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지구인들이 원하는 판타지에 대한 물음

[만화 한 칸,생각 한 줄] 이향우 작 <우주인>

등록 2007.11.19 19:35수정 2007.11.19 1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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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겨울, 수많은 이들이 직장을 잃고 배회하던 그 해의 바람은 어느 해보다 차고 매서웠다. 실업자 신세로 맞는 아침, 살갗에 닿는 겨울바람은 더욱 차갑게 느껴졌다. 아침에 눈을 뜨면 도서관을 배회하거나, TV를 앞에서 뒹굴 대는 하루하루가 이어졌다. 깜깜한 미래만이 연상되던 그때, 만화는 유일한 도피처였다.

작가의 상상에 시간과 공간의 제약이 없는 만화의 특성상, 만화는 먼 고대에서 미래의 이야기, 100만 광년 떨어진 안드로메다에서 깊은 땅속까지 맘껏 판타지를 그려내 보였다. 작가가 빚어낸 판타지 속에서 백수라는 아픈 현실을 잠시나마 잊었다.


그날도 만화를 읽기 위해 집을 나섰다. 여러 만화 잡지 가운데 여자 만화 잡지를 표방하던 <나인>에서 이향우 작가의 <우주인>을 발견했다.

이름이 반칙? 예상을 깬 우주인과의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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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찾기


'우주인이라고? SF 우주 활극인가? 우주인들이 지구 위로 내려오는 이야기인가보다.'

제목을 보고 설레던 기대감은 만화의 첫 장을 넘긴 순간부터 여지없이 깨졌다. 이 만화는 다만 성은 우씨요, 이름이 주인인 우주인의 일상을 그린 만화일 뿐이었다.

그녀는 더군다나 백수 처녀였다. 별 할 일이 없어 집 안에서 빈둥대는 모습이 꼭 당시의 내 모습이었다. 현실을 잊고 싶어 들춰본 만화에서 하필 그토록 마주하기 싫은 현실을 보아야 한다니. 들키기 싫은 추한 자신의 모습을 거울로 똑바로 보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우주인은 보통의 백수들의 삶과 다른 점은 있었다. 주인이는 백수인 자신의 삶에 당당하다. '놀기-> 잠자기->놀기-> 잠자기'로 짜인 자신의 일과표를 보고 "난 하루종일 너무 바빠! "라고 말할 수 있는 주인이.

주인이는 태연자약함에는 자신은 지구에서 온 사람이 아니라 우주에서 온 사람이며 언젠가는 우주선을 타고 자신이 살던 곳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믿는 엉뚱함이 자리 잡고 있었다.


행복하게 살아가는 특별한 백수, 주인이

정말 우주에서 온 사람처럼 주인이는 보통 백수들과는 달랐다. 자신의 직업 없는 삶에 당당함은 물론이요, 지구인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돈'에도 크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그녀에게 살아가기 위해 '돈'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이미 '돈'을 위해 살아가는 것이 당연해진 지구인들은 그저 신기한 사람들이다.

돈이 다 떨어져 돼지 저금통을 찢어 라면을 끓여 먹으면서도 돈을 많이 벌겠다는 욕심을 부리지 않는다. 남보다 근사한 직업을 갖겠다는 욕심도 없다.

“난 TV보고 노느라 너무 바쁜데 남들은 왜 내가 한가하다는 거야?”

사람들은 더 많이 더 높게 살기 위해 미친 듯이 뛰어가고 있는데 말이야, 저런 여유로운 모습이라니.

정말 주인이는 여유롭다. 빨래를 널면서 따뜻한 햇살을 쬐고, 우울하면 버스에 정처없이 자신의 몸을 맡기기도 한다. 그리고 주인이는 지구인들 사이에서 소위 잘 안 나가는 사람들로 분류하는 사람들과 사귄다. 서울 변두리의 이름 없는 삼류 클럽, '비틀비틀 클럽'의 여러 멤버들과 교류한다.

주류 입장에서 보면 참 별볼일없는 그들, 재능 없는 뮤지션, 남들이 보면 바보라고 딱지 붙일 친구, 그리고 툭하면 잘난 척하는 공주병 환자들까지 모두 주인이에게는 소중한 친구들이다. 주인이의 세상에서 지구인들이 가진 타이틀과 가진 것은 크게 중요하지 않다.

'UFO'라는 아이스크림 박스에 버려진 강아지 '눈탱'과 눈탱을 좋아하는 고양이마저도 주인이의 세상에서는 함께 소통하며 어우러져 지낸다.

어느 날 비틀비틀 클럽의 장사가 잘되지 않아 가게가 폐업될 무렵, 주인이와 친구들은 돈을 모으기 위해 벼룩시장을 열고, 자신들이 아끼던 물건들을 판다. 물건을 팔면서 행복한 그들, 허름한 포장마차에서 친구들과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며 행복해 하는 주인이. 그런 그들이 덜컹거리는 고물차를 타고 이름만 별장인 허름한 곳으로 바캉스를 떠나도 마냥 행복하다.

지구인들이 꿈꾸는 진정한 판타지

나이를 먹고 어른이 되면서 잘 사는 삶의 답은 오로지 '남보다 더 많이, 더 높게'가 되는 듯하다. '더 많이 더 높게'를 위해 달리다 보면 주위의 나무와 꽃을 살펴볼 여유가 없다. 사람들을 보는 기준도 그 사람 자체가 아니라 그 사람이 가진 것이 되다 보니,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과 진심으로 소통하는 일도 드물어진다. 이렇게 살아가는 삶 속에서 판타지란 사람이 마법을 부리고, 요정이 인간의 꿈을 이뤄주는 이야기만은 아닐 것이다.

돈이 없어도 직장이 없어도 주인이처럼 당당하게 여유롭게 삶을 살아가는 일이, 사람들과 진정한 소통하는 일상이야말로 지구인들이 보기 어려운 판타지는 아닐까? 우리는 가끔 이 지구에 놀러 온 우주인처럼 살아야 하는 것은 아닌지 만화의 마지막 장을 넘기면서 생각했다.

우주인 - 떠나버린 지구인을 그리워하며...

이향우 지음,
이미지프레임, 2003


#만화 #우주인 #판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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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시민은 기자다! 라는 모토가 신선했습니다. 과거와 달리 각 블로그와 게시판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시대에는, 정보의 생성자가 모든 이가 됩니다. 이로써 진정한 언론과 소통의 자유가 열렸다고 생각합니다. 또 변의 일상적인 이야기도 알고 보면 크면 크고 중요한 이야기라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여성, 특히 아줌마들의 다양한 시각, 처한 현실 등에 관심이 많고, 이 바께 책이나 정치 분야에 관심이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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