하여 사신 임무를 차질 없이 수행하고 돌아온 것이 기특했다. 지금 당장 왕위를 물려주어도 왕 노릇을 충분히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사람이 많으면 그 가운데는 반드시 우환이 있는 것이다. 이번 일행은 내가 조근(朝覲)하던 때보다 훨씬 많았는데 한 사람도 근심을 끼친 자가 없었으니 다행이다. 황제께서 너를 대접하는 것이 성심에서 나와 상사(賞賜)가 후할 뿐 아니라 세사(細事)에 이르기까지 가르쳐 주지 않음이 없었으니 성은(聖恩)이 중대하여 보사(報謝)할 길이 없구나." - <태종실록>

"황제께서 호송하는 내관에게 명하기를 '조선 국왕이 14세 된 아들에게 만 리 길을 조근하도록 하였으니 그 충성이 지극하다. 네가 호송할 때에 만일 세자로 하여금 조금이라도 불편한 것이 있으면 너를 죄줄 것이다' 하였으므로 호종하는 내관이 잠시도 세자의 곁을 떠나지 않고 부액(扶掖)하여 세자로 하여금 안온(安穩)히 다녀오게 하였습니다."

명나라는 어수선했지만 환대는 있었다

황제의 배려로 무사히 다녀왔다고 이천우가 보고했다. 조카 혜제를 폐하고 황위에 오른 영락제는 아직 천도하지 않고 남경에 있었다. 명나라의 문명을 꽃피웠던 북경은 아직 명나라의 수도가 아니었다. 이제 자금성 공사를 시작하고 있었다. 한양에서 금릉까지 8천리 길. 결코 가까운 거리가 아니다.

"그래, 황제께서 뭐라 묻더냐?"

"서각문(西角門)에 좌기(坐起)한 황제께서 '세자의 나이 몇 살이냐?'고 물으셔 '열 네 살입니다' 하니 황제께서 온화한 얼굴로 접견하시고 채사의(綵絲衣) 다섯 벌과 신발(靴) 각각 한 벌씩 주시고 이천우 이하 종사관 35인에 이르기까지 채사의 한 벌, 타각부(打角夫) 이하 종인 78명에 이르기까지는 각각 초의(綃衣) 한 벌씩을 주셨습니다."

"또 다른 말씀은 안계시더냐?"

"'한양(王京)을 출발한 지가 며칠이나 되었느냐?' 물으셔 '100일도 더 되었습니다' 말씀드렸더니 또 물으시기를 '글을 읽느냐?' 하시기에 '글을 읽습니다' 하였더니 '가까이 오라' 명하셨습니다."

"그래 가까이 갔더니 뭐라 말씀 하시더냐?"

"용모는 내부(乃父)와 같은데 키만 좀 다르구나. 하시었습니다."

내부란 그의 아버지라는 뜻으로 너의 아버지를 꼭 닮았다는 말이다. 이 말을 듣는 순간 태종 이방원은 감개무량했다. 남경에 있는 홍무제를 알현하러 가는 길, 북경에서 잠간 뵈었던 연왕이 영락제가 된 현재 자신을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다는 것이 황공했다.

"그래, 선물은 무엇을 받아 왔느냐?"

"인효황후권선서(仁孝皇后勸善書) 150본(本)과 효자황후전(孝慈皇后傳) 150본을 받아 왔습니다."

"오호, 대견하도다. 경들은 마음껏 마시고 오늘을 경축하여라."

태종 이방원은 흐뭇했다. 자신의 뒤를 이을 세자가 황제의 눈도장을 받고 사신 임무를 완벽하게 수행했다는 것이 흡족했다. 순탄하지 않았던 명나라 관계에 밝은 서광이 비치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또 하나, 세자 양녕이 대륙의 기상을 호흡하고 돌아왔기를 기대했다. 자신이 요동을 지나며 고구려의 고토를 생각했듯이 세자 역시 대륙을 호령하던 조상들의 기백과 기상을 가슴 속에 담아 왔기를 고대했다.

사신단을 위한 환영연이 끝난 후, 소강상태를 유지하던 상소가 또 다시 올라왔다. 민무구 형제를 참형에 처하자는 것이다.

"법이라는 것은 천하의 공(公)이므로 전하도 사사(私私)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민무구 민무질의 불궤(不軌)한 죄는 마땅히 극형에 처해야 하는데 전하께서 인친인 까닭에 가벼운 처벌로 시골에 안치하였으니 이것이 비록 전하의 은혜이나 천하의 대의는 아닙니다. 전하께서는 은혜를 끊고 법대로 거행하여 신민(臣民)의 바람(望)을 쾌(快)하게 하소서."

태종 이방원은 상소를 대내에 두라 이르고 침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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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 임금의 옥새. 이성계의 죽음과 함께 태조시대의 막을 내렸다. ⓒ 이정근

태조 이성계의 병환이 예사롭지 않다. 아버지의 환우가 깊어 시름에 잠겨 있는데 대간들은 간쟁을 일삼으니 태종 이방원은 짜증스러웠다. 아버지의 병환 때문에 세자의 성공적인 명나라 방문 결과를 국정에 반영하지 못하고 있는데 상소라니 답답했다.

형 정종과 번갈아 아버지의 곁을 지켰다. 때로는 환궁하지 않고 아버지 곁에서 잠을 자기도 했다. 별전에서 잠을 자고 있는데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전갈이 왔다. 거여를 챙길 겨를도 없이 뛰었다. 사대부는 비가와도 뛰지 않는 것이 법도였는데 임금이 뛴 것이다.

태조 이성계, 세상을 떠나다

손수 청심원을 드렸으나 삼키지 못하고 두어 번 태종 이방원을 바라보더니만 숨을 거두었다. 태조 이성계가 세상을 뜬 것이다. 태종 이방원을 용서한다는 말은 없었다. 말을 타고 달려 온 정종과 함께 태종 이방원은 통곡했다. 애증이 서려있는 아버지다. 효도하고 싶어도 이 세상에 없으니 하늘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태종 이방원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내가 항상 아버지께 환심(歡心)을 사지 못하는 것을 한(恨)하여 항상 덕수궁에 머물고 싶었으나 좌우 시종이 많아 내 마음을 이룰 수 없었다. 세자에게 전위(傳位)하고 한가한 사람이 되면 매양 단기(單騎)로 출입하여 시인방(寺人房)에도 들어가고 사약방(司鑰房)에도 들어가 아버님을 뵙든지 못 뵙든지 간에 항상 곁에 있으면 환심(歡心)을 사리라고 여겼는데 이제는 그럴 수도 없구나." - <태종실록>

태조 이성계가 세상을 떠났다. 고려의 무장으로 혁혁한 무공을 세우던 장군이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개국한 이성계가 유명을 달리했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 이제 역사의 평가만이 그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그가 부관참시를 당하느냐? 역사의 평가를 받느냐? 그것은 오로지 태종 이방원 자신에게 달려있다 생각하니 어깨가 무거웠다.

광화문 앞에 천막을 치고 아버지의 항복문서를 받아내며 권력을 장악했지만 그래도 태종 이방원에게는 최후의 버팀목이었다. 이제 그 버팀목이 사라졌으니 허허 벌판에 홀로 서 있는 느낌이었다. 형 정종이 살아 있지만 기댈 언덕은 아니었다. 오로지 자신의 두 어깨에 짊어지고 가야 한다 생각하니 아버지의 빈 자리가 더욱 아쉬웠다.
#이성계 #이방원 #영락제 #혜제 #시인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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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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