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치 목을 매달고 죽은 시신 같았다

추리무협소설 <천지> 300회

등록 2007.10.31 07:51수정 2007.10.31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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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는 지금 확신하고 있는 것 같군. 물론 자네가 철담어른과 함께 이 거사를 도모했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계획을 세웠지만 그렇다고 결과가 변하는 것은 아니네. 내일 아침 해가 들 때쯤이면 자네 역시 현실을 수긍하고 받아들이게 되겠지.”

다시 용추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의 어조에는 은근한 확신이 들어있어 문득 함곡에게는 불길한 느낌을 들게 만들었다. 함곡으로 하여금 어쩔 수 없이 눈을 뜨게 만들었다. 그러나 시선이 용추에게 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결정적인 마지막 패를 남겨두고 있다는 것처럼 들리는구려….”

용추가 고개를 끄떡였다.

“역시 자네는 이해가 빠르군. 자네는 아직 상대인을 잘 모르고 있네. 그는 매우 조심성이 많은 사람이네. 아니 누구보다 더 조심성이 많네. 그래서 확신이 있더라도 웬만해서는 모험을 하지 않지. 절대적인 확신이 있더라도 움직이지 않네.”

그는 자신이 만든 집이 아니면 자지를 않고, 자신이 손수 만든 음식이 아니면 먹지를 않으며, 자신이 직접 고른 여자가 아니면 품지도 않는다는 사실은 이미 익히 아는 바다.

“상대인이 움직일 때는 모든 변수까지, 설사 일어나려야 일어날 수 없다고 생각하는 변수까지 모두 숙고한 후에야 결론을 내리지. 돌다리도 갑자기 무너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말이네.”


“그 정도는 알고 있소.”

“그래서 상대인과 맞서는 자들은 불행한 사람들이지. 그들은 자신들이 상대인을 이길 수 있다고 확신하며 달려들지만 그들이 이길 확률은 전무하네.”


용추 같은 인물이 주군으로 모시겠다고 결정을 한 것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상만천의 그릇은 크다. 신중한 것과 그릇이 크다는 것은 상반된 것이 아니다. 그릇이 크면서 신중한 사람은 정말 인물 중의 인물이고 상대에게는 넘을 수 없는 커다란 벽이 되는 것이다.

“이제 용추형이 가지고 있는 그 마지막 패를 보여주는 것이 어떻소?”

용추와 대화하면서 함곡은 문득 떠올렸던 불길한 느낌이 점점 현실화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답지 않게 직설적으로 물은 것은 바로 그런 불길한 느낌 때문이었을 것이다.

“자네 생각은 어떤가? 이곳에서의 마지막 승자가 되기 위한 조건이 뭐라고 생각하는가? 물론 지금까지 벌어졌던 상황과 현재 상황까지 종합해서 말이네.”

용추는 이러한 대화를 즐기고 있는 것 같았다. 사실 함곡이 자신과 마주보고 있는 한 다른 변수는 없었다. 용추가 두려워하는 것은 오직 함곡의 예기치 못한 술책이다.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바로 함곡의 비상한 두뇌와 술책일 뿐이었다.

“지금 그렇게 유리하다고 큰 소리 칠 만한 상황은 아닐텐데…. 현실적으로 불가능하지만 설사 이 생사림 안에서 승자가 된다고 해도 마지막 승자가 되려면….”

말을 하다말고 함곡은 모닥불을 바라보고 있었던 시선을 돌려 용추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뭔가 생각난 것 같았다.

“절대…있을 수 없는 일…보주와 손을 잡았소?”

보주와 손을 잡았다면 모든 것은 이미 결정 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다행스럽게 용추가 고개를 저었다.

“자네 말대로 보주와 손을 잡는 일은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네. 상대인은 누구와도, 설사 추태감과도 손을 잡을 수는 있지만 보주와는 절대 손을 잡을 수 없네. 다만 보주와 유사한 인물이라면 가능하지 않을까?”

함곡의 눈이 서서히 커졌다. 이미 뇌리 속에 하나의 이름이 스쳐 지나갔다.

“성곤?”

함곡의 음성은 신음과도 같았다.

--------------

“삼합회주까지 당했소….”

창월의 전음이 좌등의 고막을 울렸다. 미세한 움직임이 있는 것 같았지만 그것은 외부의 적이 아니라 궁단령이나 귀비의 움직임인 것으로 생각했다. 좌등이 급히 손가락을 튕겨 진운청 쪽으로 신호를 보냈다.

나뭇가지가 몇 번 흔들리고 조그만 돌이 나무둥치를 때리는 미세한 소리가 세 번 연달아 나자 진운청의 전음이 들렸다.

“대주…속하 운청이오.”

다행이었다. 진운청은 무사했다.

“이쪽으로 오게.”

말과 함께 고목 중간 부근에 몸을 숨기고 있던 좌등이 몸을 드러냈다. 그리고 진운청의 모습이 보이자 그는 지체 없이 궁단령이 있었던 곳으로 신형을 날렸다.

“으음.”

뒤늦게 도착한 진운청이 두 여인의 시신을 보며 신음을 흘렸다. 목에는 은사가 감겨 있고 몸은 허공에서 스쳐가는 바람에 따라 약간씩 흔들리고 있었다. 마치 목을 매달고 죽은 시신 같았다.

“목을 졸라 목뼈까지 부러뜨렸군.”

누구에게 어떻게 당한 것일까? 좌등이 두 여인의 시신을 자세히 살피며 고개를 끄떡였다. 사인은 분명 목을 조른 것. 은사로 목뼈까지 부러뜨리기는 어렵다. 결국 죽은 후에 매달아 놓은 것이다. 진운청 역시 좌등의 옆으로 다가섰다.

“헉!”

그때였다. 갑자기 좌등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동시에 그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대주!”

돌발 상황에 진운청이 홱 몸을 돌리며 좌등을 부축하려하다가 주저앉은 좌등의 목 뒤에 거무튀튀한 곤(棍)을 대고 있는 창월을 보았다.

“네…놈이…?”

좌등의 등허리 쪽에서 피가 배어나와 땅바닥을 적시고 있었다. 이미 창월의 곤이 좌등의 등허리 쪽의 척추를 가른 것. 손을 쓰는 것을 보지 못했을 뿐 아니라 미세한 느낌도 없었다. 창월의 솜씨는 놀라웠다.

“진형…움직이지 마시오. 좌총관 어른을 죽이고 싶은 마음까지는 없소.”

경고였다. 진운청이 움직이면 그대로 곤을 좌등의 뒷목에 박겠다는 뜻이다.

“끄르…왜…네가…?”

좌등이 옆으로 쓰러지지 않으려고 애쓰며 신음처럼 흘렸다. 앉아있기도 어려웠다. 언뜻 혈간의 시신에서 본 등허리의 상처가 생각났다. 깊지도 얕지도 않은 그 상처. 척추만을 갈라 하체를 전혀 움직이지 못하게 한 바로 그 치명적인 상처가 바로 자신의 등허리에도 나 있을 것이다.

“나는 좌총관 어른을 존경하오. 하지만 이럴 수밖에 없음을 용서하시오.”

창월의 발음은 매우 또박또박했다. 하지만 약간 떨려나오는 것으로 보아 괴로워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또한 말에는 진심이 담겨있었다.
#천지 #추리무협 #연재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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