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무협소설 <천지> 230회

등록 2007.07.06 08:12수정 2007.07.06 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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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쑥은 아니었지만 갑작스런 방문이었다.

“식사를 혼자 하시는 모습이 별로 좋아보이지는 않군요.”


어디서 그런 용기가 생겼을까? 예전이라면 이곳을 들어올 때부터 조심스런 발걸음은 물론 먼저 불쑥 말을 한다거나, 더욱이 이런 식의 말투는 사용할 수 없었을 것이다. 허나 귀산노인의 기록을 보았기 때문이었는지 그는 마치 매우 친근한 어른에게 투정부리듯 말을 하고 있었다.

또한 이상한 것은 보주의 태도였다. 사전에 아무런 연락도 없이 찾아온 설중행을 들어오라고 한 것도, 특히 혼자 식사를 할 때에는 웬만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사람을 들이지 않는 보주가 허락을 한 것도 이상한 일이었다.

“배가 고픈 모양이구나.”

미시(未時) 초에 접어들고 있었으니 이미 늦은 점심이었다. 보주가 옆에 시립해 있는 시비를 바라보자 말을 하기도 전에 대답과 함께 뒤쪽 문으로 쪼르르 움직였다.

“준비하겠사옵니다.”


이미 말과 눈짓만으로도 보주의 듯을 알아듣는 아이다. 아직 앳되어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지만 보주를 옆에서 모신지 십년이 넘는 이십대 후반의 시비다. 설중행은 원형으로 되어 있는 식탁으로 다가와 보주 맞은편에 털썩 앉았다.

“왜 알아보았으면서도 그 때 모르는 척 하셨습니까?”


첫날 풍철한과 같이 왔을 때의 이야기다.

“녀석… 꼭 투정부리는 아이 같구나…. 얼굴을 보니 심통이 잔뜩 달려있어.”

보주는 잠시 젓가락을 놓고 찻물을 한 모금 들이켰다. 그것으로 입안의 음식물을 정리하고는 말을 이었다.

“네가 모른 척 하였던 이유와 같다.”

어느새 돌아온 시비가 설중행의 앞에 접시와 탕그릇, 그리고 수저를 놓았다. 음식이야 한 사람이 먹거나 두 사람이 먹거나 상관없을 만큼 놓여있는 상태. 탕은 말린 해삼과 전복을 넣어 끓인 맑은 것이었다.

“나는… 누구입니까?”

차마 ‘내가 당신의 아들입니까?’라고 물을 수는 없었다. 귀산노인도 확인할 길이 없어 추측으로 써놓았다고 하지 않았던가?

“들거라.”

보주는 방금 내온 교자를 젓가락으로 하나 집어 자신의 앞에 놓인 접시에 가져다 놓으며 말했다. 은근한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그 말 한 마디를 거역하기 어려운 위엄이 배어 나왔다. 설중행은 무의식적으로 수저를 들어 탕을 먹기 시작했다.

본래 교자가 나오는 것은 식사의 맨 마지막이다. 요리를 모두 먹고 나중에 교자나 국수로 식사를 끝내는 것이다. 이미 보주는 식사를 거의 마쳤다는 뜻. 그래도 설중행이 먹기를 기다려 주겠다는 의미도 다분했다.

“맛있군요.”

어느새 탕을 비운 설중행이 손등으로 입에 묻은 물기를 닦아내며 말했다. 앞에 놓인 천이 있음에도 그런 버릇은 비영조에서 하던 그대로다.

“그 대답은 아마 우슬이 해야 할 것 같구나. 노부는 네가 누군지 이미 잊어버렸다.”

대답치고는 간단했다. 대답을 하고 싶지 않다는 뜻은 분명했다. 설중행이 다시 물었다.

“따님의 정혼자가 소생이라고 들었습니다. 누가 정하신 겁니까?”

“그건 노부가 정했다. 그것에 대해 불만이 있는 게냐?”

우슬과 같은 여자와 정혼자가 되게 만들었는데 그것에 대해 불만이 있다면 그 놈은 분명 미친놈일 것이다. 설중행의 묻는 의도도 불만이 아니라 무슨 연유로, 자신이 보주와 어떤 관계에 있기에 그렇게 정했느냐는 의미였고, 보주 역시 그렇게 알아들었음에도 딴청을 피운 것이다. 설중행은 다시 집요하게 따지듯 물었다.

“왜 소생에게 심인검의 구결을 가르쳐주셨습니까? 제자로 삼으시지도 않으시고 쫓겨나게 할 것을 왜 저에게 그리 많은 것을 주신 겁니까? 쫓겨나자마자 나를 거두어 주셨던 분 역시 보주께서 시키신 일이 아닙니까? 그리고는 왜 비영조란 곳에 처박히게 만들었던 겁니까?”

따지듯 묻는 설중행을 보면서도 보주의 태도에는 변함이 없었다.

“왜… 왜…? 묻고 싶은 것이 참으로 많은 것 같구나. 허나 대답은 여전히 같다. 노부는 이미 모두 잊어버렸어. 너는 너일 뿐이다. 그리고 네 녀석이 그렇게 보채지 않아도 알 때가 되면 자연스럽게 알게 될 게고 또 지금까지 모르고 살아왔듯이 앞으로도 모른다고 한들 무에 달라질 것이 있느냐?”

말은 그럴 듯 했다. 이런 대답을 기대한 것이 아니어서 설중행은 갑자기 할 말을 잊어버렸다. 보주는 교자를 또 하나 가져다가 입에 넣었다.

“오늘은 유난히 이것이 맛있군. 너도 먹어보아라.”

보주는 회전하는 위쪽 식탁을 돌려 교자가 설중행 앞으로 가게 했다. 설중행이 마지못해 교자를 가져다가 자신의 앞 접시에 놓았다.

“젊을 때는 든든히 먹어두는 것이 좋아. 젊어서 잘 챙겨먹지 않으면 늙어서 고생이거든.”

설중행이 교자 하나를 통재로 집어 입에 처넣어 우적우적 씹었다. 마치 먹기 싫은 것을 억지로 먹는 모습이었다. 그는 대충 씹다가 그냥 끌꺽 삼키고는 물었다.

“왜 보주께서는 가만히 계시는 겁니까?”

질문은 막연했다. 허나 질문한 사람도 그 질문을 받은 사람도 무슨 뜻인지 정확히 안다.

“또 ‘왜?’로구나. 그럼 한 가지 네게 물어보자. 너는 왜 사느냐?”

이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자신이 왜 사는지 아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자신이 선택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있을까? 자신이 태어나고 싶어 태어난 것인가? 자신이 부자 집에 태어나고 싶다 해서 부자 집을 선택해 태어날 수 있는 것인가? 원한다고 해서 황제의 운명을 쥐고 태어날 수가 있는 것인가?

태어나는 그 순간 삶이란 그저 자신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그것이 부모로부터 온 것이든, 아니면 절대적인 존재로부터 부여된 삶이든 주어진 삶이다. 그저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죽음을 향해 달려 가야하는 숙명적인 삶이다. 주어진 삶 속에서 희노애락을 느끼며 자신과 똑같이 주어진 삶을 사는 사람들과 부대끼며 살아가는 것이다.

그저 자신에게 주어졌기에 열심히 살고자 하는 것뿐이고 왜 살아야 하는지 이유도 모르는 채 죽는 그 순간까지 살기 위해 그냥 사는 것뿐이다. 다만 주어졌다고 내팽개치기에는 너무나 소중한 삶이기에 우리는 최선을 다해서 살아가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그것이 삶이다.

‘자아존재’의 의미는 주어진 삶 속에서 자신이 찾는 것이다. 잘 먹고 잘 살기 위한 것이 자신의 존재에 대한 의미는 아니다. 풍요와 권력은 삶을 편하게 만들지만 그것이 삶의 의의는 되지 못한다. 우리가 가끔 혼동하고 있을 뿐이다.

‘왜 사느냐고…? 빌어먹을….’

설중행은 속으로 투덜거렸다. 아마 유사 이래 고승들이라 불리었던 분들은 모두 이런 선문답을 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럴싸한 대답을 한 사람을 눈여겨보았을 것이고…. 삶에 대한 깨달음이란 것을 알 바도 아니거니와 굳이 생각해 본 바도 없다. 대답을 하기 싫으면 그냥 싫다고 하지… 왜 가만히 있느냐고 물으니까 왜 사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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