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못안'일까, '신지내'일까

[우리 말에 마음쓰기 87] 땅이름을 잃거나 버린 우리

등록 2007.09.13 14:34수정 2007.09.13 1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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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용직 할아버지는 신지내가 아니라 새못안이라고 계속 우기셨다. 그러자 할머니는 신지내라고 편지를 써서 보낸 것이 들어갔었다고 물러서지 않았다. 사실 신지내는 새못안이라는 우리의 본래 지명을 일제가 한자말로 바꾼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일제가 법령을 발표하여 당시 식민지였던 조선의 모든 사람들에게 창씨개명을 요구했듯이 우리 고유의 지명을 멋대로 한자말로 바꿔 버렸던 것이다. 그래서 한밭이 대전(大田)이 되고 새못안은 신지내(新地內)로 바뀌었던 것이다 ..  <안이정선-가고 싶은 고향을 내 발로 걸어 못 가고>(아름다운사람들,2006) 26쪽

 

제가 어릴 적에 살던 동네 가운데 '신흥동'이 있습니다. 전국 어디를 가도 이 이름 '신흥동'이 흔한데, 이 동네 옛이름은 '꽃골'이라 하더군요. 꽃이 많아 이런 이름이 붙었을 텐데, 우리 나라 옛 동네이름, 또는 시골마을 이름을 살피면 '꽃골'도 참 많습니다. 전국 어디에든 들꽃이나 메꽃이 많았으니까요.

 

a 율목동에서 율목동 가게들은 '율목'이라는 이름을 붙일 뿐, '밤골'이나 '밤나무골' 이름을 붙인 가게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율목동에서 율목동 가게들은 '율목'이라는 이름을 붙일 뿐, '밤골'이나 '밤나무골' 이름을 붙인 가게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 최종규

▲ 율목동에서 율목동 가게들은 '율목'이라는 이름을 붙일 뿐, '밤골'이나 '밤나무골' 이름을 붙인 가게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 최종규

어릴 적 살던 동네에서 가까운 거리에 헤엄치며 노는 곳이 하나 있었어요. 그곳은 '율목수영장'으로, 지금도 있습니다. 이 헤엄터는 율목동에 있어요. 어린 그날부터 얼마 앞서까지 아무 생각 없이 그저 '율목'이라는 이름을 썼는데, 이 '율목'이란 다름아닌 '밤나무'를 한자로 옮긴 말일 뿐이더군요. 처음 알았고 크게 놀랐습니다. 몇 해 앞서부터 골목이름을 새로 짓는다며 작은 간판을 새로 붙였잖습니까. 비로소 깨닫습니다. 참말 그러네 하고.

 

 ┌ 율목동
 └ 밤나무골

 

그러고 보면, 나이든 분들은 '일제 식민지 때 제국주의자들이 억지로 쓰라고 했던 일본 한자말 땅이름'을 받아들이지 않고 '예부터 우리들 백성이 지어서 가리키던 고유한 땅이름'을 꿋꿋하게 써 왔습니다. 이분들은 돌아가시는 날까지도 이 땅이름만을 쓰곤 해요. 그러나 우리들, 일제 강점기를 겪지 않았던 우리들은 지금 쓰는 '일본 한자말 땅이름'이 왜 이렇게 붙었는가 생각하지 않고 그냥 듣고 그냥 말합니다.

 

독재자 박정희가 밀어붙인 '새마을'이 아니라, 말 그대로 새로 생기거나 만든 마을이기에 '새마을'이라 했던 우리들입니다. 이런 마을은 일제 강점기를 거치며 죄다 '신촌'으로 바뀌었어요. '웃마을-아랫마을'이라 했고, '강웃마을-강아랫마을'이라 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땅이름도 '상동-하동'과 '강북-강남'으로 바뀌고 말아요.

 

 ┌ 새못안
 └ 신지내

 

하긴, 사람들이 예부터 살아온 오래된 동네는 모두 허물고 아파트를 올려세운다는 오늘날이기 때문에, 예부터 살아온 오래된 동네를 가리키는 이름에 눈길을 두는 사람이 사라지는 건 자연스럽구나 싶어요. 아파트를 새로 지으며 솔빛마을이니 별빛마을이니 무슨 마을이니 하고 붙이는데, 이런 이름들은 이 아파트가 '재개발'을 한다며 허물게 될 때 남김없이 사라지고 '새로운 무슨 마을'이라거나 '새로운 무슨 타운'이나 '새로운 무슨 캐슬'로 바꾸겠지요. 우리들은 이렇게 붙이는 이름에 아무 생각 없이 그대로 좇아가고.

2007.09.13 14:34ⓒ 2007 OhmyNews
#우리말 #우리 말 #땅이름 #새못안 #우리 말에 마음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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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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