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무협소설 <천지> 232회

등록 2007.07.10 08:20수정 2007.07.10 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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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부상을 입었을 때 도움을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자신이 도와달라고 한 것은 아니었다. 풍철한 스스로 도움을 준 것뿐이었다. 헌데 보주는 부인하지 않고 만면에 미소를 지었다.

"허헛…그럴지도 모르지…하지만 아직 때가 되지 않았으니 기다려 보게. 때가 되면 자네에게 부탁을 할 것이야."


풍철한으로서는 도저히 자기에게 부탁할 일이 무언지 짐작을 할 수 없었다. 또한 그 때가 언제인가? 풍철한은 마음 속에서 궁금증이 구름처럼 일어났으나 때가 되면 부탁할 것이란 말에 더 이상 캐물을 수 없었다.

"그럼 다른 것을 한 가지 여쭈어 보아도 되겠습니까?"

풍철한으로서는 이것만큼은 물어보고 싶은 것이었다. 이곳을 찾아오면서 사실 물어보아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망설였지만 보주의 얼굴을 보자 물어 보아야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무엇을 말인가?"

"지금 운중보 내부에서 흐르는 이상기류를 보주께서 모르시고 계실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보주께서는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고 계십니다. 그것이 겉으로만 그러시는 것입니까? 아니면 방관입니까? 그것도 아니라면 이미 운중보에서 마음이 떠나신 것입니까?"


덤벙거리는 풍철한으로서는 꽤 조리 있게 물은 말이었다. 이곳에 오면서 수없이 어떻게 물을까 연습이라도 한 것 같았다. 보주는 또 다시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에 반해 설중행은 속으로 혀를 찼다. 보주가 설중행을 한 번 흘낏 보고는 말했다.

"어찌 저 녀석이 묻는 것과 똑같은지 모르겠군."


그 말에 풍철한은 어이없는 표정으로 설중행을 바라보았다. 어이없는 표정은 설중행도 마찬가지였다. 어차피 사람이란 궁금한 것이 비슷한 모양이라고 치부하면 그만이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모든 사람들의 공통적인 궁금증이 이것이라 해도 과언은 아닐 터였다.

다만 설중행은 보주의 확실한 대답을 듣는다는 것을 이미 벌써 포기한지라 무의식중에 다시 한 번 교자를 집어 입속으로 처넣었다.

'후후…보주가 나에게 한데로 왜 사냐고 되물으면 풍형은 무슨 표정을 지을까?'

설중행은 교자를 으적으적 씹으며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교자 맛이 있는지 없는지는 중요하지 않았고, 자기가 왜 먹는지도 몰랐다. 그저 그냥 있기가 어색해 먹었을 뿐이었다.

"물었으니 대답은 해주어야지."

보주가 풍철한과 설중행을 번갈아 바라보며 말했다. 그 의미는 풍철한 뿐 아니라 설중행에게도 분명한 대답을 해주겠다는 것 같았다. 설중행의 얼굴에 의외라는 듯한 표정과 함께 두 사람의 얼굴에 기대가 피어올랐다.

"스스로의 삶에 대한 의미도 가지지 못하고, 존재의 가치조차 느끼지 못할 때…이미 스스로 꺼져버린 삶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할 일은 거의 없어.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누군가 오랜 동안 묻어두어 퇴색해 버린…그래서 다시는 떠올릴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던 기억을 끄집어낸 것이지."

설중행은 슬그머니 고개를 숙이고 심술 맞은 미소를 지었다. '그럼 그렇지' 역시나 그랬다. 대답을 해석하기 더 어렵다. 그러나 보주의 말을 중간에서 끊고 싶지는 않았다.

"그것은 젊은 시절 꿈꾸었던 것이었지만…아니라고…이룰 수 없는 것이라고 뇌리에서 지워버린 것인데 아주 가까운 누군가가 그것을 불쑥 끄집어냈어. 그리고 마지막 염원이라고 말할 때 노부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고, 다른 무엇도 할 수 없었어. 더구나 노부에게 어려운 부탁까지도 하더군."

이상한 일이었다. 말하던 보주의 노안에 언뜻 기이한 현상이 일어나고 있는 것 같았다. 입은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노안에는 언뜻 물기가 스쳤던 것이다.

"…"

영문을 알 수 없다는 듯 두 사람이 보주를 응시하자 자신의 모습을 보이기 싫은 듯 고개를 다른 쪽으로 돌렸다. 그리고는 더 이상 이야기하기 싫은 듯 짤막하게 애써 목소리를 높이며 말했다.

"노부 역시 이것이 옳은 선택인지 아직 판단을 내릴 수 없어. 그동안 노부는 선택하는 법을 잊어버렸거든. 나중에…해답은 자네들이 찾아…."

잠시 침묵이 흘렀다. 보주는 가슴에서 솟구쳐 오르는 슬픔과도 같은 감정을 다스리기 위해, 그리고 풍철한과 설중행은 보주의 말을 되새기기 위해 말이 없었다.

삶의 의미조차 잃어버리고 살아왔을 것이다. 또한 꺼져버린 삶이란 보주의 삶이고 지금까지 그렇게 죽은 사람처럼 살아왔다는 의미다. 그것까지는 이해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미 묻어버린 기억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그것을 염원이라 말한 사람은 누굴까?

이 모든 운중보의 혼란을 보주가 말한 가까운 사람이 만든 것임에 틀림없다. 혼란을 만든 그는 무슨 목적으로… 그것이 분명 그의 염원일진데…그것이 무엇일까? 그리고 보주는 왜 말리지 않는 것인가? 보주가 말릴 수 없는 존재일까? 보주까지도 옳은 선택인지 알 수 없다는 그것은 과연 무엇일까?

허나 이 점에서는 풍철한과 설중행의 이해가 달랐다. 풍철한으로서는 이미 함곡으로부터 들은 바가 있었다.

그렇다면 보주의 가까운 사람이 바로 함곡과 손을 잡은 사람이 아닐까? 차마 친분 때문에 말릴 수 없는 그런 사이가 아닐까? 헌데 보주가 보이는 저 뿌연 물기는 무슨 의미란 말인가? 보주가 슬퍼해야 할 일은 도대체 무엇인가? 알면서도 막지 못하는 자신의 신세가 처량해서인가? 아니면 다른 무엇이 있는 것일까?

헌데 그때였다. 무거운 침묵을 깬 것은 밖에서 들린 시비의 청아한 목소리였다.

"능효봉…능대협이란 분이 찾아오셨습니다."

"능형이?"

세 사람 모두의 시선이 허공에서 엉켰다. 매우 뜻밖이라는 표정들이었다. 그러나 보주의 표정은 더욱 특이했다. 마치 기다린 사람이 온 것처럼 매우 반가운 기색이 있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이제 올 것이 왔구나 하는 근심어린 표정도 섞여 있었다.

"식사는 다 했느냐?"

보주는 시비에게 분부를 내리기 전에 설중행을 보며 물었다. 먹은 것이라곤 서너 개의 교자가 전부다. 하지만 더 이상 식사할 분위기가 아니라는 사실쯤은 설중행도 알고 있었고, 또한 더 먹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예. 충분합니다."

"그럼 자리를 옮기지."

먹지도 않을 식은 음식들을 보며 이 자리에 있을 필요는 없다. 보주가 밖을 향해 말했다.

"능대협을 다청(茶廳)으로 모시거라."

그리고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풍철한과 설중행도 보주의 움직임에 따라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늘은 노부에게 새로운 손님들이 전갈도 없이 불쑥 찾아오는 날인가 보군."

허나 곧 보주는 미소를 지으며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나이가 먹으면 말이야. 그래도 젊은 사람들이 찾아와 말벗이라도 해주는 것이 정말 고맙거든."

웬일일까? 보주의 마른 등짝에 낙엽이 묻어나는 듯한 느낌이 든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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