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 탈 돈 없으면 내리세요"

등록 2007.08.14 10:35수정 2007.08.14 1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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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13일) 오후, 65** 버스를 타고 아르바이트를 하러 가던 중이었다. 버스는 여느 때처럼 정류장에서 승객들을 태웠다. 창밖을 보느라 정신없는 사이, 갑자기 운전기사는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새우등처럼 굽은 할머니 두 분께서 무임승차를 한 것이다. 할머니 모두 어깨엔 커다란 가방을 짊어지고, 양손에는 PT병이 가득 담긴 봉지를 들고 있었다. 버스 의자 높이를 간신히 넘길만한 할머니 두 분께서 노약자석에 앉자 기사는 운전대를 놓았다.


"할머니, 내리세요. 차 안갑니다. 버스 탈 돈 없으면 내리세요."

할머니 두 분은 말씀이 없으셨다. 가만히 운전사의 얼굴만 쳐다보고 있으셨다.

"미리 말씀만 하셨어도 제가 태워 드렸을 텐데, 할머니 이건 남을 속이는 거예요."

운전기사는 출입문 쪽으로 나가면서 할머니들이 내리지 않으면 버스도 움직이지 않을 거라 했다. 퇴근 시간 바로 직전이어서 정류장엔 차들이 많이 밀렸다.

“안 내리시면 출발 안 해요.”


운전기사는 할머니들의 사정도 들어보지 않고, 계속 버티고 있었다. 운전기사는 버스 안 승객들을 볼모로 할머니들을 재촉했다.

"두 정거장만 가면 되는데, 돈이..."
"빨리 내리세요, 어서. 타실 때 미리 말씀만 하셨어도 제가 태워 드렸을 텐데 이건 아니잖아요."


운전기사가 매몰차게 내리라고 하자, 결국 할머니들은 말없이 출입문으로 가 내리셨다. 나는 할머니 두 분 바로 뒤에 앉아있다. 처음에 운전기사가 내리라고 했을 땐, 화를 내다가 말겠지 싶었다. 허나, 운전기사의 행동과 말을 들으니 빈말이 아닌 것 같았다. 저 분들을 위해 대신 차비를 내드릴까 말까. 어떻게 해야 하나 갈등 중이었다. 소리를 지르며, 할머니를 쫓아내려던 버스운전기사를 보니 선뜻 차비를 내드리겠다는 말을 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처럼 구경만 한 것이다. 운전기사의 매정함도 볼썽사나웠지만 용기 없던 내 모습에도 부끄러움 마음이 들었다.

저렇게까지 해야 하나, 운전기사 아저씨를 나쁘다고만은 할 수 없을 것이다. 할머니들이 내린 후 운전기사가 하던 혼잣말에 귀를 기울여 보니, 승객수와 금액이 철저히 계산되기 때문에 그분도 함부로 무임승차를 허용할 수 없는 처지였다. 버스회사에서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운전기사 일 것이다. 허나, 한 인간으로 봤을 땐 참 차가웠던 분이었다.

65세 이상의 노인은 지하철을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 버스의 경우엔 그렇지 못하다. 그동안 내가 내야할 요금만 확인한 탓에 버스 요금체계가 어떻게 되는지 몰랐었다. 할머니들이 버스에서 쫓겨난 걸 보고서야 버스 요금엔 경로 요금이 따로 없다는 걸 알았다. 버스를 타는 노인은 일반 성인과 요금을 똑같이 내야 한다.

우리나라 노인 한 달 평균 용돈은 13만원이란다. 젊은 사람들에겐 한 두 정거장이 가뿐할 수 있겠지만 노인들에겐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게다가 돈벌이가 없거나 벌더라도 낮은 임금을 받아야 하는 가난한 노인들에게 성인요금 1천원이면 작은 돈도 아닐 것이다. 노인들에게 버스를 무료화 하는 게 재정적 부담이 된다면, 최소한 청소년 요금처럼 요금을 조금 낮춰주는 방법도 있을 텐데 버스 요금표를 보니 그런 안내는 없었다.

우리나라는 2000년에 고령화 사회에 진입했다. 전체 인구 중 65세 노인이 차지하는 비율이 7.2%다. 2019년에는 전체 인구 중 노인이 14%를 차지하는 고령사회가 될 전망이란다. 고령사회로의 진입을 눈앞에 두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경제적 능력이 없는 노인들이 많아진다는 것이다. 한데, 버스와 같은 공공의 영역에서 노인을 배려하는 모습이라곤 노란색의 노약자 좌석만 있을 뿐이다.

요즘 같은 무더위에 두 정거장을 걸어간다는 것은 젊은 나에게도 힘든 일이다. 무거운 짐을 진 할머니들에겐 아마 지옥이 따로 없었을 게다. 버스 기사가 호통 치며 할머니를 내쫓던 모습, 침묵하던 내 모습으로 불쾌지수가 높았던 오후는 그렇게 가고 있었다.

#버스 #노인 #요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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