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가다 언제라도 꽃의 아름다움을 감상하고 향기를 맡을 수 있는 여유로움, 이것이 자전거 여행이 가져다 주는 하나의 매력이다.
문종성
길은 로키산맥으로 돌진하라 하고길이 없다고 화를 낸다면 나만 손해. 긍정적인 생각을 하면서 거의 처음 자리까지 다시 32km를 돌아왔습니다. 그러니까 총 64km를 헛걸음 한 셈입니다. 이미 시간은 오후 3시. 결국 이것이 하늘의 뜻이라고 생각하고 사막이 아닌 로키산맥을 넘어가기로 합니다. 이거 혹시 늑대 피하려다 호랑이 만난 건 아닌지.
아직 초입이어서 그런지 경사는 걱정했던 것보다는 완만한 편이네요. 로키산맥으로 들어간 첫째 날 저녁 7시쯤 펜로즈(Penrose) 지역에서 카터(74)를 만났습니다. 침례교인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그는 로키산맥의 혼령에 정신이라도 잃은 것처럼 멍한 표정의 나를 따뜻이 맞아주었습니다.
보청기를 귀에 꽂았는데도 잘 들리지 않았지만 얘기는 그런대로 통했지요. 제가 오자마자 자신의 일을 그만둔 카터와 집에 들어왔고 부인은 낯선 이방인을 위해 저녁 식탁부터 차렸습니다.
"아니, 사람은 셋인데 왜 햄버거가 넷이야?"지글지글 고기가 익는 냄새가 진동하는 주방에서 의아해진 카터가 넌지시 묻자 부인이 상냥하게 대꾸합니다.
"호호, 당신도 참. 생각해 봐요. 갈렙이 얼마나 배고파할지."그들의 따뜻한 정이 식사도 하기 전에 마음을 부요하게 해 줍니다. 햄버거로 저녁을 때우고 거실 소파에 앉아 차분히 얘기하는데 그는 1953년 7월에 한국에 온 적이 있다고 합니다. 김포, 수원, 부산 등에서 비행기 정비공으로 일했다는 그는 자신의 얘기를 느릿느릿 조용하게 독백조로 내뱉었습니다.
"TV를 보면서 종종 한국 소식을 접할 때마다 깜짝 놀라곤 해. 한국은 예전과 참 많이 달라졌어. 내가 그 때는 공항에서 일만해서 한국에 대해 많이 알지 못하고 할 얘기도 별로 없어. 그런데 그건 기억나더라고. 가끔 밖에 나가면 말야, 여기저기 굶주림에 허덕이던 아이들이 길거리에 있다가 우리가 주는 음식을 받으면 '땡큐!'하고 소리쳤지. 아마 걔네들이 하는 영어 중에 제일 많이 그리고 자신 있게 발음하는 단어였을 거야." 그는 50년도 더 된 지난 추억을 회상하며 웃어 보였습니다. 비록 말하는 것과 듣는 것이 많이 힘겨워 보였지만 카터는 74세라는 나이가 무색하게 아직도 은퇴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여전히 밀링선반 등의 작업을 하면서 하루를 나고 있다고 합니다.
"은퇴는 무슨 은퇴? 난 아직까지 일 하는 게 좋아. TV를 봐. 사람들이 얼마나 힘들게 사는지를. 그들을 보면서 항상 생각하거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들을 보면 정말 일하고 싶어진다고. 그래서 난 바쁜 게 좋아. 일이 없는 문제로 고통 받지 않은 건 축복이지." "일이 없는 문제로 고통 받지 않은 건 축복"담담하게 내뱉는 카터의 얘기에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몸이 쇠하는 그 날까지 일하고 싶다는 그를 보니 요즘 보기 드문 근면한 인간상을 보는 것 같아 뿌듯하고 또 게으른 제 자신을 채찍질하게 됩니다. 아, 카터의 성실함을 닮을 수만 있다면….
로키산맥에서의 첫날 밤에 인생 선배로부터 머릿 속에만 담아두고 실천하지 않는 익숙한 두 단어인 근면과 성실에 대해 배웁니다. 밖에는 비가 오고 더없이 카터의 집이 푸근하게 느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