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셔널리즘은 당뇨병과도 같은 것"

장문석 교수의 <민족주의 길들이기>와 내셔널리즘 논쟁

등록 2007.11.20 13:35수정 2007.11.20 1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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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셔널리즘(혹은 민족주의) 논쟁은 언제나 뜨겁다. 그리고 이런 논쟁은 쉽사리 결론으로 이어지지도 않는다. 설사 결론이 난다 해도, 그것은 ‘절반의 결론’에 그칠 뿐이다.

“내이션(국민국가 혹은 민족)은 근대 이후에 생긴 산물”이라고도 하고, “근대 이전부터 있었던 것”이라고도 한다. 또 “극복 대상”이라고도 하고 “그렇지 않다”고도 한다. 또한 “허구”라고도 하고 “그렇지 않다”고도 한다. 어떤 경우에는 내이션을 국민국가와 민족 중 어느 표현으로 번역해야 할 것인가에서부터 논쟁이 시작되었다가 그것으로 끝나기도 한다.

좀처럼 쉽게 결판나지 않는 내셔널리즘 논쟁에서 서양사 학자들은 흔히 ‘민족은 근대 이후의 산물’ ‘민족은 극복 대상’ ‘민족은 허구’라는 입장에 서 있다. 반면에, 한국사를 전공하는 역사학자들은 내이션을 옹호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런데 지난 6월 한국에서는 젊은 서양사 학자가 서양사 학자로서는 이례적인 한 권의 책을 펴냈다. <민족주의 길들이기>라는 책의 지은이인 장문석 한양대학교 비교역사문화연구소 연구교수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길들이기’라는 표현을 보면 그가 혹 내셔널리즘을 부정하는 게 아닌가 하고 생각할 수 있지만, 실제로 내용을 들여다보면 그와 정반대임을 알 수 있다.

서울대학교 서양사학과 출신인 장 교수의 박사학위논문은 파시스트 통치 시기의 이탈리아 대기업인 ‘피아트’에 관한 것이다. 11월 19일 오후에 국내 모 대학의 BK21 사업단 저작비평회에 초대된 장 교수는 “피아트라는 이탈리아 대기업과 국가의 관계를 연구하다 보니 그 배경이 되는 파시즘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그러다 보니 내셔널리즘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다”면서 자신의 저작 배경을 소개했다.

위에서 “장 교수가 서양사 학자로서는 이례적인 책을 썼다”고 한 것은 내셔널리즘에 관한 그의 진단이 국내의 여타 서양사 학자들과 비교할 때에 상당히 이례적이기 때문이다.

내셔널리즘을 ‘에트노스(종족)와 데모스(시민)의 결합’으로 봐야 한다고 말하는 장 교수는 “내이션은 꼭 근대 이후의 산물이라기보다는 이미 오래 전부터 공동체의식의 형태로 그 원형이 존재해왔다”면서 “나는 그러한 증거를 로마 몰락 이후부터 유럽통합까지의 역사 속에서 살펴보려 했다”고 말했다. 그래서 <민족주의 길들이기>라는 책의 부제목은 ‘로마 몰락에서 유럽 통합까지 다시 쓰는 민족주의의 역사’다.


“그렇다면, 내이션의 원형이 로마 몰락 이후에만 나타난 것이냐?”라는 청중의 질문에 대해 그는 “물론 그렇지 않다”면서 “로마 몰락 이후를 기점으로 잡은 것은 편의상의 선택에 불과하며, 내가 자신 있게 쓸 수 있는 부분이 로마 몰락 이후이기 때문에 그렇게 선정한 것일 뿐”이라며 겸손을 표시하기도 했다.

이처럼 그는 ‘이미 오래 전부터 내이션의 원형이 인간의 역사와 함께 공존해왔다’는 점을 인정하는 한편, 흔히 회자되듯이 내셔널리즘에 폐단이 있다는 점 역시 긍정한다. 그렇다면, 내셔널리즘의 폐단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 <민족주의 길들이기>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은폐와 호도의 매체인 민족주의의 폐단을 극복하는 유일한 길은 민족주의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민족주의를 특정한 방식으로 긍정하는 것, 그러니까 민족주의의 민주주의적인 속성을 최대한 발화시켜 종내(終乃, 인용자 주) 스스로 연소하게끔 하는 것이라는 게 이 책이 담고 있는 실천적인 문제의식이다.”

여기서 그는 내셔널리즘을 부정할 게 아니라 그 긍정적 측면을 발화시키는 게 바람직하다고 주장했다. 내셔널리즘의 긍정적 측면을 발전시킴으로써 그 부정적 측면이 스스로 연소되도록 하자는 것이다. 

내셔널리즘을 부정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암과 같은 치명적 질병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그는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내셔널리즘은 일종의 당뇨병 같은 것이므로 한 번에 없애려 하기보다는 지속적으로 ‘관리’하는 게 낫다는 흥미로운 진단을 내리기도 했다. 

그리고 “내셔널리즘을 긍정할 수밖에 없는 것은 이미 오래 전부터 그 원형이 인간과 함께해왔으며, 또 그것이 민주주의나 자유주의의 신장에 기여한 측면이 있기 때문”이라고 그는 다시 한 번 강조했다. 내셔널리즘에 담긴 민주주의적 속성을 발전시키게 되면, 내셔널리즘의 폐단 역시 연소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핵심적 주장이다.

이에 대해 청중석에서 반론이 나왔다. “민족주의의 민주주의적인 속성을 최대한 발화시키자고 했는데, 흔히 민족주의는 개인의 자유나 민주주의에 대한 걸림돌이라고 인식되고 있지 않는가?”

그에 대한 장 교수의 답변은 다소 ‘거칠면서도’ 단순하고 명쾌했다. “민족주의는 기본적으로 ‘우리는 하나’라는 인식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다. 이러한 모토는 신분제 사회에서는 생각도 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임을 모토로 하는 민족주의는 필연적으로 민주주의의 신장에 기여하는 측면이 있다. 프랑스대혁명의 경우처럼 민족주의가 민주주의를 수반한 측면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내셔널리즘의 기본 모토는 ‘우리는 하나’이고 ‘우리는 하나’라는 의식은 신분제적 질서에 배치되는 것인 동시에 민주주의를 신장시키는 것이므로, 무조건 내셔널리즘이 민주주의나 자유주의나 배치된다고 볼 수는 없다”는 장 교수의 논리는 상당한 설득력을 갖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외에도, 장 교수는 근대 내셔널리즘과 똑같지는 않지만 이미 오래 전부터 내이션의 원형이 존재해왔다는 점을 들어 “민족이 근대의 산물이라고만 볼 수는 없다”는 말을 하기도 했고, 또 “민족이 엄연히 현실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는데, 과연 그것을 무조건 허구라고만 볼 수 있겠느냐?”는 말을 하기도 했다.

젊은 장문석 교수의 이 같은 도전적 문제제기는 그 주장 중 일부가 신선하기도 하지만, 서양사 전공자의 한계를 극복하고 새로운 시각을 가지려 했다는 점에서도 의의를 갖는 것이라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서양 근대에서 내이션 스테이트(nation state)가 왕조 국가(dynasty state)의 대립개념으로 출발했으며 양자의 차별성은 주권의 소유자가 내이션이냐 왕조냐에 있었다는 점을 고려할 때에, “내이션을 일괄적으로 ‘민족’으로 번역해야 한다”는 장 교수의 주장에는 쉽게 찬성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동양 사회에서 민족이나 민족국가는 일차적으로 종족적 관념을 저변에 깔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용어의 등장 배경을 살펴보면, 서양의 내이션은 정치적 개념이고, 동양의 민족은 종족적 개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을 포함하여, 쉽게 찬동할 수 없는 몇몇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젊은 서양사 학자가 서양사 학계의 주류적인 분위기에 도전장을 내밀면서 소신 있는 주장을 폈다는 점에 대해서는 긍정적 평가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장문석 교수가 제기한 것과 같은 건전한 내셔널리즘 논의는 한국 내 내셔널리즘을 보다 더 건전한 방향으로 이끄는 데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내셔널리즘 #민족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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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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