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치 볶음밥과 퇴근 시간 알람 메모

큰 기쁨은 작은 것 속에 숨어 있는 풍선

등록 2007.08.02 18:55수정 2007.08.03 1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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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형제 없이 홀로 자란 나에게 아버지는 각별한 관심을 많이 쏟아주셨다. 어머니의 영역일 수 있는 부분들도 아버지는 당신이 나서서 하셨다. 아버지는 운동회를 위해 오자미(헝겊 주머니에 콩이나 모래 따위를 넣고 공모양으로 만든 주머니)와 달리기를 잘하도록 두꺼운 광목으로 덧신을 만들어 주셨다. 당시 아이들은 대부분 운동화를 신지 않고 맨발로 달리기를 했다.


어머니가 바느질을 하실 수 있었지만 아버지는 손수 만들어 주셨다. 아버지는 손재주가 있으셔서 무엇이든 뚝딱뚝딱 잘 만드셨다.

나도 그런 피를 이어받은 것 같다. 딸들을 아끼는 아빠의 마음이 엄마가 해줄 수 있는 부분도 내가 나서서 하도록 유도할 때가 있다. 더구나 아이들의 '장단 맞추어 주기'는 나의 그런 기질을 더 활성화(?) 시킨다. 요즘 아이들이 나의 그의 기질에 윤활유를 불어 넣어준 것은 '김치 볶음밥 만들기'다.

"아빠! 오늘도 김치볶음밥 먹고 싶어요."
"또! 지겹지 않아?"
"아니요. 아빠가 해주신 것 먹고 싶어요."


특히 큰딸은 사춘기를 맞았고 신체가 커지면서 식욕이 배가 되었다. 김치 볶음밥을 두 그릇씩 해치우곤 한다. 큰딸이 말했다.

"엄마가 만들어준 것도 맛이 있는데, 아빠가 만들어준 것이 쪼금 더 맛있어요."
"그게 아니고. 아빠와 너희들이 입맛이 비슷해서 그래."



딸들의 재촉에 나는 김치 볶음밥 요리를 시작했다. 냉동고에 있는 불고기를 꺼내 해동을 한 후 프라이팬에 포도씨 기름을 넣고 불고기와 잘게 썬 김치를 넣고 익혔다. 그리고 밥과 참기름을 적당히 넣은 후 불고기 양념 맛 첨가제를 조금 넣은 후 밥을 볶았다.

큰딸의 불고기밥 전용 그릇인 큰 사발에 밥을 가득 담았다. 딸 아이들은 배고프다며 반찬도 없이 허겁지겁 밥을 먹었다.


"예나 예린아! 그렇게 김치 볶음밥이 좋아?"
"네 아빠. 너무 맛있어요."
"아빠 정성이 들어가서 그래. 아빠 마음 알지. 사랑해."


큰아이는 한 그릇을 비우고 더 달라고 한다. 또다시 듬뿍 담아 주었더니 그것도 순식간에 그릇을 비웠다. 큰딸이 말했다.

"아빠! 물 좀 주세요."
"물은 너희들이 가져다 먹으면 좋을 것 같은데."
"아빠! 방학 때는 아빠가 다해 주세요."
"안 움직이면 게을러지고 살쪄."


그러자 나의 교육적인 발언 앞에 둘째 예린이가 가슴에 묻어 두었던 말을 엉겁결에 꺼냈다.

"아빠! 우리가 어릴 때 아빠가 바쁘시고 대학원 공부하신다고 만날 늦게 오셔서 밥같이 먹은 기억이 없어요?"

동문서답 같은 말을 아빠인 나에게 던졌지만 그 말이 내 뇌리를 강하게 치고 반대편으로 튕겨 갔다. 딸들의 간접시위 목적은 어릴 때 아빠의 잔정을 받지 못했다는 폭탄 발언이었다. 나는 순간 아차 싶었다. 그 순간을 유머로 넘겼다.

"그럼 오늘부터 방학 동안 아빠가 공주님들의 종이 되어드리지요?"

그리고는 무대인사를 하듯이 제스처를 취하며 아이들을 웃겼다. 딸들은 까르르 웃었다. 순간 지난 시간을 돌아보니 일 년 365일 중 360일 정도를 출근했고, 대학원을 세 곳이나 쉬지 않고 다녔으니 아이들과의 저녁 시간은 거의 없었다. 아이들은 그런 기억들을 마음 깊은 곳에 담아 두고 있었다.

컵에 물을 담아 아이들에게 주면서 말했다.

"방학동안 김치 볶음밥과 시원한 물은 아빠가 무한정 공급한다. 알았지?"
"네. 호호호."


밥을 먹은 후 큰딸이 내 휴대폰을 달라고 했다. 그러더니 무엇인가 조작하고 저장하는 것 같았다. 음악도 선택하고 동생과 음악 선택에 대한 의견도 묻곤 했다.

"예나야! 뭐하는 거냐?"
"아빠 퇴근 시간 알람이예요."


딸들은 아빠인 내가 방학 동안이라도 집에 일찍 들어오라고 시간을 알리는 알람을 저장했던 것이다. 저장내용은 이랬다.

시간 6시 30분, 벨 울림은 '매일, 항상 소리'로, 음악은 'Ain't No Mountain High Enough'이었고, 메모는 '아빠, 빨리 집으로 오3!'이었다.

그날부터 나는 김치 볶음밥과 퇴근 시간 알람 준수로 딸들과의 신뢰를 회복했다. 오후 6시 30분에 집무실을 나와 저녁 7시쯤 집에 들어가면 아이들은 벨 소리와 함께 집 안 어디론가 숨어 버린다. 아빠와 하지 못했던 어린 시절 숨바꼭질 놀이는 이제야 하는 것이다. 내가 아이들이 숨은 곳을 찾아 놀래주면 까르르 웃는 것으로 우리 집의 저녁 시간은 시작된다.

딸 아이들은 작은 것에 서운해 하고 작은 것에 기뻐하는 것 같았다. 인생길은 작은 것 속에 큰 진리가 언제나 숨어 있다. 모순 같음 말이지만 큰 기쁨은 작은 것 속에 숨어 있는 풍선이다.

덧붙이는 글 | 나관호 기자는 크리스천커뮤니케이션연구소 소장이며 북칼럼니스트입니다. 또한 <나관호의 삶의 응원가>(www.bigfighting.co.kr)라는 타이틀로 메일링을 통해 글을 보내고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나관호 기자는 크리스천커뮤니케이션연구소 소장이며 북칼럼니스트입니다. 또한 <나관호의 삶의 응원가>(www.bigfighting.co.kr)라는 타이틀로 메일링을 통해 글을 보내고 있습니다.
#김치볶음밥 #알람 #메모 #딸들 #행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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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제이 발행인, 칼럼니스트다. 치매어머니 모신 경험으로 치매가족을 위로하고 있다. 크리스천커뮤니케이션연구소 소장이다. 기윤실 선정 '한국 200대 강사'로 '생각과 말의 힘'에 대해 가르치는 '자기계발 동기부여' 강사, 역사신학 및 대중문화 연구교수이며 심리치료 상담으로 사람들을 돕고 있는 교수목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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