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기름기' 빼려면 걸어라

[서평] 조이스 럽의 산티아고 순례기 <느긋하게 걸어라>

등록 2007.07.18 17:34수정 2007.07.19 0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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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느긋하게 걸어라> 겉표지

<느긋하게 걸어라> 겉표지 ⓒ 복 있는 사람

걷기는 일이었다. 매일 왕복 20리길을 걸어 학교를 다녔던 중학교 시절, 해마다 충무공 탄신 기념일에 맞춰 교련복을 입고 100리길을 걸었던 고등학교 시절 그리고 군대 시절이야 더 말할 것도 없고. '걷기'의 의미란 게 따로 있는 게 아니었다. 걸어야하기 때문에 걷는 것이었지.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걷고 싶어도 걷기 힘든 시절이 되어 버렸다. 사무실 의자에 앉아 늘어난 뱃살을 허리띠 안으로 밀어 넣는 상황이 되었으니, 그리고 그 상황이 안타까워 걷기는 걷되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는 쳇바퀴 위에서 걷고 있다. 헬스클럽 러닝머신에 몸을 싣고 있는 현실을 두고 하는 말이다.


언제부턴가 걷기 열풍이 불더니 그 뜨거운 바람이 멈추지 않고 저 멀리 스페인 북부 '카미노 데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카미노는 도로, 여정, 길을 뜻한다. 콤포스텔라는 별이 쏟아지는 들판)라고 불리는 산티아고 순례길까지 이어지고 있다. 아마 산티아고를 배경으로 쓴 파울로 코엘료의 <순례자>가 많은 영향을 주었으리라.

국내에선 생소했던 지명이었던 산티아고가 누구나 한 번쯤 가볼 만한 또는 등 떠밀려서라도 꼭 가보아야 할 여행지로 유명세를 치르고 있는 것은 꽤 최근의 일이다. 이제 산티아고 순례길은 두 다리를 움직여 해야 할 일을 온갖 기계에 맡겨버린 인간의 걷기 본능을 일깨우는 성소(聖所)라고 해도 좋으리라.

산티아고 순례는 프랑스 생장피드포르에서 시작해 스페인 북서부 해안과 가까이 있는 산티아고까지 이어진 스페인 북단을 800㎞ 거리를 걸어 횡단해야 한다. 순례길의 목적지 산티아고에는 예수의 12제자 중 한 명인 성 야고보의 무덤이 있다고 전해져 9세기부터 순례의 행렬이 멈추지 않았다고 한다.

1천년이나 믿음의 영혼으로 충만했던 사람들이 그 길을 순수하게 두발로 걸었을테니 산티아고 순례길에 쌓여있는 영성의 기운은 흩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카미노 데 산티아고'로 떠난 노수녀


인생의 의미를 모두 깨달았음직한 이순(耳順)의 나이에 카미노로 떠난 성 프란치스코회 소속 노수녀 조이스 럽의 <느긋하게 걸어라>(복 있는 사람)는 산티아고 여정을 담은 책이다.

여행가나 작가의 시선으로 바라본 산티아고 순례가 아닌 종교인의 입장에서 한 걸음 한 걸음 '영적인 교감과 공공체적 공명'을 느끼며 쓴 글이기에 독자는 순수한 '순례'의 의미에 가깝게 다가갈 수 있다.


"우리 각자에게는 카미노, 곧 인생길이 있다. 이 길을 통해 우리는 앞서간 사람들과 지금 함께 가는 사람들의 영적인 풍요에 접근할 수 있다. 도중에 만나는 자애로운 사람들은 모두 저마다의 긍정적인 선과 충만한 성장을 흔적으로 남긴다. 내 손이 성 야고보 성당 대리석 기둥의 움푹 패인 손자국에 쉽게 들어간 것처럼, 우리도 이 정기 속에 쉽게 들어갈 수 있다."

믿음으로 한평생을 보낸 그녀지만 처음부터 순례자의 몸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어깨를 내려누르던 배낭이 자신과 한 몸이 되고, 종아리와 허벅지의 근육 통증이 걷기에 익숙해질 무렵부터 제목처럼 느긋하게 걷기가 가능진다. 느긋하게 걷기가 가능해진 순간부터 순례의 목적이 단지 성 야고보의 뼈가 묻혀있는 산티아고 성당에 도착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고 깨닫게 된다.

그리고 그녀의 걷기는 곧 삶의 깨달음으로 이어진다. 순례길 곳곳에 뿌려져 있는 그 길을 앞서간 선조들의 모험, 관용, 믿음, 목적, 교제, 신뢰, 용기의 에너지가 솜이 물 빨아들이듯 몸 속으로 스며들고 영혼의 더듬이를 곧추세운다. 오랜 세월 나눔의 삶을 살아온 노수녀는 자신의 깨달음을 간결한 말로 독자의 마음을 흔든다.

"'자신의 어깨로 자기를 질' 수는 없다는 것을 카미노는 나에게 확실히 가르쳐 주었다. 다른 사람들이 주는 것을 받아들여야만 하는 삶의 순간이 나에게도 올 것이다. 그들이 내 짐을 져 주도록 나는 가만히 있어야 한다. 다음번에는 내 마음이 더 열려 있을 것이고, 도움의 손길을 선뜻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의 어깨로 자기를 질 수 없음'을 깨닫게 되는 카미노

세상을 자신의 믿음과 의지만으로 살 수 없다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지만 쉽게 버릴 수 없기에 '아집'이 된다. 그러나 카미노에선 자신이 살아왔던 세월만큼 쌓아올린 벽을 쉽게 허물게 되는 모양이다. 카미노의 장점은 나란히 걷는 동료와 소통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길이 끝나는 목적지에 시선을 모으고 풍경 속에 녹아든 순례자가 서로 대화하는 광경은 상상만으로도 평화롭다.

<느긋하게 걷기>는 그녀의 순례 동반자이자 20년지기 친구인 톰 페퍼 목사와의 대화 뿐 아니라 카미노에서 만난 많은 이들과의 대화로 채워져 있다. 그 대화들은 대부분 자신의 삶에서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기름기'를 빼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 그리고 그 '기름기'를 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알려준다. '과잉 소유의 습성'을 버리지 못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깨우치기 위해선 배낭을 짊어지고 과소유의 부작용을 몸으로 체득할 수밖에 없는 모양이다.

자신의 테두리 안에 얼마나 많은 것을 사다 나르고, 평판과 외모와 지위, 지식에 얽메여 사는가. 그것들을 소유하고 유지하는데 엄청난 시간과 열정을 들이고 혹시나 쌓아올린 것들이 부서지지 않을까 무너지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며 평생을 산다. 그녀는 이러한 삶에서 벗어나 한 번쯤 자신을 되돌아 볼 필요가 있다고, 쌓아올려둔 것들이 오히려 명징한 사고와 해방된 마음으로 인생길을 걷는데 방해가 될 수 있음을 알려준다.

"나는 가볍게 다닌다는 것이 단지 짐의 양의 문제가 아니라 그 짐 때문에 우리가 일상생활의 정말 중요한 일에서부터 멀어지는 문제이기도 함을 주시했다. 그런 짐은 우리의 주의력을 흩트리고 시간을 잡아먹으며 종종 스트레스를 가중시킨다."

맞다. 쓸데없이 얼마나 많은 짐을 가지고 나는 인생길을 걷고 있는가. 잡다한 것들을 과감하게 털어내지 못하고 끌고 가고 있는가. 수없이 많은 짐을 지고 있어도 결국 빈손으로 떠나야한다는 변하지 않는 '진리'를 그녀는 <느긋하게 걸어라>를 통해 알려주고 싶은 것이다.

"이 땅에서 우리는 순례자요 나그네다.
우리는 멀리까지 왔고
아직도 먼 길이 우리 앞에 남아있다."
- 에드워드 셀너

느긋하게 걸어라 (미니북) - 산티아고 가는 길

조이스 럽 지음, 윤종석 옮김,
복있는사람, 2014


#느긋하게 걸어라 #산티아고 #조이스 럽 #순례 #수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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