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끼 눈 할아버지와 흙바닥 훈장 이야기

[책 속으로 떠난 역사여행 4] 배유안의 <초정리 편지>

등록 2007.09.30 11:14수정 2007.09.30 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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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초정리 편지> 책표지

<초정리 편지> 책표지 ⓒ 창비

토끼 눈 할아버지는 눈이 토끼처럼 빨갛다. 왜 그럴까. 눈병에 걸렸기 때문이다. 흙바닥 훈장은 막대기나 돌로 흙바닥에 글자를 써서 사람들에게 가르쳤다. 왜 하필 흙바닥일까. 가난하고 천한 사람들이라 붓이나 종이를 구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흙바닥 훈장은 토끼 눈 할아버지에게 글자를 배웠다. 진서가 아닌 언문이었다.

광천수로 유명한 충북 청원군 초정리는 조선시대 초수리라 불렀다. 이곳에 세종이 눈병을 고치기 위해 방문한 적이 있다. 관련 사실을 알아보기 위해 '조선왕조실록 홈페이지'에서 '초수리'를 검색한 결과 세종 재위시 15건의 사료를 찾을 수 있었다. 세종이 눈병을 치료하기 위해 초수리로 행차한 전후의 상황을 알 수 있는 사료들이다.


눈병에 걸린 세종이 초수리로 행차하기 직전 최만리를 비롯한 조정의 중신들은 중화를 앞세우며 언문 제작의 부당성을 내세우며 세종과 갈등을 빚는다. 이에 굴하지 않고 세종은 언문이 어리석은 백성을 교화시키는 데 꼭 필요한 것이라며 최만리 등을 의금부로 넘긴다.

세종의 행차가 이루어지기 전에 초수리 근처에 사는 백성 중에서 병 기운이 있는 사람들은 초수리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초막을 짓고 옮겨가도록 했다. 눈병 걸린 관리들을 미리 보내 초수리 광천수가 안질 치료에 효험이 있었는지 확인도 했다.

세종 26년(1444년) 2월 28일 세종은 왕비, 세자와 더불어 초수리로 출발해서 3월 2일 도착했다. 세종은 5월까지 두 달 정도 초수리에 머물면서 눈병을 치료했다. 왕의 행차를 위한 길을 뚫고 행궁을 짓기 위해 논밭을 징발당한 백성들을 위로하기 위해 술과 음식을 내리고 농사를 짓지 못하는 대신 쌀과 콩을 내리기도 했다.

a 조선왕조실록 사이트 초수리 검색 결과

조선왕조실록 사이트 초수리 검색 결과 ⓒ 조선왕조실록 홈페이지


<초정리 편지>는 세종의 초수리 행차란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있다. 석수장이 아들인 장운은 나무하러 갔다가 우연히 토끼 눈 할아버지를 만나 이상한 글자를 배운다. 윤초시 댁에 나무 한 단과 약수 한 병씩 떠다 주고 보리쌀 한 되를 받아 생활하는 가난한 아이였지만 빨간 토끼 눈 할아버지가 가르쳐준 글자는 쉽게 익힐 수 있었다. 더구나 글자를 외워 가면 쌀까지 준다는 말에 더 열심히 글자를 익혔다.

장운은 토끼 눈 할아버지에게 배운 글자를 누이에게도, 방앗집 머슴 오복에게도, 약재 영감 손녀딸 난이에게도 가르쳐주었다. 종이와 붓이 없어 흙바닥에 써서 가르쳐준 것이다. 일을 하다 다쳐 누워있는 아버지를 대신해서 석수 일을 배울 때 동료 석수들에게도 가르쳐주었다. 그래서 얻은 별명이 흙바닥 훈장이다.


토끼 눈 할아버지 덕에 까막눈을 면한 천하디 천한 장운과 그 주변 사람들은 글자의 덕을 톡톡히 보며 산다. 종으로 팔려간 누이 덕이와 인편을 통해 편지를 주고받을 수 있었고, 돌 다듬는 기술을 적어 두고 익힐 수 있었으며, 약재 영감 손녀딸 난이가 적어 놓은 치료법을 보고 부상당한 동료의 병을 치료해줄 수 있었다. 

한글이 우수한 글이라고 말들은 많이 하지만 현실 속에서 생생하게 느끼며 사는 이들은 많지 않다. 창제 당시부터 언문이라 해서 오랑캐 글이라 해서 양반들에 의해 외면되고 배척되었던 글이다. 세계화 시대 영어에 의해 뒷전으로 밀려난 지도 꽤 오래 되었다.


<초정리 편지>는 세종의 초수리 행차란 역사적 사실에, 가진 게 없어 몸뚱이 하나로 험난한 세상을 살아가야 했던 이들의 삶을 결합시킨 감동적인 작품이다. 힘 있고 권세 있는 사람들에게는 형편없는 글이라 천대받더라도,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에게는 얼마나 요긴하게 쓰일 수 있는지를 가슴 아리게 감동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덧붙이는 글 | 배유한 장편동화/ 홍선주 그림/창비/8500원


덧붙이는 글 배유한 장편동화/ 홍선주 그림/창비/8500원

초정리 편지

배유안 지음, 홍선주 그림,
창비,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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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정리 #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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