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정에서 백산면 소재지 쪽으로 바라본 풍경.
안병기
산 정상 가까이 가자, 가장 먼저 길손을 맞는 건 동학혁명 백산창의비이다. 중앙엔 '동학혁명 백산창의비'라 쓰여 있고, 좌측에는 동학농민군의 모습을 형상화한 부조가 새겨져 있다.
1월 11일, 고부 관아를 점령한 농민군은 정부에서 파견한 안핵사 이용태와 신임 군수 박원명의 회유책에 넘어가 뿔뿔이 흩어지고 만다. 그러나 이용태는 무고한 농민들을 동학교도로 몰면서 보복조치를 자행하고 살인과 약탈을 일삼음으로써 또다시 농민들의 분노를 산다.
3월 20일(양력 4월 30일), 무장에서 봉기한 동학농민군은 고부관아를 점령하고 닷새 후에는 백산으로 옮겨 진을 친다. 전라도 일대의 농민군들이 이곳으로 속속 모여들기 시작한다. 고부 농민봉기를 이끌던 전봉준이 2월 20일경 각 읍에 띄운 격문을 보고 모여들기 시작한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이로써 백산 봉기는 고부 농민봉기가 지닌 지역적 한계를 극복하고 전국적인 항쟁으로 확대되기 시작하는 계기를 맞는다.
농민군의 수가 점점 불어나 산을 가득 메웠다. 농민군들이 앉으면 죽창만 보이고, 일어서면 농민군들이 흰옷이 산을 덮었다 하여 '서면 백산이요, 앉으면 죽산(竹山)'이라는 말이 생겨날 정도였다.
호남창의대장소를 설치한 농민군은 "우리가 의를 들어 이에 이르름은 그 본의가 결코 다른 데 있지 아니하고 창생을 도탄 속에서 건지고 국가를 반석 위에다 두고자 함이다"라고 시작되는 격문을 각지로 띄워 전국적 호응을 유도한다.
혁명 지도부는 농민군을 군대 편제로 재편성하고 총대장에 전봉준, 총관령에 김개남, 손화중을 추대하는 등 본격적인 싸움 준비를 갖춘다. "첫째, 사람을 함부로 죽이지 말고 가축을 잡아먹지 마라"로 비롯하는 '4대 명의'를 발표하여 내부 기율을 다잡는다.
동학농민군이 백산으로 집결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전라감사 김문현은 농민군을 소탕하려고 전라감영군과 부보상으로 구성된 200∼300여 명의 연합부대를 백산으로 출동시킨다. 전국 조직망을 갖춘 막강한 조직인 부보상은 정부로부터 상권을 보호받는 대신 정부의 요청이 있으면 언제든지 인력을 제공하는 협력관계였다.
신태인 화호 나룻가에 도착한 토벌군은 거기에 진을 친 다음 백산을 향해 마구 총을 쏘아댔다. 지형의 불리함을 느낀 농민군은 4월 5일 부안 성황산으로 진을 옮겼다가 곧장 고부 천태산을 넘어 6일엔 도교산(황토산)에다 진을 친다.
1988년 동학혁명백산기념사업회에서 건립했다는 동학혁명백산창의비는 당시의 의기와 함성을 느껴보기엔 턱없이 작고 초라하다. 창의비에서 몇 걸음 떨어진 산 정상엔 동학정이란 정자가 서 있다. 이것은 창의비를 외롭게 하지 않으려는 관의 배려인가.
아! 천지간에 정통성 없는 것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