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은 대통령감이 못되고, 국회의원으로 정치인생을 마감하겠다고 하던 조순형 의원이 대선출마를 선언했다. 그리고 단박에 이른바 범여권 후보 지지도 2위에 올라섰다.
조순형 의원, 훌륭한 사람이다. 그가 비록 우파적 정치철학을 가지고 있지만, 적어도 자기 나름의 원칙과 소신을 꿋꿋이 지켜온 사람이고 부패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의 역할은 딱 거기까지가 아닐까 ?
대통령은 굉장한, 엄청난 자리다. 그래서 정치권에 들어온 사람은, 2선 3선의 국회의원이나 장관 한 번이라도 해본 사람들은 저마다 대통령을 꿈꾸며 기회를 놓칠세라 명함을 내민다. 올 대선을 앞두고는 수십명의 대선 예비후보가 난립하고 있지 않은가. 대대로 한국 제1의 부자인 삼성의 이건희 부럽지않은 대단한 자리다. 이 나라 최고의 명예와 권력이 주어지는 자리다. 이건희도 비록 속마음이야 어쩔지언정 현직 대통령 앞에서는 꼬리를 내릴 수 밖에 없는 굉장한 자리다.
그렇기 때문에 대통령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권력의지가 투철해야 한다. 대통령이 되기 위한 자질은 확고하고 체계잡힌 정치철학, 지도력, 청렴성 등 무수히 많겠지만, 그중에서도 필수적인 것은 바로 권력의지다. 자신이 반드시 권력을 장악하여 평생 갈고닦은 소신을 펼쳐보겠다는 의지, 욕심이다. 그런데 조순형에게는 결정적으로 그게 부족하다.
조순형은 신사다. 한국 정치인을 대표하는 신사다. 그런데 그런 그가 진흙탕에서 서로 머리끄댕이를 잡고 뒹굴어야 하는, 모든 세력이 각자의 정치적 운명을 걸고 건곤일척의 대승부를 벌이는 살벌한 대선판에서 과연 강력한 지도력을 발휘할 수 있을까 ?
지난 탄핵 당시를 전후하여 조선닷컴의 여론조사에서 조순형이 차기대통령 1위를 한 적이 있었다. 조순형은 김대중 당에서 국회의원을 했지만, 특유의 우파적 성향으로 인해 조선독자들에게도 한나라당 성향의 지지자들에게도 상당한 호감을 주어온 인물이다. 그래서 한나라당에서는 조순형의 대선 출마를 즉각 환영하는 공식논평이 나왔다.
나경원 한나라당 대변인은 26일 브리핑에서 "조 의원의 대선 출마는 민주당을 고사시키려는 DJ와 노대통령의 정치폭력에 맞서 민주당을 지켜내려는 고심에 찬 결단이라 생각된다"고 말했다.
나 대변인은 "미스터 쓴소리, 깨끗한 이미지로 알려진 조 의원은 여권의 우후죽순, 오합지졸 후보들과는 달리 처음으로 자격을 갖춘 후보"라고 극찬하면서 "조 의원의 소신이 바뀌지 않길 바란다"고 독려하기도 했다.
한나라당의 대변인 공식 논평을 보자. 무언가 이상하지 않은가 ? 왜 한나라당은 저토록 조순형의 출마를 환영하고, 심지어 그가 중도에 사퇴하지 않도록 미리 못박으면서 단단히 격려까지 하고있는 것일까 ? 남의 당의 대선주자를 왜 이토록 환영하는 것일까 ? 웃기는 일이 아닌가. 정말로 조순형이 자기 당에 위협이 된다면 저토록 환영하고 나설 수 있겠는가 말이다.
한나라당은 대통합을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다. 민주당까지를 포괄하는 이른바 범여권이 대통합하여 단일 대선후보를 낸다면, 그 것이야말로 지난 두차례의 끔찍한 악몽이 재현될 수도 있는 절체절명의 위기상황이 올 것을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른바 범여권을 이간하고 갈라놓기 위해서 민주당을 두둔하고 조순형의 출마를 쌍수들어 환영하는 것이다. 그들이 안전하게 집권하기 위해서는 범여권의 분열만큼 호재가 없기 때문이다.
김대중이 집권하여 수십년간 영남편향적, 우편향적으로 진행되었던 한국사회의 시계추를 반대편으로 되돌려놓았다. 그런데 그만 그의 후계자인 노무현이 집권하여 이도 저도 아닌 혼란과 난장판을 만들어놓았다. 그래서 노무현 정권에 실망과 염증을 느낀 한국 사회가 다음은 한나라당에게 정권을 맡기는 것이 정해진 수순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렇다면 한나라당에게 정권이 넘어가느니 차라리 양쪽을 다 포괄하면서, 정치경륜은 김대중 밑에서 민주당 안에서 쌓았고, 정책적으로는 한나라당 성향인 조순형같은 인물이 집권하게 되는 것이 부작용을 최소화하면서 한국 사회가 그나마 제대로 나아갈 수 있는 최적의 선택이 될 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조순형은 대통령이 되기위한 필수조건인 권력의지가 박약하다. 주위에서 떠밀으니까 거기에 얹혀서 편안하게 대통령 한 번 해볼까 하는 것이다. 안되면 말고. 안된다고 해서 특별히 손해볼 것은 없으니까. 한나라당도, 민주당 사람들도 이미 다 알고 있다.
한나라당만 조순형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고, 민주당내에서도 조순형을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박상천 대표는 자신이 대통령선거에 나설만한 대중성이 없음을 알고 있기에, 어렵게 다시 잡은 민주당이라는 정파의 권력을 놓지 않고 차기 총선에서 자기 세력을 확고히 다져서 향후 정치권의 키 플레이 메이커로서 행세하기 위해서다. 민주당내의 다른 대선예비 후보들은 조순형같은 명망가가 경선에 나서면 대중의 관심을 끌어서 흥행이 되고, 같은 판에 나선 자신도 덩달아 주목받을 수 있을 것이니 조순형의 출마를 환영하고 나서는 것이다.
정치를 모험주의적으로 하면 안된다.
또한 公보다 私를 앞세워서는 안된다는 것은 새삼 다시 말할 필요조차 없는 정치인 제1의 철칙이다. 그런데 지금 민주당 독자노선을 주장하고 있는 사람들은 공보다 사를 앞세우고 있는 것이다. 세력통합과 후보통합을 병행 추진해나가도 그중 하나라도 제대로 되기가 쉽지 않은 것이고 될까말까 한데, 우선 각자가 후보를 뽑고 선거일에 임박해서 후보를 단일화하잔다.
선거일이 며칠 뒤로 다가왔는데, 그 때 가서 단일화가 안되면 어쩔 것인가. 단일화가 안되더라도 그 뿐이라는 심산인 것이다. 꼭 단일화를 해야한다는 생각은 애초부터 없는 것이다. 한나라당으로 정권이 넘어가더라도 자신의 정치생명만 이어나갈 수 있으면 된다는 생각인 것이다.
대통합이 싫다고 하자. 자신을 대통령에 당선시켜준 민주당을 깨고 나가서 딴살림을 차렸고, 그후에 국정이라도 제대로 했으면 모르지만 우왕좌왕하면서 한국 사회를 정체시키고 심지어 일정 부분은 후퇴시키기까지한 노무현과 유시민 김두관 김혁규 등의 신영패가 싫어서 죽어도 그들과는 통합을 못하겠다고 하자. 그럼 그 후에는 어떻게 되는가.
이명박이나 박근혜가 대통령이 되는 것은 필연적인 일이 될 수 밖에 없다. 그 후의 사태를 과연 어떻게 감당하려 하는가. 한 사람은 군사독재의 현신이고, 한 사람은 개발독재-승자독식의 화신이다. 또한 둘 다 영패의 본당이다. 그들이 집권한다면 도대체 한국 사회가 어떻게 되겠는가. 비록 노무현이 어질러 놓았지만, 김대중이 천신만고 끝에 집권하여 터를 닦아놓은 한국사회의 균형잡힌 발전이 어떻게 되겠는가 말이다.
한국 정치판에서 보석처럼 빛나는, 훌륭한 정치인 조순형의 대선 출마를 환영할 수만은 없는 이유다.
덧붙이는 글 | 정치웹진 남프라이즈에도 송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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