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밭에서 사는 언니, 농사가 재밌어요?

언니의 손길이 닿는 곳마다 풍성한 생명의 꽃이 핍니다

등록 2007.07.30 15:57수정 2007.07.31 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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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사시는 할머니들이 일을 하고 있으면 가서 잘 도와줍니다. 그러면서 농사 기술을 하나 하나 배웠다고 하네요.
혼자 사시는 할머니들이 일을 하고 있으면 가서 잘 도와줍니다. 그러면서 농사 기술을 하나 하나 배웠다고 하네요.이승숙
장마가 끝나자 불볕더위가 찾아왔다. 아침녘에는 서늘하지만 한낮을 거치면서 달아오른 대지는 저녁 무렵까지도 식을 줄을 모른다.


아무리 더워도 밥은 먹어야 한다. 아침 먹은 지 얼마 안 된 거 같은데 점심때가 되고 또 저녁때가 된다. 안 그래도 더운데 불 앞에서 요리라도 할양이면 왜 삼시세끼를 다 챙겨 먹어야 하는지 은근히 열이 받기도 한다.

그래서 여름이면 하루에 먹을 양만큼의 밥을 아침에 다 해버린다. 점심과 저녁 때 먹을 밥까지 한 번에 다 해버리는 것이다.

완두콩을 준 언니, 밥 할 때마다 생각나

밥을 하려고 쌀을 안칠 때마다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냉동실에 넣어둔 완두콩을 꺼낼 때마다 그 언니를 생각한다. 밥에 넣어 먹으라며 완두콩 담은 봉지를 챙겨주던 그 언니의 은근한 마음이 생각난다.

언니라고 했지만 사실 언니라고 불러본 적은 없다. 우리 둘은 10살 가까이 나이 차이가 난다. 하지만 언니는 내가 어리다고 함부로 대하지 않는다. 정을 담아서 하대를 하기도 하지만 항상 일정한 예의를 지키며 예대를 하곤 한다. 멀지도 않고 가깝지도 않은 거리를 유지하면서 뜨겁지도 그렇다고 차갑지도 않은 관계를 유지한다.


인간관계에서 탈이 나는 것은 너무 가까워서 나는 경우가 많다. 나는 이만큼 너를 생각하는데 너는 왜 나를 이만큼 생각해주지 않냐 하는 서운함에서부터 인간관계가 틀어지고 비꼬여진다. 그러므로 오래 오래 좋은 관계를 맺고 싶다면 확 끓어오르는 뜨거움보다는 은근한 마음으로 서로를 대하는 게 더 나을 것 같다.

산책하다가 밭일하는 이웃 할머니를 만났습니다. "할머니 도와 드릴까요?" 했더니 할머니가 하시는 말씀, "일 하는 거 보면 도시서 살았던 사람 같지가 않아. 일을 참 잘 해."
산책하다가 밭일하는 이웃 할머니를 만났습니다. "할머니 도와 드릴까요?" 했더니 할머니가 하시는 말씀, "일 하는 거 보면 도시서 살았던 사람 같지가 않아. 일을 참 잘 해."이승숙
한적하고 나른하던 어느 날 오후에 그 언니 집에 놀러갔다. 해가 쨍쨍하던 한낮이라서 그런지 언니는 집에 있었다.


언니는 아침저녁으로 해 없을 때면 늘 밭에서 살았다. 새벽 5시가 좀 넘으면 일어나서 해가 돋을 때까지 풀을 뽑고 작물들을 돌보았다. 그러다가 날이 뜨거워지면 집으로 돌아왔다. 해가 설핏 넘어갈 저녁 무렵이 되면 언니는 또 밭에 나가서 일을 했다. 내 할 일 다 해가면서 놀이삼아 농사일을 했다.

우리는 커피 한 잔을 앞에 두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언니의 이야기는 버릴 게 없다. 안분자족하며 살아온 언니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나 역시 그런 길을 걸어야겠단 생각이 들곤 한다.

"가만보면 늘 밭에서 살던데, 농사짓는 게 재미있어요?"
"그럼 재미있지. 하루 하루가 다르게 자라는 것 보면 얼마나 좋은지 몰라. 어제 다르고 오늘이 달라. 토마토 예쁘게 달렸던데 한 번 볼래? 맨날 봐도 볼 때마다 기분이 좋아."

언니는 마치 자식 자랑을 하는 것처럼 농사지은 것들을 자랑하고 싶어 했다. 아닌 게 아니라 토마토가 참 예쁘게 달려 있었다. 자랑할 만도 했다.

"저기 좀 봐. 콩도 많이 달렸네. 콩 안 심었지? 좀 줄게 밥에 넣어 먹어."

농사를 지어서 여러 사람에게 나눠주는 그 재미에 힘든 줄도 모르고 농사를 짓는 것 같이 보였다.

언니의 발소리를 듣고 자란 농작물들

별다른 농기구도 없이 오직 호미 하나로 이만한 밭을 일구었습니다.
별다른 농기구도 없이 오직 호미 하나로 이만한 밭을 일구었습니다.이승숙
언니는 도시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다. 강화로 이사 온 지는 아직 몇 년 안 됐는데, 그런데도 농사에는 박사다. 십 년 가까이 시골생활하고 있는 우리보다 훨씬 더 농사를 잘 짓는다.

언니가 가꾸고 있는 텃밭도 예전에는 노는 땅이었다. 돌보지 않은 땅에서는 잡풀이 돋았고 여름이면 범이 새끼를 쳐도 좋을 정도로 잡초가 무성했다. 그런데 언니가 오자 달라지기 시작했다. 언니는 돌을 골라내고 고랑을 탔다. 그리고 씨를 뿌렸다.

농작물들은 주인의 발소리를 듣고 자란다는 말이 있다. 언니네 텃밭도 주인의 발소리를 듣고 날마다 달라져갔다. 철에 맞춰 씨를 뿌리면 저절로 자라는 것처럼 농작물들은 쑥쑥 자랐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종자를 사와서 씨를 뿌리는데 언니는 달랐다. 상추도 열무도 메밀까지도 씨를 받아서 다음 해에 또 뿌리는 거였다. 그야말로 옛날 어른들이 해오던 방식으로 농사를 짓는 거였다. 참 알뜰하면서도 살뜰했다.

언니는 한 뼘의 땅도 놀리지 않고 다 가꿨다. 채소만 심는 게 아니라 꽃씨를 뿌려 꽃밭도 만들었다. 죽어가던 화초들도 언니한테 오기만 하면 힘을 얻었고 팔팔하게 살아나는 거였다. 언니가 가는 곳은 다 풍성한 생명의 꽃을 피웠다.

고추 농사 지은 걸 보니까 진짜 전문가 수준이었어요. 평생을 농사 지은 사람들 만큼 잘 지어 놓았어요.
고추 농사 지은 걸 보니까 진짜 전문가 수준이었어요. 평생을 농사 지은 사람들 만큼 잘 지어 놓았어요.이승숙
전에 '초록색 엄지소년 티쭈'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다. 근 10년도 더 전에 읽었던 책인데 최근에 와서 그 책이 생각나는 거였다. 그 언니를 보면서 초록색 엄지손가락을 가진 '티쭈'가 생각난 것이다.

'티쭈'에게는 숨겨진 재능이 있었다. '티쭈'의 손이 닿기만 해도 꽃이 활짝 피어났다. 그래서 감옥이나 빈민가 같은 절망적인 곳에 희망의 꽃을 피워주었다. 또 대포를 쏘았는데 대포알 대신 꽃이 쏘아 올려졌다. 그래서 전쟁 대신 평화가 찾아왔다.

생명을 살리는 언니의 초록 손

세상에는 수천수만의 씨들이 쓸모없이 떠돌아다니며 이 곳 저 곳에 흩어져 있다. 꽃을 피우는 씨들도 있지만 꽃으로 피지도 못하고 죽어 버리는 씨들도 있다. 하지만 이런 꽃씨들 위에 티쭈의 초록색 엄지손가락이 닿게 되면 어디에서건 당장에 꽃이 피었다.

꽃들은 나쁜 일이 일어나는 걸 막아주었다. 쇠창살로 둘려 쌓여 있던 감옥에 꽃이 피어나자 죄수들은 변하기 시작했다. 욕하기를 그쳤고 싸우던 습관을 버리게 되었다. 기적이 일어났던 것이다.

그 언니를 볼 때면 초록색 엄지손가락을 가진 '티쭈'가 생각났다. '티쭈'가 희망과 평화의 꽃을 피웠다면 그 언니는 생명의 꽃을 피운다. 언니의 손길이 가기만 하면 뭐든지 생생하게 살아났다. 언니의 손은 생명의 기운을 불어 넣어주는 초록 손이었다.

어디 수박이 잘 익었나 볼까? 수박 모종을 20 포기 가까이 심었다는데, 지금 한창 수박이 달리고 있습니다.
어디 수박이 잘 익었나 볼까? 수박 모종을 20 포기 가까이 심었다는데, 지금 한창 수박이 달리고 있습니다.이승숙
손톱 손질을 곱게 하고 사는 여인들도 있다. 마치 물 한 방울 안 묻히고 사는 것처럼 섬섬옥수를 자랑하는 여인들도 있다. 쪽쪽 뻗은 그런 손을 사람들은 찬미한다. 하지만 그런 손은 생명을 길러내고 살리는 '살림'의 손은 아니다.

일을 많이 해서 투박해 보이는 손은 누군가를 위해서 끊임없이 살림을 한 손이다. 그 손은 바로 생명을 키워내는 '살림'의 손인 것이다.

농사 스승은 이웃 할머니들

그 언니의 손도 생명을 키우고 살려내는 '살림'의 손이다. 하얗게 쪽쪽 뻗은 섬섬옥수는 아니지만 언니의 손은 생명을 길러내는 손이다. 짧게 깎은 손톱과 굵은 손마디는 언니의 훈장이고 상징이다.

언니가 가꾼 밭을 보고 사람들은 놀라서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한다. 연장이 있는 것도 아니고 기계가 있는 것도 아닌 언니가 오직 호미 하나로 그 큰 밭을 다 일구고 가꿨다니 다들 감탄을 하는 것이다.

"아니 어떻게 저렇게 밭을 다 일궜어요? 누가 기계로 고랑 만들어주고 그랬어요?"
"기계 없어요. 그냥 조금씩 조금씩 했죠 뭐. 호미로 흙을 긁어서 두둑을 만들고 고구마 심고 고추 심고 다 했죠 뭐. 천천히 하면 돼요."

"그러면 농사짓는 거는 누구한테 배웠어요?"
"그냥 이웃 할머니들이 밭에서 일하시면 가서 도와드리면서 하나 하나 배웠죠. 농사 기술들 다 할머니들한테 배운 거예요."

"수박은 겉껍질 색깔이 검으면 다 익은 거래요. 연두색이면 덜 익은 거구요. 참깨도 약 한 번 쳐주라 그러든데, 그래야 대가 튼튼해져서 안 넘어진다고 할머니가 그랬는데, 약 한 번 쳐야 할까 봐요."


"수박은 말야 색이 검게 짙으면 잘 익은 거래. 연두색이면 아직 안 익은 거야. 뒷집 할머니가 가르쳐 주셨어. 이거 가져가서 애들 줘. 달고 싱싱할 거야."
"수박은 말야 색이 검게 짙으면 잘 익은 거래. 연두색이면 아직 안 익은 거야. 뒷집 할머니가 가르쳐 주셨어. 이거 가져가서 애들 줘. 달고 싱싱할 거야."이승숙
언니의 농사 스승들은 이웃 할머니들이었다. 혼자 사는 할머니들이 밭에서 일하는 게 보이면 시원한 음료수도 갖다 드리고 일도 거들어 드리면서 하나하나 농사일을 배웠다 한다.

언니가 가꾼 밭은 줄잡아서 300평은 되어 보였다. 그 밭에다 고구마를 600포기 가까이 심었고 그리고 들깨며 깨에다가 고추까지 심었다. 그 외에도 옥수수와 참외, 수박까지도 알차게 심었다.

수박과 참외가 한창 나오자 언니는 또 이웃들에게 돌린다. 종묘상에도 한 통 가져다주고 뒷집 할머니에게도 한 통 가져다주었다. 우리집에는 세 통이나 보냈다. 방학이라 애들이 집에 있는 걸 알고 애들 주라고 보낸 거였다.

언니가 준 수박을 쪼개 보았다. 껍질이 두툼하니 싱싱했다. 사먹는 수박처럼 진한 단맛은 없었지만 그게 오히려 신선하고 은근해서 좋았다. 한 입 먹어보니 옛날 어릴 때 먹었던 그 수박 맛이 남아 있었다. 농약이다 비료다 뿌리지 않고 오직 자연의 뜻에 맞춰서 지은 수박에서 은근하고 웅숭깊은 정이 우러나왔다.
#농사일 #수박 #할머니 #씨앗 #종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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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일을 '놀이'처럼 합니다. 신명나게 살다보면 내 삶의 키도 따라서 클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오늘도 뭐 재미있는 일이 없나 살핍니다. 이웃과 함께 재미있게 사는 게 목표입니다. 아침이 반갑고 저녁은 평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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