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패해 승리를 쟁취하느냐가 관건이다

[태종 이방원 178] 패배하는 것이 승리다

등록 2007.10.18 13:50수정 2007.10.18 1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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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좌. 태종 이후 누가 올라갈 것인지 안개에 싸여 있다. ⓒ 이정근


태종이 모종의 수순을 밟고 있는 사이 한양을 방문한 내관 최한은 세자전으로 직행했다. 서연청(書筵廳)에 들어가 세자에게 선전(宣傳)하고자 하였으나 양녕이 응하지 않았다. 빈객·서연관·대간과 함께 전지(傳旨)를 듣게 하는 것은 망신스럽다는 것이다.

선전이 현대에 와서는 광고의 동의어로 사용되고 있는데 조선시대 초기의 선전은 왕명을 전하고 훈도하는 의식이었다. 세조 조에 선전관이라는 관직이 정착될 때까지 환관이 그 임무를 대행했다.


“내가 심히 부끄러워하는데 어찌 여러 사람이 함께 듣겠는가? 빈객 한두 명과 서연관만 들어도 족할 것이다.”

“성상의 하교(下敎)가 이와 같으니 소신이 다시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내관 최한이 정중하게 물리쳤다. 법도를 어길 수 없다는 것이다. 한양에 유도(留都)한 대소신료를 모아놓고 훈도하라는 왕명을 거역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양녕은 꿈쩍하지 않았다. 탁신과 최한이 십여 차례 청한 뒤에야 양녕이 서연청(書筵廳)에 나왔다. 빈객과 서연관 그리고 대간이 좌정했다, 최한이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선전(宣傳)했다.

“너는 지아비가 있는 여자를 궁정으로 끌어들였고 한밤중에 담장을 넘어 밖으로 나갔다. 이로 인하여 복주(伏誅)된 자가 몇이었고 죄를 입은 자가 몇 사람이었느냐? 너는 왜 스스로 새 사람이 되어 전날의 허물을 고치지 아니 하는가? 네가 고(告)하기를, ‘김한로의 죄는 나라 사람들이 함께 아는 바입니다’고 하였으니 마땅히 극형에 처하기를 청하여야 할 터인데 어찌하여 지금은 다르게 말하는가?

너의 글을 보니 사리를 알지 못하는 글이라고 이를 수는 없다. 부자 사이에 어찌 객(客)이 매를 때려서 가르치겠는가? 서연(書筵)은 네가 하고자 한다면 할 수 있고 하고자 아니한다면 할 수 없다. 날마다 빈객(賓客)을 맞이하여 좋은 말을 구(求)하여 듣도록 하라.”-<태종실록>


선전이 진행되는 동안 양녕은 두 눈을 감고 조용히 경청했다. 아버지와 자신 사이에 흐르는 두 줄기의 강물이 도저히 합해질 수 없다는 인식의 차이를 절감했다. 어리에 대한 사랑을 불의로 규정하고 장인 김한로를 극형의 대상으로 보는 시각차였다.

인식의 차이를 절감하다


선전이 끝났다. 빈객과 보덕(輔德)이 개성에서 보내온 왕지를 보고 그 밖의 서연관(書筵官)이 이를 보고자 했다. 잠자코 있던 양녕이 최한을 가로 막으며 보지 못하게 했다. 부왕의 책망이 부끄럽다는 것이다.

곁에 있던 탁신이 임금에게 올린 상서의 불공(不恭)함을 지적하고 충효의 마음으로 뜻을 세워 스스로 새 사람이 되어 달라고 간곡히 진달(進達)했다. 그러나 양녕의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평행선을 달리는 부왕의 얼굴만 떠올랐다.

비록 내관 최한의 입을 빌렸지만 선전은 왕의 말씀이다. 선전이 빈객(賓客)에게 이어졌다.

“이미 지나간 것은 허물하지 않겠다. 세자로 하여금 전날의 허물을 고쳐 스스로 새 사람이 되는 단서를 속히 나에게 들리게 하라.”

빈객(賓客) 조용과 탁신이 허리를 굽히며 예를 갖추었다. 빈객들에게 세자를 교화하라는 책무가 내려진 것이다. 빈객들의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새 사람이 되는 단서를 속히 나에게 들리게 하라’했으니 마음이 급해졌다.

선전을 행한 내관 최한이 개성으로 돌아갔다. 임금의 노기 어린 선전을 받은 양녕은 칩거에 들어갔다. ‘올 것이 왔다’고 담담히 받아들였다. 아버지에게 선전포고를 발했으나 막상 이것이 아버지와의 전쟁이구나 라고 생각하니 당혹스러웠다.

“아버지에게는 절대권력이라는 가공할 무기가 있다. 문무백관을 비롯한 원군도 많다. 여기에 있는 빈객을 비롯한 세자전 식구들도 나에게 머리를 조아리고 있지만 모두 아버지 편이다. 오직 하나 숙빈이 있지만 죄인의 딸이라는 이유로 힘이 없다. 나는 훌훌 단신이다. 나에게는 그 무엇 하나 나은 게 없다. 전력상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싸움이다. 필패다.

아버지는 장기전을 끌어나갈 능력도 있다. 하지만 아버지가 전쟁피로를 느끼면 생명이 위태롭다. 지구전으로 나가면 내 자신이 점점 추해진다. 그러한 모습은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 구차한 모습은 싫다. 어떠한 모습으로 장렬하게 패하느냐가 숙제다. 속전속결이다. 기왕 붙은 전쟁 빨리 끝내는 게 좋다. 더 망가지기 전에 끝내자.

이길 묘책이 없는 것은 아니다. 아버지 앞에 넙죽 엎드려 죽여 달라면 살아날 수 있고 아버지의 물량공세를 무력화 시킬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전쟁을 도발한 이유에서도 한참 거리가 먼 원치 않은 계책이다. 이 전쟁은 전략이 필요 없는 싸움이다. 어떻게 지느냐가 문제다. 그것이 전술이다. 어떻게 패하여 승리를 쟁취하느냐가 관건이다.”

서연을 거부하고 세자전에 칩거하고 있는 양녕은 번민했다. 아버지의 여자 문제를 거론한 상서(上書) 자체가 불충과 불효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부왕이 발끈할 것이라는 것도 예상하고 있었다. 조정이 들썩이고 조선이 흔들리는 강진이 내습하리라는 것도 예견하고 있었다. 그러한 상황 판단을 한 양녕이 선전포고를 발하며 선제공격을 감행한 것이다.

아버지와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휴전이란 절충도 있지만 전쟁은 승리를 위한 싸움이다. 전쟁은 승패가 갈린다. 승리가 담보될 때 공격을 감행한다. 하지만 양녕은 아버지를 향하여 선전포고를 할 때 승리가 아닌 패배를 위한 포고였다. 세상이 패배라고 단정하는 그 패배가 곧 이기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길을 열어 효도하고, 새처럼 살고 싶다

양녕이 패배가 곧 승리라고 생각하는 역설적인 패배에는 두 마리의 토끼가 있었다. 아버지에 대한 효도와 자신의 해방이다. 부왕의 관심과 총애가 충녕에게 쏠리고 있는 것을 일찍이 감지했다. 학문적으로나 사리판단 능력에 있어서 충녕이 자신보다 뛰어나다고 의중을 흘리는 아버지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았다. 학문은 닦으면 되고 능력은 배양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럴 자신도 있었다.

성군이 될 인품과 자질이 자신보다 우수하다고 평가하는 데도 동의하고 싶지 않았다. 인품과 자질이 군주의 필요 요건은 된다 하더라도 절대 요건은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또한 군주의 통치행위는 뚜껑을 열어봤을 때 정치력의 가능성을 예상할 수 있고 관의 뚜껑을 닫았을 때 성군(聖君)으로 자리매김할지 범군(凡君)으로 남을지 평가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세자의 행태로 성군 여부를 가늠한다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시대가 영웅을 낳듯이 정치 환경이 성군을 만들어 낸다고 믿고 있었다. 이러한 현실 인식하에 있는 양녕에게 부왕의 충녕 쏠림 현상은 갈등의 연속이었다. 번민하던 양녕이 아버지가 충녕에게 집착하는 이면에 숨어 있는 그림을 찾아냈다. 명분과 현군(賢君)이다. 그것은 아버지의 토끼 두 마리였다.

“아버지가 장자를 제치고 둘째를 건너뛰며 셋째에 관심을 갖는 이유는 다른 데 있다. 현군의 자질은 구실에 불과하고 명분에 있다. 아버지는 등극 후 정통성에 시달렸다. 이복동생 세자와 형들을 제치고 왕위에 오른 아버지는 명분에 취약했다. 그러한 아버지가 충녕을 택한다면 능력 있는 자가 왕위에 올라야 한다는 논리로 자신의 즉위에 정당성을 획득하는 것이다.

이러한 밑그림을 그려놓은 아버지가 뛰어넘을 수 없는 벽이 있다. 그것은 첫째다. 장자인 바로 나다. 내가 착한 아들로서 세자 자리를 꿰차고 있는 한 아버지는 한 발짝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내가 죄인이 되어 아버지의 퇴로를 열어드려야 한다. 이것이 곧 효도다. 더불어 나는 멍애를 벗을 수 있다.”

비행을 일삼는 세자와 능력 없는 효령을 건너 뛰어 충녕에게 왕위가 돌아간다면 이복동생과 형들을 제치고 왕위에 오른 아버지에게 명분을 실어드리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또 하나, 세자의 멍애로부터 해방되는 것이다. 양녕은 새처럼 살고 싶었다. 양녕에게 있어서 궁궐은 아방궁이 아니라 탈출하고 싶은 공간이었다.
#태종 #양녕 #충녕 #효령 #효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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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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