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산사 종소리에 잠 못 드는 나그네 얼마런가?

[상해·항주·소주·남경 8박9일 여행기 10] 소주의 풍교와 한산사

등록 2007.09.22 08:47수정 2007.09.22 1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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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8일. 어젯밤 늦게 소주에 도착한 우리는 허름한 빈관(賓館)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우리가 하룻밤을 보내는 빈관을 선택할 때 엄수해야 할 두 가지가 있다. 날이 굉장히 무덥기 때문에 에어컨은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것과 방값이 인민폐로 백 원을 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백 원짜리 방이 오죽할까 싶지만 하룻밤을 자는데 몇백 원을 투자하는 낭비는 여행자에게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방에서 자게 될 경우 아침에 일찍 눈이 떠진다. 왜일까? 빨리 그곳을 벗어나고 싶어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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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교 근처의 풍광. 풍교 아래로 검고 흐린 물줄기가 흘러가고 있다. ⓒ 조영님


오늘 답사할 곳은 풍교와 한산사이다. 아침인데도 푹푹 찌는 더위에 조금 걸었는데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었다. 버스를 타고 가기에는 시간이 오래 걸리고, 더위에 금세 지칠 것 같아 택시로 이동하는 사치를 누렸다. 사치라고 해야 흥정하면 중국 돈으로 30원 안팎이다. 중국에 처음 와서 십 원, 백 원 하는 돈이 푼돈 같아 우스웠지만 여기서 생활하다 보면 결코 푼돈이 아님을 알게 된다. 역시 택시가 좋긴 좋으니 사치라고 할 만하다.

풍교는 소주 서쪽 교외의 한산사 부근에 있는 다리 이름이다. 중국 당나라 시인인 장계(張繼·?~779년경)가 지은 '풍교야박(楓橋夜泊)'이라는 한시의 배경이 되어 더욱 유명해진 곳이기도 하다. 장계는 과거 시험을 두 번이나 낙방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 풍교에서 하룻밤을 보내면서 한산사에서 나는 저녁 종소리를 듣게 되는데, 그때의 감회를 적은 시가 바로 풍교야박이다.

달 지고 까마귀 울어예고 찬 서리 하늘에 가득한데
강가 단풍과 고깃배 불빛에 시름겨이 조노라니
고소성 밖 한산사에서
한밤의 종소리 나그네 배에 들려 오누나
(月落烏啼霜滿天 江楓漁火對愁眠 姑蘇城外寒山寺 夜半鐘聲到客船)


시에 나오는, 달이 지고(月落), 까마귀 울고(烏啼), 서리가 하늘에 가득하고(霜滿天), 강가의 단풍(江楓)과 시름겨운 잠(愁眠)이라는 어휘는 모두가 처량하기 그지없다. 이것은 과거에 낙방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시인의 처량맞은 심사를 대변하고 있다. 거기에다가 한산사에서 들려오는 종소리는 시인의 가슴을 얼마나 더 구슬프게 하였겠는가?

청운의 꿈이 한순간에 무너져 하릴없는 백수가 된 자의 서글픈 마음, 앞을 내다볼 수 없는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 등은 한산사 종소리를 통해 더욱더 처량하게 전달되는 듯하다.


중국의 한산사는 우리나라에까지 유명해져서 조선시대의 시인들은 저녁 종소리나 경치 좋은 사찰을 보면 장계의 시구를 연상하는 시를 짓곤 하였다. 조선시대 최수(崔脩)라는 시인은 신륵사의 종소리를 듣고서 "만약 중국의 장계가 일찍이 이곳을 왔더라면 한산이 이름을 날리지 못하였으리"라고 하였다.

그 외에도 쓸쓸한 나그네에게 들려오는 사찰의 종소리는 흔히 한산사의 종소리로 인식되었다. 그러니 중국은 물론이려니와 조선에 있는 얼마나 많은 시인들이 '한산사 종소리'에 잠 못 들어 하였을까?

풍교는 위로는 사람들이 걸어갈 수 있고 아래는 둥근 아치형으로 되어 있어 배가 지나갈 수 있게끔 만든 다리이다. 다리 근처에는 옛적 장계가 앉아서 시를 지었을 법한 나룻배가 매여있어서 장계가 지은 '풍교야박'을 떠올리게 한다.

역사적으로 유명하여 인구에 회자되는 곳을 직접 가 보게 되면 '별로 대단하지도 않은데 이곳이 그렇게 유명한 곳인가' 싶은 곳이 참 많다. 이곳도 역시 그러하다. 그래도 이처럼 회자되는 장소에 서서 눈으로 직접 확인하니 '풍교야박'의 시를 보다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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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장계가 이곳 풍교에서 작은 배를 띄우고 시름에 잠겨 시를 읊조렸을까? ⓒ 조영님


이곳에는 편안하게 앉아서 두 눈을 살짝 감은 채 먼 곳을 응시하는 장계 시인의 동상이 있다. 항주에서 본 소동파의 동상에서도 45도 방향을 향해 응시하는 시인의 모습이 그려지더니 여기 장계의 모습도 비슷하다. 정면을 직시하기보다는 이상과 동경을 가득 담은 눈으로 먼 곳을 응시하는 모습이 바로 시인의 초상인 것 같다.

장계의 동상 뒤로는 풍교가 보이고 유유히 흘러가는 운하와 나룻배가 보인다. 그리고 명초(明初)의 유명한 서법가인 심도(沈度)가 쓴 풍교야박 전문이 벽면에 새겨져 있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관광객들이 너도나도 시가 쓰인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풍교를 둘러보고 천천히 한산사로 걸어갔다. 한산사는 남북조 연간에 처음 창건되었는데 그 당시에는 '묘리보명탑원(妙利普明塔院)'이라 하였다. 그 후 당나라 때에 한산(寒山)과 습득(拾得)이라는 두 고승이 이곳에 거주하면서 '한산사'라는 이름으로 개명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사찰 안의 '한습전(寒拾殿)'에는 벌거벗은 발에 배가 드러나고 호리병을 차고 웃고 있는 한산과 습득의 조각상이 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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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안한 자세로 앉아 먼 곳을 응시하는 장계 시인. ⓒ 조영님



전설에 두 고승은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의 화신이라고 한다. 한산은 시승(詩僧)으로도 이름이 높아서 <한산시집(寒山詩集)>이라는 시집이 전한다. 한산과 습득은 한습(寒拾)으로 약칭되기도 하며, 동양화의 선화(禪畵)에서 한 사람은 꽃을 들고, 한 사람은 빗자루를 들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지기도 한다. 한산과 습득에 관한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유명하다.

한산이 습득에게 "세상에 나를 비방하고, 나를 속이고, 나를 욕하고, 나를 비웃고, 나를 경멸하고 나를 천하게 여기는 자가 있다면 어떻게 하겠나?" 하였다. 그러자 습득이 말하기를 "그를 참아내고, 그에게 양보하고, 그를 피하고, 그를 내버려두고, 그를 공경하면 되네. 그리고 몇 년이 지나서 다시 만나면 되네"라고 하였다고 한다.

인생의 철천지원수가 아닌 다음에야 어느 정도의 세월이 흐르면 미워하는 감정도, 싫어하는 감정도 차츰 없어지고 약화되기 마련이다. 다만 당면한 한 때를 참지 못하는 것이 어려울 뿐인 것이다.

한때 나를 비방하는 자 있거든 참아내고, 나를 속이는 자 있거든 모르는 척 속는 척하며 양보하고, 나를 욕하는 자 있거든 피해서 마주치지 않으면 되고, 나를 비웃는 자 있거든 비웃게 내버려 두면 될 일이다. 그렇지만 범인이 어찌 그처럼 행동할 수 있겠는가? 한산과 습득 같은 고승이니 가능하지 않겠는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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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산사 경내에 ‘풍교야박’ 시비가 있다. ⓒ 조영님



한산사가 장계 시인의 '풍교야박'이라는 시로 유명하였음을 입증이라도 하듯 경내에는 '풍교야박' 시비(詩碑)가 있다. 규모가 큰 사찰이지만 아담하거나 단아한 맛은 그다지 없다. 여기저기서 분향하는 연기가 자욱하고 나무마다 붉은 치마를 두른 듯 소원을 담은 붉은 천이 매달려 있다.

한산사에 왔으니 가장 중요한 것은 종소리를 듣고 종이 어떻게 생겼는지 확인하는 일이다. 한산사의 종은 그 역사가 오래되었다. 당송 시대에는 밤중에 타종하던 관습이 있었으며, 해마다 한산사의 종소리를 들으러 수많은 사람들이 이곳으로 모여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 한산사에 있는 종은 청나라 때에 다시 주조한 것이다. 종에는 '한산사'라는 붉은 글씨와 팔괘 그림이 그려져 있다. 종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복이 온다고 하니 종소리의 영험이 대단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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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그네의 시름을 더하게 하였던 한산사의 종 ⓒ 조영님



종루에 올라가 타종을 하려면 입장료와 별도로 3번 치는데 5원을 지불해야 한다. 타종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으니 이미 한산사의 종소리는 '관광상품'이 된 것이다. 조선시대의 선비들이 중국의 소주에 올 기회만 주어졌다면 누군들 이 종을 울리지 않고는 못 배겼을 것을 생각하니, 역사의 현장에 서게 된 것을 감사하며 종을 울렸다. 내가 울린 종소리와 아들이 울린 종소리가 하늘과 땅과 온 우주에 가득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

한산사의 종소리는 한시뿐만 아니라 우리의 판소리에도 자주 등장한다. 이를테면 '춘향가'에서는 "선원사(禪院寺) 쇠 북소리 풍편에 탕탕 울려 객선에 떨어져 한산사(寒山寺)도 지척인 듯"으로, '심청가'에서는 "고소성(姑蘇城)의 배를 매니, 한산사(寒山寺) 쇠북소리는 객선(客船)이 댕댕 들리는구나"라고 표현되어 있다.

대체로 한시나 판소리에서 한산사의 종소리는 쓸쓸한 나그네의 심사를 배가시키는 역할을 한다. 그러니 한밤중에 종소리를 들었다면 서늘해진 가슴을 안고 잠을 뒤척일지도 모를 일이다. 종루에서 은은히 울려 퍼지는 한산사의 종소리를 들으며 경내를 둘러보고 우리는 다음 코스로 이동했다.
#소주 #한산사 #풍교 #장계 #풍교야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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