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 없는 철새들의 한철 고향, 금강 하구

가창오리들의 군무를 볼 수 있는 군산 나포 십자들녘

등록 2007.11.27 09:34수정 2007.11.27 1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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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 나포 십자들녘의 가창오리떼 ⓒ 군산시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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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창오리 군무는 노을이 물들기 시작할 때 더 아름답다. ⓒ 군산시청


아이는 비염이 있어서 찬바람이 불면 코피를 흘린다. 자다가도 코피를 쏟는다. 그래서 2주째 주말을 집에서만 보냈다. 밖에서와 똑같이 활동을 한다면, 마음씨 좋은 아래층 사람들도 “아이들은 원래 뛰는 게 정상이에요”라고 할 수만은 없을 것이다. 책 보기와 레고 블록 맞추기, 그리고 사소한 말다툼으로 보내는, 평온하면서 위태로운 주말, 아이가 말했다.

“엄마, 새 보러 안 갈래? 지금쯤이면 왔지?”
“그래. 근데 코피 안 흘릴까나?”


아이가 말하는 새는 가창오리이다. 내가 보고 싶은 새는 쫑찡이(도요새)다. 쫑찡이는 겨울을 나기 위해서 뉴질랜드나 호주에서 날아온다. 지난 여름, 11시간 동안 하늘을 날아 뉴질랜드에 갈 때, 비행기는 불안정한 기류 때문에 흔들리기도 했다. 쫑찡이는 우리 아이 손바닥보다 조금 더 큰 몸집으로, 그 먼 곳에서 며칠 동안 쉬지 않고 군산으로 날아온다.

쫑찡이는 내 머리 위로 바짝 날만큼 대담하다. 그러나 헤엄치거나 잠수하지 못한다. 그래서 갯벌이나 염전에서 갯지렁이·조개·고둥·게를 잡아먹는다. 쫑찡이를 보면, 사막의 초원에서 (전설 속에서만) 산다는 은사자가 생각난다. 사자이면서 육식을 못하는 은사자, 수영을 못해서 물속의 날것들을 잡아먹지 못하는 쫑찡이, 이 둘은 닮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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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창오리들은 날아오를 때 대열을 벌렸다가 좁히면서도 서로 흩어지지 않는다. ⓒ 군산시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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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을 속을 나는 가창오리의 모습은 귀하고 아름답다. ⓒ 군산시청


아이가 보고 싶어 하는 가창오리 소식은 우리 집에서 보는 지역 신문이 알려준다. 얼마 전에는 가창오리의 군무사진이 머리기사로 실렸다. 그네들이 시차 적응을 끝내고 무리를 지어 날 즈음이면, 군산시는 세계철새축제를 한다. 축제에 붙은 ‘세계’라는 이름이 버거워 보여서  남편한테 물었다.

“어떻게 ‘세계’라는 말을 막 붙이냐?”
“철새는 세계 곳곳에서 오니까 ‘세계’를 붙인 거 아닐까?”

에베레스트를 오르는 등산가들은 눈 쌓인 능선에서 죽은 철새를 보기도 한다는 것을 읽은 적이 있다. 히말라야에서 부는 바람을 이기지 못해 그대로 추락한 새들은 비행하는 자세로 죽는다. 애초부터 정착할 고향이 없어 떠돌던 철새들은 만년설에 박혀 썩어서 사라지지도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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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창오리들이 모여 있는 강 위는 기다랗고 넓은, 검은 막이 생겨나 있다. 마치, 새로 솟아난 섬처럼 보인다. ⓒ 배지영


전 세계에 몇 십만 마리만 남은 가창오리가 겨울을 나러 오는 곳은 군산 나포 십자들녘이다. 그네들은 시베리아나 사할린에서 날아왔다. 가창오리들은 경계심이 많아서 사람들이 맨 눈으로 볼 수 없는 곳에서 지낸다. 십자들녘 너머, 가창오리들이 모여 있는 강 위는 기다랗고 넓은, 검은 막이 생겨나 있다. 마치, 새로 솟아난 섬처럼 보인다.

가창오리들은 날아오를 때 대열을 벌렸다가 좁히면서도 서로 흩어지지 않는다. 가끔은 무리에서 벗어나는 가창오리가 있는데, 그네들은 혹시 까마귀 떼를 본 게 아닐까. 텃새면서 머리가 좋은 편에 속하는 까마귀들은 가창오리의 군무를 돋보이게 한다. 까마귀들은 전깃줄에 앉았다가 들녘을 날 때는 각자 마음대로, 유쾌한 오합지졸을 보여준다.

철새축제 때는 조망대를 무료개방 한다. 우리는 조망대에서 새는 뼈가 비어 있고 가벼워서 하늘을 날 수 있다는 것, 깃털에서 기름 같은 게 계속 나와서 물이 스미지 않아 체온을 유지한다는 것, 물 속에 넣고 있는 다리는 몸보다 체온이 낮아서 시베리아에서도 추위를 이긴다는 것을 알았다. 무엇보다도 한데 뭉쳐 다니는 가창오리의 얼굴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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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갈수록 그네들의 군무를 보러 오는 사람들이 늘고 있지만 속내를 보여주지 않는다. 사람들이 추위와 기다림에 온 몸을 내놓은 채 야성을 찾도록 시킨다. ⓒ 군산시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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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의 일출처럼, 나포 십자 들녘의 가창오리 군무도 조상 3대가 쌓은 공덕이 필요한 지도 모른다. 선조들이 그랬던 것처럼,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도 덕은 쌓아야 한다. 지금 여기에서 더 파헤치지 않는 덕을... ⓒ 배지영


까만 점으로만 보이는 가창오리도 생김새가 있다. 특히, 수컷은 머리에 태극무늬가 있다. 그러나 ‘아이돌’을 보러 온 소녀 팬들처럼 “제발 얼굴만 보여주세요” 해도 가깝게 볼 기회는 드물다. 해가 떠 있을 때는 물 위에서 잠을 잔다. 언뜻 보면, 한 곳에만 머물러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가만가만 날개를 움직인다. 언제는 가창오리를 따라 익산 웅포까지 간 적도 있다.

해질녘이면 가창오리들은 달라진다. 무리를 지어 날 때 활력이 넘쳐 보인다. 처음에는 맛보기처럼 살짝만 날다가 강 위로 내려앉는다. 그 뒤로 오래 고요하다. 다시 날기를 기다리며 숨죽이고 있으면, 몸은 춥고 저리다가 몽롱하다. 아기 낳을 때 한 차례 산통이 지난 다음에 졸음이 쏟아지던 때 같다.

가창오리는 사람들과 거리를 두고 싶어 한다. 해가 갈수록 그네들의 군무를 보러 오는 사람들이 늘고 있지만 속내를 보여주지 않는다. 아무리 먼 곳에서 왔대도, 장래 꿈이 조류 학자래도, 웅장한 카메라 장비를 가져왔대도, 어디쯤에서 몇 시에 날 것인지 정보를 주지 않는다. 사람들이 추위와 기다림에 온 몸을 내놓은 채 야성을 찾도록 시킨다.

노을 속을 나는 가창오리의 모습은 귀하고 아름답다. 지리산의 일출처럼, 나포 십자들녘의 가창오리 군무도 조상 3대가 쌓은 공덕이 필요한지도 모른다. 선조들이 그랬던 것처럼,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도 덕은 쌓아야 한다. 그러나 거창하지 않아야 한다. 지금 여기에서, 더 파헤치지 않을수록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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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을이 지고 사람들이 돌아가면, 나포 십자들녘은 새들의 세상이 된다. ⓒ 배지영

덧붙이는 글 | <테마가 있는 나만의 여행>에 응모합니다.


덧붙이는 글 <테마가 있는 나만의 여행>에 응모합니다.
#가창오리 군무 #군산 십자들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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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면』 『소년의 레시피』 『남편의 레시피』 『범인은 바로 책이야』 『나는 진정한 열 살』 『내 꿈은 조퇴』 『나는 언제나 당신들의 지영이』 대한민국 도슨트 『군산』 『환상의 동네서점』 등을 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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