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에서는 모든 참석자들에게 어른 키만 한 큰 수건을 한 장씩 선물로 줬다. 우리에게는 어머니를 생각하여 두 장을 주었고 음식도 골고루 싸주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트럭 좌석 뒤쪽과 어머니 무릎위에는 선물과 음식묶음이 쌓였다. 더구나 어머니 호주머니에는 도반들이 주신 봉투가 제법 들어 있었다. 어머니와 내가 그토록 마음 졸이며 시도한 처음 나들이가 기대 이상이 된 것이다.
마치 대기하고 있던 것처럼 모든 사람들이 우리의 첫 나들이를 맞아 극적인 감동을 만들어 주신 것이다.
신기한 것은 대여섯 시간동안 어머니가 오줌을 한 번도 안 누신 것이다. 집에 와서 기저귀를 빼내니 오줌이 한 방울도 비치지 않았다. 어머니는 깜짝 놀라며 “이게 다 부처님 덕인갑따”며 이제부터 옷에 오줌 누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돌아오는 길에 봉투랑 선물들을 가리키며 내가 “우리 어머니 부자가 되셨다”고 부러워하자 어머니는 이렇게 말하셨다.
“내가 날라 댕긴다 칸들 누가 나 보고 이런 걸 주건노. 다 니 얼굴보고 중기지.”
공덕을 나에게 돌리고 사리를 분별하시는 어머니 모습은 아침과 비교하면 거짓말 같았다. 절에서 만난 낯선 사람들이 한결같이 어머니에게 자리를 마련해 주고 음식 뿐 아니라 마실 물까지 챙겨다 주며 곁에 와서 부러 말을 걸면서 정성을 다해 받들어 모시는 것에 어머니의 긴장과 망설임이 다 허물어진 듯하다. ‘정성스런 모심’이 백 가지 약보다 나았다.
어머니가 나들이에 익숙해지신 지, 석 달이나 지나 열린 8월의 어느 생명평화운동 모임에 어머니를 모시고 갔다가 참석자 50여명이 바퀴의자에 앉아 어색해 하는 어머니는 제쳐놓고 어머니 안부마저도 나한테만 묻고 그냥 지나가 버리자 어머니가 온갖 역정을 다 내며 돌아가자고 떼를 써서 2박 3일 동안 그 행사에 참석하려고 변기와 기저귀는 물론 근처에 있는 온천 딸린 숙소까지 예약하고 갔다가 1시간여 만에 먼 길을 되돌아오고 말았던 사례와 크게 비교된다 하겠다.
절에서 돌아오는 길에 어머니가 주머니에서 제일 두꺼운 봉투를 하나 꺼내서 길손에게 줘 버린 것을 보면 이날의 나들이는 골고루 성공이었다.
장계를 지나 육십령 쪽으로 방향을 틀어 오는데 마침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웬 젊은이 둘이 배낭을 메고 걷고 있었다. 한 눈에 보기에도 먼 길을 가는 여행자로 보였다. 차를 세우고 트럭 뒤에 타게 해서 우리집 꺾어지는 곳까지 데려다 줬는데 그들은 군 입대를 앞두고 전국을 걸어서 여행 중인 대학생이었다.
이때였다. 어머니가 나한테 차비라도 좀 주자는 것이었다. 그러자고 했더니 봉투들을 꺼내더니 제일 두꺼운 것을 내게 주는 것이었다. 10만원이 들어 있었다. 직접 주라고 했더니 이미 저만치 가는 젊은이를 어머니가 부르더니 “가다가 주전부리나 하라”며 건네주었다.
주전부리 하라고 10만원을 꺼내 주는 통 큰 할마씨라고 집에 와서 내가 놀렸더니 거저 받은 거를 혼자 다 쓰면 벌 받는다고 하셨다. 가져 온 음식은 아랫집 할머니랑 나누고 수건도 한 개는 우리 집에 자주 와서 어머니를 도와 주시는 분께 드렸다.
어머니처럼 양의학적으로 ‘알츠하이머’ 증세가 있는 사람은 일반적으로 지나치게 자기 몫을 챙기며 구두쇠 짓을 하는데 어머니는 그날만큼은 영 딴판이었다. 나도 모르게 속으로 중얼거렸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부처님 오신 날’ 만큼만 되어라”고. (23회에 계속)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한국농어민신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2007.09.21 11:52 | ⓒ 2007 OhmyNew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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