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를 위해서 한 수업이 아니었다?

1학기 마지막 수업시간, 아이들과 쪽지상담을 했습니다

등록 2007.07.18 11:31수정 2007.07.18 1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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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학기 마지막 수업시간에 아이들과 쪽지 상담을 했습니다. 해마다 하는 일이지만 이번에는 조금 망설임이 있었습니다. 솔직히 아이들의 반응이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친절한 교사가 되겠다는 약속을 제대로 지키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너무 자주 화를 내지 않았나 하는 후회감도 밀려왔습니다.

그럼 어떻게 할 것인가? 고민하다가 일단 피하지 말고 부딪혀 보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아이들도 저처럼 후회감에 젖어 있다면 그런 마음을 서로 털어놓고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는 시간을 갖는 것도 좋을 것 같았습니다. 그런 생각을 해서 그랬는지 아이들과 저 자신을 위해 더없이 위로가 되는 경구가 하나 떠올랐습니다. 저는 그 경구를 제목으로 아이들에게 이런 짧은 편지를 준비했습니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른 때입니다!

기억하시나요? 여러분과 선생님과의 첫 만남의 순간을! 그때 선생님은 여러분께 친절한 교사가 되겠다고 약속을 했고,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을 사랑하겠다고 약속을 했지요. 그 약속이 잘 지켜졌는지 누군가 물어본다면 우린 어떤 대답을 할 수 있을까요? 여러분은 어떨지 모르지만 선생님은 자신이 없네요. 수업을 끝내고 교실을 나올 때마다 후회감이 밀려올 때가 많았으니까요.

왜 좀 더 여러분을 기다려주지 못했을까? 왜 좀 더 다정한 말로 다가가지 못했을까? 여러분은 어땠나요? 여러분 자신을 사랑하겠다고 한 약속을 어느 정도라도 지켰는지 궁금하군요. 늦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르다는 말이 있습니다. 지나가 버린 시간은 되돌릴 수가 없기 때문에 후회가 밀려오는 지금 바로 시작하면 가장 빨리 시작하는 셈이 되지요. 그 새로운 시작을 위해서 잠깐 마음을 모아보는 시간을 가졌으면 합니다.


저는 올해 1학년 영어를 맡아 남학생 한 반과 여학생 두 반에서 아이들을 가르쳤습니다. 먼저 남학생반에 들어가 마지막 수업을 기념하는 간단한 다과회(흔히 쫑파티라고 함)를 마친 뒤에 아이들 앞에서 떨리는 목소리로 편지를 읽어주었습니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하얀 종이를 한 장씩 나누어 주고 1학기 동안 잘했거나 후회스러운 일을 적어보라고 했습니다.

저의 수업방식이나 태도에 대해서도 솔직한 의견을 써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더 좋은 만남을 위해서 서로 고쳐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도 숨김없이 적어보라고 했습니다.


수업을 마치고 교무실로 돌아와 아이들이 제게 건네준 쪽지를 읽어보았습니다. 제법 유머 감각이 풍부한 내용도 있었고, 전혀 뜻밖의 진지함으로 저를 감동시킨 아이도 있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전체 내용은 평범해도 단 한 줄의 글로 제 눈길을 사로잡은 아이도 있었습니다. 그중에서도 제 눈길을 가장 오랫동안 고정시킨 것은 바로 이 문구였습니다.

"우리를 위해서 하는 수업 같았다."


일견 평범해 보이는 그 한 마디는 저로 하여금 많은 생각을 하게 했습니다. 저는 그 짧은 문구를 앞에 두고 한순간 감전이 된 듯한 기분이었습니다. 아이가 저에게 준 쪽지에 적힌 문구는 분명 저를 긍정적으로 평가한 것이었지만, 저는 그 이면에 적힌 사실들을 적시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를 위해서 하는 수업 같았다니? 그럼 언제는 우리(아이들)를 위한 수업이 아니었단 말인가? 그럴 수도 있다. 아니, 분명히 그랬을 것이다. 나를 포함한 많은 교사들이 아이들을 위한 수업이 아닌, 수업을 위한 수업, 혹은 교사 자신을 위한 수업, 그것도 아니라면 어쨌거나 아이들의 흥미와 호기심과 미래와는 무관한 수업을 해왔을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아이가 왜 새삼스럽게 그런 생각을 했겠는가. 우리를 위해서 하는 수업 같았다고.'

제 상상력이 좀 지나쳤을까요? 그럴 수도 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저는 아이가 쪽지에 적어준 그 문구를 이렇게 거꾸로 한 번 읽어보았습니다.

"우리를 위해서 한 수업이 아니었다."

아, 그런 끔찍하고 허망한 일이 일어나지 않기 위해서라도 저는 이번 방학을 충실하게 잘 보낼 생각입니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른 때이니까요.

아이들이 쓴 글을 읽어보니 다행히도 저에 대한 평가는 대체로 긍정적이었습니다. 특히 친절한 교사가 되겠다는 아이들과의 약속은 그런 대로 잘 지켜진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다음은 평소 유머감각이 풍부한 아이가 쓴 글입니다.

"내가 담임 선생님 다음으로 좋아하는 영어 선생님! 한 마디로 표현하면 음유시인이랄까, 노래와 시를 좋아하시고 딱 보면 공처가라는 생각이 든다. 매를 드시지 않고 차분하게 대화로 푸신다(가끔은 화도 내신다). 강압적이지 않고 학생들과 가장 가까우신 분 같아서 편하다. 날이 좋거나 수업하기 싫을 때 들려주시는 팝송은 그의 매력을 증폭시킨다.

1학기 지내면서 제일 기억나는 일은 선생님이 처음 화를 내셨을 때(화를 내시면 만원을 벌금으로 내신다고 하셨다) 얼굴은 침울한데 속으로 '이제 과자 먹는 거야'하고 생각했던 걸 이 글을 빌어 사과 드리고 싶다. 이제 1학기가 모두 끝나고 헤어지지만 2학기에도 웃는 모습으로 뵙고 싶다."


다음은 1학기 동안 학교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하여 어려움을 겪은 한 아이가 제게 건네준 쪽지입니다. 글을 읽어보시면 제가 아이들에게 희망을 버리지 못하는 이유를 아시게 될 것입니다.

"1학기를 보내면서 후회스러운 것이 너무도 많다. 늘 잘하자고, 고등학교에 들어와서 공부를 열심히 하자고 다짐하고 다짐했지만 늘 학교에 와서 잠만 자고 핸드폰이나 만지고 장난친 것만 기억에 남아 있을 뿐이다. 그리고 몸에 좋지 않은 담배를 알게 되어서 담배를 시작한 것이 너무도 후회스럽다.

하지만 지금은 깨닫고 돌이켜서 다시 예전의 순수했던 모습으로 돌아갈 것이기에 지금 나는 가슴이 벅차다. 선생님께서 아주 친절하게 해주시고 자상하게 대해주신 일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나는 선생님이 변하기보다는 우리가 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저를 돌아볼 수 있는 이런 시간을 주신 선생님 사랑해요!"


벌써부터 아이들이 그립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서로 변화된 모습으로 만나게 될 2학기가 기다려집니다.
#1학기 #마지막 수업 #아이들 #쪽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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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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