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무협소설 <천지> 228회

등록 2007.07.04 08:12수정 2007.07.04 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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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주가 왜 변수가 되는 것인가?”

“보주는 내가 이 일을 벌이고 있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을 걸세. 하지만 지켜보고 있는 것이겠지. 그저 묵인이네…. 하지만 보주의 인내심이 어디에서 멈출지 예상할 수 없다는 말이네. 유일하게 모든 일을 틀어버릴 수 있는 사람이 바로 보주란 말이네.”


“지금까지의 묵인은 곧 동조가 아닌가?”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하며 위안을 삼고 있네. 하지만 어느 순간 방관자의 입장에서 벗어난다면 나로서는 도저히 보주의 움직임을 막을 방도가 없다네. 그것이 우리에게 유리하게 작용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이지만 만약 그가 내 일을 막겠다고 한다면 나는 이곳에서 죽을 수밖에 없네.”

함곡의 얼굴에 어둠이 내려앉았다. 보주는 정말 무서운 인물이었다. 구룡의 신화를 종식시킨 후 그저 방관자의 입장에서 살아왔지만 보주가 움직인다면 막을 사람은 거의 없었다. 더구나 이곳은 보주의 영역이다.

함곡이 보주와 연관이 없다는 것은 사실인 모양이었다. 이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보주가 어떻게 나오느냐에 따라 그 결과가 판이하게 다를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렇군…. 그래서 자네가 자꾸 설가 놈을 내세우려 했군.”


풍철한이 무언가 생각난 듯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그러더니 함곡을 직시하며 한 마디 던졌다.

“또한 나까지도 말이네….”


“그것 또한 부인하지 않겠네. 설소협은 분명 보주와 관계가 있네. 아들이라는 말이 있지만 확인할 길은 없네. 또한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보아서는 앞뒤가 맞지 않는 부분이 있어 단정할 수 없네. 또한 자네를 내가 부른 것이 아니라 보주가 불렀기에 위안이 되었던 것도 사실이네.”

함곡은 자신의 감정을 감추지 않았다. 지금 자신의 속내를 감추기에는 너무 많은 부담과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는 터였다. 풍철한은 친구를 바라보았다. 함곡은 좀처럼 저런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도와달라는 것과 다름없다.

“내가 어떻게 해주길 바라는가?”

풍철한이 두 팔과 어깨를 들어 보이며 물었다. 네가 원하는 것이라면 해주겠다는 의미다.

“아까도 말했듯이 보주는 자네에게 나쁜 감정을 가지고 부른 것은 아니라 생각하네. 그래서 나는 자네가 보주의 의중을 알아봐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네.”

“내가…? 그렇다고 보주가 나에게 흉금을 털어놓을까?”

말이 안 되는 소리였다. 보주가 무엇이 아쉬워 풍철한에게 속내를 털어놓을까? 이것은 사람을 믿고 안 믿고 하는 문제가 아니었다. 그만큼 보주와 풍철한은 교류가 없었던 터였다. 한 번 본 사람에게 속내를 터놓을 인물이 어디 있을까?

“모르지…. 사람이란 때로 누군가에게 자신의 속내를 털어놓고 싶을 때가 있는 법이네. 특히 자신과 별 관계없는 사람에게 말이지. 물론 안 그럴 공산이 크지만 눈치하면 자네가 아닌가? 보주의 눈치를 봐서 짐작만 할 수 있다면 불확실한 위험을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다는 생각이네.”

큰 기대는 걸지 않지만 만나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의견이었다. 아니 반드시 한 번 만나주었으면 하는 의미였다. 풍철한은 고개를 끄떡였다.

“그러지. 나 또한 보주가 왜 불렀는지 궁금하기도 하니까….”

함곡이 고맙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나직하게 말했다.

“자네에게 오늘밤 나머지 모든 것을 털어놓을 것이네…. 단…. 그때까지 우리가 무사하다면 말이네….”

함곡의 표정에 비장한 기색이 떠올랐다. 이제 조금이라도 사정을 안 풍철한 역시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 함곡 역시 용추와 마찬가지로 외통수의 길을 걷고 있었다. 타인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몰려서 그 길을 가느냐? 자의에 의해 반드시 그 길을 가느냐의 차이만 있을 뿐이었다.

87

점심 식사는 끝났다. 이미 소림과 무당, 그리고 점창이 빠진 식사는 화산의 인물들과 아미의 회운사태 뿐이었다. 회운사태의 옆에 앉은 매봉검(梅峯劍) 황용(黃蓉)이 담자를 들어 몸을 회운사태 쪽으로 기울이면서 차를 따랐다.

또르르----

노란색의 찻물이 찻잔에 금방 그득 차더니 넘쳐흘렀다.

“어머….”

황용이 자신의 실태를 깨달은 듯 자리에서 일어나 앞에 놓인 천으로 탁자 위를 흘러내리는 찻물을 급히 막으며 닦기 시작했다.

“괜찮아요. 황시주.”

회운사태 역시 자신의 앞에 놓인 천으로 같이 닦아내며 황용의 실수를 개의치 않은 듯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별 말씀을… 괜찮지는 않지요.”

황용은 생끗 웃어 보이며 그 순간 왼손으로 찻물을 닦고 있는 회운사태의 왼손을 탁자 위로 누르는 것과 동시에 오른손을 빠르게 놀리며 그녀의 거골혈(巨骨穴)과 대추혈(大推穴)을 짚었다.

“헛… 이… 무슨…?”

회운사태의 몸이 축 늘어졌다. 거골혈과 대추혈은 치명적인 혈도. 온몸에 마비가 오고 심하면 정신을 잃거나 죽기까지 하는 혈도다.

“조용히 처리하기 위해 우리가 마신 차에 산공독(散功毒)을 조금 넣었어요. 피해는 없을 거예요. 물론 우리는 이미 해약을 복용했고요.”

이러한 행위가 갑작스런 것이 아니라 이미 미리 계획했던 일이란 말이다. 회운사태는 점신이 마비되는 저릿저릿한 느낌과 함께 정신이 혼란스러워졌다. 화산파 이들이 왜 자신을 공격한단 말인가? 그녀의 시선이 화산의 장문인 자하진인에게로 돌려졌다.

“욱일승천의 기세에 있는 명문대파의 화산이 이 무슨 비열한 짓이오?‘

목에서 짜내는 것이라 크지 않았지만 추상같은 꾸짖음이 담겨있는 목소리였다. 축 늘어진 몸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위엄도 흘러나왔다. 어떠한 욕을 듣더라도 자파의 이익을 위해서는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는다는 자하진인이라 해도 이때만큼은 회운사태의 시선을 슬그머니 피하며 헛기침을 흘렸다.

“헛… 험…. 부득이하게 이럴 수밖에 없었음을 용서해 주시오.”

자하진인의 얼굴에 붉으레한 빛이 떠올랐다. 낮술 한 잔에 그런 것이 아니었다. 다른 무림문파라면 몰라도 육파일방 사이에 이런 일은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다. 아무리 뻔뻔한 그라도 이런 상황에는 낯을 붉히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당장 풀지 못하겠소!”

회운사태가 다시 노기가 잔뜩 담긴 목소리를 발하자 자하진인은 그제야 돌렸던 시선을 다시 회운사태에게로 돌렸다. 어차피 벌인 일이다. 되돌릴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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