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속도로 거리를 거닐 때

[이 시대의 유물] 빨간 우체통과 공중전화기에 대한 소고

등록 2007.11.26 13:21수정 2007.11.26 1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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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속도는 추억의 속도 속도를 아무리 내도 꿈의 속도를 따를 수 없고.. ⓒ 송유미


요즘은 걷기 좋은 계절이다. 그리 춥지도 않고 걸으면서 얻는 열기에 의해 땀을 식히는 싸늘한 바람이 좋다고 느껴지는 이 초겨울. 산책이라고 하긴 그렇고 그냥 차를 타는 대신 자주 걷는다. 걷다보면 내 발걸음의 속도는 앞서가는 이의 발걸음을 따라내기도 하고 더 빨리 속도를 내도 더 이상 따라내기 힘든 속도를 만나기도 하지만, 쉽게 따라내는 느릿느릿한 걸음걸이의 속도를 앞질러 가면서 그 속도를 뒤돌아보기도 한다.


요즘은 속도의 시대다. 속도가 늦는 것은 다 퇴물이 된다. 그리고 점점 삶 속에서 잊혀지는 흙먼지 뒤집어 쓴 빨간 우체통과 공중전화기와 자주 마주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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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림이 없어진 시대의 유물처럼 두근두근 우체통에 러브레터를 넣던 시절이 그립다 ⓒ 송유미


열 아홉 살의 시인 말라르메는 거리에서 마주 친 어느 여인에게 처음에는 장난삼아 러브레터를 보냈다고 한다. 그러나 그녀가 아무런 반응이 없자, 그는 더욱 열렬하게 편지를 띄웠다고 한다. 그러는 동안 그는 정말로 그녀를 그리워하는 것을 발견했다고 한다.

요즘은 시인이라도 수기로 편지를 쓰는 사람은 별로 많지 않을 것이다. 빠르고 신속한 것들만 추구해 온 우리의 삶 속에 깊이 들어온 컴퓨터로, 쓰는 즉시 편지나 모든 서류 등을 메일로 세계 어느 곳에나 빠르게 받아 본다. 기다림이 없어진 셈이다. 느릿느릿 거북이 같은 속도는 질주하는 문명의 속도 속으로 자취 없이 사라진다.

그러나 꼭 빠르고 신속한 것만 우리의 삶을 살찌우는 것일까. 사람은 누구나 가슴을 가지고 있고, 그 가슴을 움직이는 사랑으로 인생의 반을 살지 않을까.

나무 그늘이나 버스 정류장, 잡초더미가 수북한 곳에 우두커니 서 있는 빨간 우체통을 쳐다보면 나도 모르게 '추억의 속도'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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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찾지 않는 공중전화기 그들은 갑자기 쓸쓸하고 우울하다 ⓒ 송유미


추억은 가끔 잊혀진 일들을 기억하게 하는 힘이 있다. 가만히 생각하면 80년대 초반에서야 우리 집에 유선전화가 들어왔다. 그때 기쁨에 들뜬 식구들과 한 집에 세들어 살던 이웃들의 환한 표정이 환히 떠오른다.

 요즘은 웬만한 가정마다 식구 수대로 번호가 다른 개인 핸드폰을 가지고 있으니, 이런 이야기는 격세지감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우리 집에 유선전화가 들어어오게 되자, 이 전화는 이웃의 공중전화 역할을 했다.

'누구 누구 엄마 바꿔 주세요' '앞 집 할머니 좀 부탁합니다' '저 있잖아요. 죄송한데요. 맨 골목 끝 방에 자취하는 총각 아저씨 좀 부탁해요' 등등

귀찮은 면도 없지 않았지만, 이 전화 심부름을 즐겁게 했던 것이다. 요즘은 옆집에 전화가 없어 바꾸어 줄 일도 없지만, 한 집안에 같이 사는 가족끼리도 저마다 개인 프라이버시로 비밀번호를 핸드폰에 입력하고 산다.

삶은 정말 빠른 속도로 앞서 질주한다. 그러나 추억은 가끔씩 연어처럼 회귀하듯이 까맣게 잊혀진 시간 속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가끔은 기다림에 졸리면서 두근두근 러브레터를 빨간 우체통에 넣고, 어디론가 전화를 걸기 위해 줄지어 선 공중전화기 앞에서 오래도록 아무도 받지 않는 본가의 전화벨을 울려 보기도 한다.

행여 돌아가신 어머님이 받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우체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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