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무협소설 <천지> 252회

등록 2007.08.16 08:12수정 2007.08.16 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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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철한은 자신의 동생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표정에는 별다른 기색이 나타나지 않았다. 언제나 그랬듯 풍철한이 결정하면 따르겠다는 것이었고, 오히려 이런 일을 피하는 것은 중원사괴가 취할 태도가 아니라는 기색이었다.

“빌어먹을... 지금 우리가 이곳을 떠난다 해도 저 자식들은 여전히 자네와 한 패라고 믿겠지?”


어쩔 수 없이 이곳에 남아있어야 한다는 말이었지만, 그것은 친구의 입장을 생각해 돕겠다는 뜻을 우회적으로 표시한 배려였다. 선화의 냉랭한 얼굴에서도 미소가 떠올랐다. 미세하나마 풍철한을 바라보는 눈길에 야릇한 빛깔도 섞여있었다.

풍철한 역시 흘낏 선화의 표정을 읽었지만 짐짓 모른 척 하면서 말을 이었다.

“좋네.... 그렇다면 목적을 분명히 하는 게 좋겠군. 지금 자네는 저들과 어떤 결말을 내려 하는 것인가? 단지 위험을 피하고자 함이라면.....”

그 말에 함곡이 얼굴을 굳히며 풍철한의 말을 중간에서 잘랐다. 그의 얼굴에는 아주 단호하고 냉정한 기색이 떠올라 있었다.

“내 목적은... 아니 우리의 목적은 저들을 한 명도 살려서 돌려보내지 않는 것이네.”


“..............!”

“궁극적으로는 회의 붕괴와 그것을 반석으로 나라는 어찌되든 자기들만의 이익을 추구하는 동창과 간신배들을 숙청하고, 꺼져가는 대명(大明)의 국운(國運)을 되살리려는 것이라네.”


함곡은 비장한 모습까지 보였다. 함곡의 말은 현재 권력을 가진 자들에게는 역모와 다름없었다. 풍철한은 고개를 끄떡였다. 한곡이 그런 대의명분 없이 이렇게 큰 사건을 저지를 이유가 없을 것이다. 이미 비슷한 말은 아까 들었다.

“의기(義氣)는 높고..... 훌륭한 명분을 가지고 있지만 지금 현실은 매우 어렵네. 오히려 우리가 당할 판국이지.”

“계획에 차질이 있어 문제가 발생했지만 포기할 상황은 아니네. 어차피 계획대로 진행되었더라도 위험을 피할 수는 없었네.”

“지금 현재의 객관적인 전력에서 우리가 매우 불리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네. 물론 호풍환우(呼風喚雨)할 능력이 있는 자네이니까 다른 방도를 찾아낼 수 있겠지만 지금 현재 상황에서는 그렇다는 말이네.”

객관적인 전력으로 본다면 현저히 기우는 것은 사실이었다. 이곳에 있는 인물들을 보면 운무소축의 시비 세 명까지 합하여 모두 열여섯 명뿐이다. 더구나 함곡과 귀산노인은 막상 싸움이 시작되면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보호를 받아야 할 사람들이다.

“호풍환우라니.....? 자네는 나를 비웃고 있구먼.....”

함곡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비웃다니....? 천하의 함곡을 비웃을 사람이 어디 있겠나? 절대 아니네. 다만 지금 현실적으로 저들이 들이닥친다면 과연 어떻게 대처할지를 묻고 싶을 뿐이네.”

풍철한으로서는 절대 그런 의미로 말한 것은 아니었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함곡은 분명 호풍환우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믿고 있었고, 풍철한 역시 다르지 않을 뿐이었다. 지금까지 보여준 함곡의 방대한 지식과 능력은 그렇게 믿게 만들었다.

“알고 있네. 자네의 마음을 어찌 모르겠나? 하지만 능력의 부족함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는 나로서는 그것이 비웃는 소리로 들리니 문제네.”

함곡으로서도 고민이었다. 생사림 안에 설치된 진을 이용해서 상대를 하게 된다면 불리한 전력이지만 저들을 상대하기는 것이 그리 불가능한 일만은 아니었다. 물론 진식의 운용과 파훼에 대단한 능력을 가진 용추의 존재가 마음에 걸리기는 하지만 풍철한의 말대로 일방적으로 당하지는 않을 터였다. 문제는 다른 데 있었다.

“이런 대업(大業)을 이루려면 희생은 어느 정도 감수해야 하지만 나는 우리의 누구라도 희생하는 것을 원치 않고 있네. 두 처자의 죽음으로 우리는 충분하네.”

함곡은 이 운중보의 안에서의 일만으로 끝낼 생각이 아니었다. 그의 구국충정과 포부는 컸고, 이 운중보의 일은 시작일 뿐이었다.

“이 안에서 저들과 동패구상(同敗俱傷)하는 것으로는 우리의 목적을 이루었다고 할 수 없네. 그것이 지금 나를 아주 고민스럽게 만드는 것이라네.”

“동패구상하기만 해도 큰 소득이지. 내가 보기에 지금 객관적인 전력은 이쪽의 거의 두 배 정도이네. 상만천의 전력만 해도 우리와 엇비슷할 정도이지. 철기문의 전력을 포함해서 말이네. 추태감의 전력 또한 만만치 않네. 더구나 육파일방과 교두들도 저들과 함께 움직이고 있네.”

풍철한으로서는 꽤나 심각하게 말한 것이었다. 그의 말대로 양쪽 전력에는 큰 차이가 있었다.

“물론 자네의 말이 절대 틀리지 않네. 하지만 소수의 인원으로 대군을 격파한 일은 얼마든지 있네. 상대가 강하다고 생각하면 물러나고 도망을 쳐야지. 그리고 상대의 약점을 파고 들어야 하네. 그게 전략의 기본이지.”

“말이 쉽군.”

풍철한이 툴툴거렸다. 그것을 몰라서가 아니었지만 실제의 상황에 적용시키기란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물론 한편으로는 함곡의 능력으로 보아 아주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쉽게 상대는 뭉쳐서 우리를 공격하지는 않을 것이네. 전력이 분산될 것이란 말이지. 그 한 곳을 기습해 상대의 전력을 차츰 약화시키기 시작하면 되는 것이네. 자네 말대로 아주 쉬운 일이지.”

함곡은 확신을 가지고 말하고 있었다. 이미 그의 머릿속에는 향후 어떻게 전개될지 이미 그림이 그려져 있을지 모른다.

“그 비근한 예가 바로 동정오우와 구룡의 승부였네. 동정오우는 자신의 전력의 거의 서너 배가 넘는 구룡과의 싸움에서 언제나 패했지. 그러나 그들의 전력은 약화되지 않았네... 심각한 타격을 받지 않고 도망쳤기 때문이지. 그리고 구룡의 분산된 전력을 차츰차츰 약화시키기 시작했네. 그리고 그들은 마지막 승부에서 승리한 것이지.”

함곡이 왜 불쑥 이런 예를 들은 것일까? 그 말을 듣는 좌중의 표정들은 각기 달랐다. 특히 능효봉과 귀산노인의 얼굴은 조금씩 일그러지고 있었다. 풍철한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저었다. 친구의 능력을 믿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상대는 그리 호락호락한 자들이 아니다.

용추의 존재도 그랬고, 권력을 한 손에 쥐고 있는 추태감과 중원의 상계를 거머쥐고 있는 상만천의 존재는 풍철한의 가슴을 무겁게 누르고 있었다. 이런 사건이 나지 않았다면 풍철한으로서는 평생 얼굴 한 번 보지 못할 위치에 있는 인물들이었다.

“나는 모르겠네....”

“그렇다고 아주 비관적이지는 않아요. 굳이 우리의 전력이 저들에게 못 미친다고 할 수도 없죠.”

함곡이 뭐라 말을 하기 전에 우슬이 입을 열었다. 그녀는 어둠 속에서도 여전히 아름다움이 빛을 발하고 있었는데 그녀의 치아가 유독 어둠 속에서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아직 이곳에 들어오지 않는 분들이 꽤 있어요. 더구나 중립적인 위치에 있는 삼합회의 경우에는 어떻게 설득하느냐에 따라 우리 쪽으로 끌어들일 수 있을 거예요. 계륵 같지만 화산 역시 마찬가지고요.”

“화산은 아니오. 좌총관께서 아직 이곳에 오시지 않는 것으로 보아 화산이 우리에게 보여준 것과는 다르게 딴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 같소. 자하진인의 성품으로 보아 설득이 아니라 주도권을 어느 곳에서 쥐느냐에 따라 선택할 인물이오.”

함곡이 얼굴을 심각하게 굳혔다. 화산은 아주 불확실하고 꺼림칙한 존재였다. 어쩌면 나중에 결정적으로 일을 틀어버릴 수 있는 존재였다.

“더구나 오후부터 아미의 회운사태의 모습이 보이지 않고 있소. 점심을 화산과 같이 했는데 그 이후로 실종된 듯 보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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