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산 등반, 거북이가 토끼를 이기다

여름산의 추억

등록 2007.08.07 14:20수정 2007.08.07 1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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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일 한라산 등반을 준비하면서 맨 처음 해야 할 일은 어떤 코스로 산을 오르내릴 것인가였다. 우리는 성판악에서 출발하여 백록담 정상을 보고 관음사로 내려오는 등반 코스를 선택했는데 총 18.3km로 등반 예상 시간이 9시간 30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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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8월 2일 한라산 백록담 ⓒ 신소영

서른이 가까운 나이가 됐음에도 이제껏 하루종일 등산해본 경험이 없던 터라 계획을 짜면서도 내심 걱정이 되었다. 그러나 그림에서만 보던 백록담을 보고 싶다는 소망이 걱정을 내려놓게 했다. 가보지 않은 길, 해보지 않은 일이지만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품고서 한라산을 향했다.


성판악으로 오르는 산의 초입은 경사가 완만하여 걷는데 부담이 없었다. 울창한 나무가 햇살을 가려주어 한여름이었음에도 서늘한 기운마저 감돌았다. 아침 일찍부터 산을 오르는 이는 나뿐이 아니었다. 대여섯 살쯤으로 보이는 아이들에서부터 예순이 가까운 어르신들까지 한발 한발 내딛고 있었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산을 오르는 풍경은 다른 사람보다 일찍 정상에 오르겠다는 욕심을 내려놓게 했다. 다른 사람들의 속도에 연연하다 보면 내 몸이 빨리 지쳐서 정상을 보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날 나는 ‘토끼와 거북이의 경주’를 떠올리며 산을 올랐다. 매표소 입구에서 알게 된 한 분이 “제가 걸음이 좀 빨라서 먼저 가겠습니다”하며 내 앞을 지나갔다. 쏜살같이 사라진 그분을 다시 만난 것은 그로부터 한시간 반쯤 지나서였다. 그가 산기슭에 앉아 쉬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하산할 때까지 한번도 그분이 우리를 앞서가는 것을 보지 못했다. ‘걸음이 빨라서’라는 말씀이 자꾸 떠올라 우리는 ‘토끼’는 왜 안 오냐며 산을 오르락내리락하는 내내 토끼의 안부를 궁금해했다.

완만하던 산길이 사라악약수터부터 가파르게 변했다. 사라약약수터부터 진달래대피소까지 돌계단을 올랐다. 산을 내려오는 분들을 향해 “안녕하세요”라고 인사하면 “네” “좋은 산행 하십시오” 등의 인사가 돌아왔다. 신기한 것은 한 분과 인사를 나눈 뒤에는 발걸음에 힘이 생긴다는 사실이었다. 기분이 좋아진 까닭인지 그 연유는 불분명하지만 인사를 하고 나면 더 힘차게 산을 오를 수 있었다. 여기서도 황금률이 여지없이 적용되었는데 내가 먼저 인사하지 않으면서 내게 먼저 인사해주는 분을 만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진달래대피소에서 간단히 점심을 먹고 정상을 향해 올랐다. 이후에 약수터가 없다는 안내표지판을 보고 대피소에서 삼다수 한 병을 구입했다. 제주도에서 운영하고 있는 까닭이라 했지만 생수 한 병에 500원 받는 것이 낯설었다. 높은 곳까지 물을 운반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일 것이기 때문이다.

돌계단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자주 서서 쉬었지만 주저앉지는 않았다. 산을 오를 때 앉아서 쉬게 되면 다시 못 오른다는 어른들의 말씀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렇게 한발 한발 앞으로 나가다 보니 어느새 정상에 다다랐다. 사진으로 보던 백록담과 실제 백록담은 모습이 달랐다. 물이 꽉 들어찬 사진과 달리 눈앞의 백록담은 약간의 물을 머금고 있을 뿐이었다. 그 모습이 기대와 달랐을지라도 서운하지 않았던 것은 내가 계획한 바를 몸으로 이뤄냈기 때문이었다.


산 내려오는 일은 산 오르는 일 못지않았다. 4시간 남짓의 산행으로 이미 다리가 후들거렸을 뿐더러 성판악 코스보다 관음사 코스가 시간을 많이 소요하는 길목이었기 때문이다. 걷다가 지치면 잠시 쉬어서 다리 운동도 하고 심호흡도 하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날이 어둑어둑해지는데 3km 이상 남아있음을 알리는 표지판을 보고 괜스레 겁이 나기도 했다. 그러나 내려오는 길 역시 한발 한발 내디뎠기에 끝자락에 도달할 수 있었다.

산을 오르면서 나는 남과 다른 나를 인정하게 됐다. 빠른 걸음도 강한 체력도 없는 나이지만 한걸음 한걸음 걷다 보면 내가 꿈꾸던 정상에 도착할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 토끼보다 빠른 거북이가 된 셈이었다. 또한 산 밑에서부터 산 위까지 함께 걷던 사람들은 나와 관계없는 사람들이지만 인사 한마디로 함께 웃을 수 있다는 사실을 배웠다. 내가 한걸음도 내딛기 힘들 때 곁에 있는 한 사람의 격려가 나를 일으킨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지표에서부터 정상에 이르기까지 크기도 모양도 다른 식물들을 보며 자연의 아름다움을 만끽했고, ‘쓰레기통이 없다’는 안내표지판에 따라 자신의 쓰레기봉투를 가방에 매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자연을 아끼는 마음을 느꼈다. 자신의 노력으로 산을 오르는 자에게만 정상을 보여주는 한라산에서 이번 여름 나는 또 하나의 지혜를 얻었다.
#한라산 #제주도 #성판악 #관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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