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기 서면 제주의 반이 한눈에 보인다

[생물권보전지역을 따라서]어승생악에서 효돈천, 쇠소깍까지

등록 2007.09.26 12:44수정 2007.09.26 1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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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유난히 많이 내렸던 지난 여름, 난데없는 물난리로 제주엔 여기저기 생채기들이 많이 생기고 말았지만, 가을의 문턱을 밟고 넘어섰다고 여겨지는 이 시점에서는 '지난여름'이라고 표현할 수 있음에 왠지 모를 안도감이 밀려온다. 상처는 아프지만, 세월의 덮개가 씌워지면 아물게 마련. 살아있는 모든 것들은 또 그렇게 잊은 듯, 묻혀둔 듯 살아가고 있게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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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승생악 정상에서 바라보는 한라산과 Y계곡 ⓒ 고평열


'생물권보전지역'이라는 낯익지 않은 주제를 가지고 초가을을 여는 9월의 기행을 시도해 본다.


생물권보전지역은 생물의 다양성 보전과 이의 지속가능한 이용을 조화시키는 방안을 모색하기 위해, 전 세계적으로 뛰어난 생태계를 가진 지역을 대상으로 유네스코가 지정하는 육상, 연안, 해양 생태계를 말한다.

우리나라에서는 강원도 설악산에 이어 두 번째로 제주도가 2002년 12월에 생물권보전지역으로 지정되었다. 그 중심에는 물론 제주인들의 가슴속에 영원한 성역으로 남을 한라산이 자리하고, 그 외 해발 200m 이상의 중산간 지역과 효돈천변, 섶섬, 문섬, 범섬 등 서귀포 해양공원을 포함하고 있다. 제주의 44%가 생물권보전지역인 셈이다. 유네스코가 인정했다는 건 제주 생태계의 가치를 전 세계가 인정한다는 사실일 테니, 제주인의 한 사람으로서 참으로 가슴 뿌듯해지는 일이다.

생물권보전지역의 중심인 한라산은 해발고도에 따른 다양한 생물상과 희귀야생동식물들의 서식처다. 또한 한민족의 영산으로 제주 한 가운데 우뚝 서 있다. 효돈천과 서귀포 해양공원 등 하루에 기행을 하기엔 한라산 오르기가 만만한 코스가 아니다. 대신 한라산을 한 눈에 바라볼 수 있는 어승생악에 올라 한라산을 바라보며 산의 영기에 취해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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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승생악 분화구에 물이 고인 모습 ⓒ 고평열


어승생악에 오르면 제주의 반이 한눈에 보인다. 분화구 내부에 물이 고이는 몇 안 되는 오름 중에 하나이고, 그 웅장한 산세가 오름의 맹주다운 자태를 자랑한다고 오름나그네는 극찬했다.

공항에서, 혹은 제주시 버스터미널에서 30분이면 어리목 등반로 입구까지 도착할 수 있으며, 오름을 오르는 길은 울창한 낙엽활엽수림 가운데로 난 길을 걸어 25분 정도면 어승생악 정상에 다다를 수 있다.


'어승생'이라는 이름의 유래는 임금님이 탈 말이 생산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하는데, 옛날 제주도민들은 '어시싱'이라고도 했다. 몽고어로 '어스사이'가 '물이 좋다'라는 뜻이라고 하는데, 제주어의 뿌리를 몽고어에 두는 이들의 말도 아주 일리가 없지는 않다고 보여진다.

어승생악은 제주 오름 중에서도 가장 물이 좋은 오름으로 산 전체 여섯 군데에서 샘이 솟아나고, 이 샘물들과 선녀폭포의 물이 합쳐져 어승생 수원지로 모아져 제주시민들에게 식수를 공급한다.


물이 좋고 경관이 빼어나며, 제주 산북 해안가며 마을 일대를 한 눈에 볼 수 있다는 잇점 때문에 일제 강점기에는 군사적 요충지가 되어 그 당시의 군 시설물들이 아직 남아있다. 해방이 임박한 일제말기, 제주도를 일본 최후의 방어진지로 여긴 일본군들은 결7호작전을 수립하고 제주 전역을 요새화하게 된다. 곳곳의 해안가며, 오름마다 동굴을 뚫고 군사기지화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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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승생악 정상의 일본군 진지동굴 입구와 토치카 ⓒ 고평열


어승생 정상에 아픈 상흔으로 자리하고 있는 토치카는 다이너마이트로도 부서지지 않을 만큼 단단하게 만들어져 있다. 어승생 남사면으로만 팠다는 굴들은 정상에 있는 토치카로 연결이 되어 있고, 토치카를 만들기 위해 오르내렸던 마찻길의 흔적이 아직도 어승생악에 남아있다.

굴과 굴의 입구를 연결시켜주는 도로를 통일로라고 하여, 아직도 유실되지 않은 채 확인이 되는데, 오름 아래에서 사람들의 움직임이 관찰되지 않도록 은폐물을 쌓아놓아서 가까이 가서야 길을 확인할 수 있다. 대부분 재사용하지 못하도록 폭파해 버린 굴 입구에는 백작약의 씨방이 과거의 아픔을 말하듯 강렬한 이미지를 발산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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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작약 씨방 강렬한 색채가 왠지 가슴 시리다. ⓒ 고평열


어승생악에서 내려와 1100도로를 따라 서귀포방향으로 향하다가 1115번 산록도로를 만나면 좌회전하여 동쪽으로 향하면 난대림의 극상을 보여주는 효돈천을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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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5번 도로에서 본 효돈천 ⓒ 고평열


효돈천은 한라산 남사면을 대표하는 산남 최대의 하천이다. 효돈천 주류는 서북벽과 서벽, 남벽 등 한라산 정상의 거의 절반을 발원지로 하고 있다. 이 줄기는 방애오름 사이로 나 있는 웅장한 규모의 서산벌른내와 산벌른내를 거쳐 미악산 상류에서 합류하여 돈내코로 이어진다. 산벌른내는 한라산을 갈라놓은 하천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미악산이 분출하기 전의 고하천은 서귀포 시내를 관통했을 것으로 추측하는 학자들이 있다. 미악산이 고하천의 중심부에서 분출하여 물줄기를 돌려놓았기 때문에 오른쪽으로 급회전한 효돈천은 돈내코와 상효, 하표를 거쳐 하례리로 흘러내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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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트홀 ⓒ 고평열


1131번(5.16)도로와 1135번(평화로)도로를 잇는 1115번 산록도로상에서 효돈천 계곡의 깊이와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하천 다리위에서 바라본 계곡 바닥엔 마치 해골처럼 보이는 포트홀들이 바위마다 형성되어 있었다. 포트홀은 흘러내리던 작은 돌맹이가 바위의 오목한 부분에 걸려 물줄기의 힘을 따라 맴돌면서 바위를 점점 더 마모시켜 웅덩이처럼 깎아낸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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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돈천 웅덩이에 고인 물에 이는 물결 ⓒ 고평열


이 도로변에서 확인되는 효돈천은 틀림없는 건천으로 최근에 내린 비로 고여 있는 웅덩이만 확인될 뿐, 흐르는 물줄기는 관찰이 되지 않는다. 한라산에서부터 땅 속으로 스며 흐르던 물이 어느 순간 지표면으로 올라오면서 폭포수가 되어 흐르는 게 효돈천과 돈내코의 특별함이라고 볼 수 있다. 돈내코 계곡의 물은 지하에서 용출되므로 여름에는 얼음처럼 차고, 겨울에는 따뜻한 용천수의 특징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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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내코의 원앙폭포 가는 길 ⓒ 고평열


돈내코 계곡의 양안은 상록활엽수림으로 덮여있어 한여름의 한낮에도 습하고 어둡다. 우리나라 멸종위기종의 이름을 단 여러 식물들이 서식하고 있는 생태계의 보고이며, 한 겨울에도 짙은 녹음에 눈이 부신 생명의 땅이다. 멀리서부터 계곡을 흐르는 물소리가 들린다.

이 물이 나를 키우고, 숲을 키우고, 숲에 깃들어 사는 여러 생명체들을 길러 생물권보전지역이 태어나게 한 원천일 것이다. 원앙폭포로 들어가는 길을 걷다가 여기저기 얼굴을 내민 작은 친구들에게 자꾸 시선이 멈춘다. 흠씬 비가 내린 계곡의 주변엔 색깔도 가지가지인 예쁜 버섯들이 많이 돋아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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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졸각버섯 ⓒ 고평열


생물권보전지역의 주요 대상은 대체로 식물과, 곤충을 포함한 동물에 포커스가 맞춰지기 십상이다. 하지만 버섯이라는 이름으로 대표되는 균이 있어서 식물이 있을 수 있고, 그 식물이 있음으로 해서 동물이며 곤충이 살아갈 터전이 생기는 것임을, 그러하므로 인간이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간과해서는 안 된다.

쓰러진 나무나 낙엽을 분해하고, 동물이나 곤충의 사체를 분해하여 다시 토양 내 무기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은 '버섯'이라는 형체로 형상화되는 균류의 세계가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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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내코의 원앙폭포에서 ⓒ 고평열


백중날에 물을 맞으면 모든 신경통이 사라진다는 이야기가 있다. 농사철의 힘든 노동일, 혹은 고단한 생활에서 오는 신경통 등 만성질환이 생기면 우리의 어르신들은 백중을 즈음하여 돈내코로 모여들어 물맞이를 했다. 떨어지는 물줄기에 아픈 몸을 맡기고, 고단한 생활사 또한 훌훌 털어 물줄기에 실어 보내고는, 새로운 한해를 다시 열심히 살아낼 활력소들을 그 빈자리에 채워가지 않았을까.

많은 비가 내린 후여서 폭포의 수량이 부쩍 늘어 있었다. 제주도의 하천은 대부분이 물이 흐르지 않는 건천이다. 제주의 동, 서쪽으로는 곶자왈 지대가 발달해서인지 물이 흐르는 하천이 없는데, 한라산 남북으로 더러 물이 흐르는 하천이 나타난다. 돈내코가 있는 효돈천은 한라산에서 모아진 물이 땅 밑으로 스며들어 숨은 강으로 흐르다가 땅 속의 암반과 마주치면 땅 속의 흐름을 계속할 수가 없어 지표로 솟구치고, 1km쯤 흐르다가 다시 땅 속으로 스며들어 물줄기는 숨어버린다.

효돈천을 의지해 살아온 이 지역민들은 이곳에서 삶의 지혜를 터득하고 동고동락해 왔다. 이 물을 식수로 이용함은 물론, 농업용수로 쓰이기도 하고, 농사를 지을 땅이나 환경이 여의치 않은 사람들은 이 물을 이용해 종이를 생산했다는 기록도 나타난다. 쇠소깍까지 내려가다 보면 긴소, 웃소, 댁물, 남내소 등 크고 작은 '소'들이 이어지고, 그 곳에는 저마다의 사연과 전설들이 또한 깃들어 있다.

원앙폭포에서 나와 서귀포로 가는 5.16도로에서 내려가다가 비석거리에서 동쪽 방향으로 좌회전을 하면 효례교와 만날 수 있다. 원앙폭포에서 효례교까지는 15분이 채 안 걸린다. 이곳이 바로 효돈천의 하류인 쇠소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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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돈천의 끝자락인 쇠소깍 ⓒ 고평열


효돈을 옛 어른들은 '쇠돈'이라고 했다. 깊은 물(소)이 있는 이 곳에 '끝'이라는 뜻의 제주어 '깍'이 붙게 되어 쇠소깍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경관이 수려하고 물이 맑아 그동안 드러나지 않았던 이 곳은 비경으로 떠오르고 있는 명소이다.

쇠소깍은 바다에서 밀려오는 밀물과, 한라산에서 내려오는 담수가 만나는 '기수역'에 해당된다. 담수에서 내려오는 풍부한 영양염류를 분해하면서 생기는 먹이사슬이 생태계로 이어져, 생물다양성이 높아지게 한다. 바다와 만나는 지역이므로 해양생물들이 서식하고, 물새와 산새들이 머물며 먹이를 포획하고, 번식을 하는 중요한 서식공간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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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석을 깎던 돌들이 하천 양안으로 절벽을 이루고 있다. ⓒ 고평열


제주를 이루는 검은색의 다공질현무암에 익숙한 눈길에 쇠소깍의 양안을 구성하고 있는 회색빛 치밀한 암석은 흔치않은 비경을 보여준다. 이 돌은 이용하여 비석을 만들고, 생활용구를 만들어 제주 전역에 공급하던 채석장이 하례리 지역에서 확인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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쇠소깍은 검은모래 해수욕장이다. 저멀리 지귀도가 보인다. ⓒ 고평열


한라산 정상부위에서부터 굴러 내리기 시작한 어느 커다란 바위가  효돈천 끝자락인 쇠소깍에서 이제 한 줌의 모래로 화하여 사람들의 발길에 밟히고 있다. 쪽빛 짙은 바닷물의 색은 바닷가 아래 저 멀리까지 검은모래나 바위들이 그 기저에 깔려 있음을 온몸으로 말하고 있음이리라.

생각의 초점을 맞추면 시선이 머무는 모래 한 알 속에서도 수만 년 세월이 서려 있음이 보일 것이다. 우리는 그 안에서 다시 수만 년 후의 세월을 설계해야 하지 않을까.

덧붙이는 글 | 제가 운영하는 다음카페에 게시글로 함께 싣습니다.


덧붙이는 글 제가 운영하는 다음카페에 게시글로 함께 싣습니다.
#생태기행 #제주도 #팽이 #야생버섯 #야생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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