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산도 의사의 유언 '유리언걸지사 (流離焉乞之士;떠돌이 거지 지사)' 를 새긴 돌비석, 나무 비를 세워달라고 하였는데 돌비석이 섰다.
박도
내가 기산도 의사를 알게 된 것은 2003년 가을이었다. 나의 길 안내자인 동북아역사재단의 장세윤 연구위원이 한번 취재해 볼 만한 인물이라고 소개하였다.
그때 나는 <의를 좇는 사람들>이라는 주제로, 그런 인물을 찾아 <오마이뉴스>에 연재했다. 6월 항쟁의 불씨를 지핀 박종철씨 아버지 박정기 민주화운동가족협의회 이사장 대담에 이어, 백범 김구 선생 암살범 안두희를 10여 년간 추적 응징한 권중희 선생을 취재할 무렵이었다.
그 연재는 자그마한 파장을 일으켜 권 선생과 내가 미국 국립문서기록청까지 가는 계기가 되었다. 그때 나는 그 연재를 하면서 우리 백성들은 ‘의(義)’에 매우 굶주리거나 목말라 있다는 걸 느꼈다.
누리꾼의 제의로 성금을 모을 때, 단 이 주 만에 일천여 명이 4300만원을 보내주셨다. 한 누리꾼의 “망설이다가 일당을 보냅니다”라는 성금을 받고는 눈시울이 뜨거웠다.
우리의 현대사에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너무나 많았다.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가 본인은 물론 그 후손까지 작위를 이어가며 활개를 치고, 기울어져는 나라를 바로 세우겠다고 일어난 의병들을 일제는 ‘폭도’로 몰아 형장의 이슬로 보내거나, 해외로 망명의 길을 걷게 했다. 그리고 그 매국노의 후손들은 지금도 이 사회의 주류로 행세하는가 하면, 이와는 달리 폭도의 후손들은 아직도 대부분 가난하거나 역사의 그늘에서 살고 있다.
대한제국 군부대신이 을사늑약에 찬성, 그 공로로 이듬해 일본정부로부터 훈1등의 훈장을 받고 한일병탄 후에는 자작에 매국공채 5만원이란 큰돈을 은사금으로 받았다. 그러면서 애첩을 데리고 호의호식하는 걸 보는 백성들의 울분은 하늘을 찌를 듯하였다.
해방 후에도 마찬가지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이 대낮에 암살을 당했는데도 그 범인은 일 년 만에 형집행 정지로 풀려나 건설회사 부사장으로, 강원도에서 두 번째로 세금을 많이 내는 군납업자가 된 것을 보고는 울분을 참지 못해 곽태영, 권중희, 박기서 이런 분들이 ‘정의의 칼’을, ‘정의봉(몽둥이)’을 들고는 겨레의 이름으로 이들을 응징한 것이다.
문명사회에서, 법치국가에서, 사형(私刑)은 정당화 될 수 없다. 하지만 오죽하면 백성들이 정의의 자객으로 나섰겠는가. 이들이 휘두른 정의의 칼날에 백성들은 환호하고, 몇 십 년 묵은 체증을 ‘뻥’ 뚫은 양 통쾌해 했다.
나라를 지키는 데 가장 앞장 설 군부대신이 오히려 적의 주둔군사령관인 하세가와와 결의형제를 맺고, 침략의 원흉인 추밀원장인 이토 히로부미의 양아들로 거들먹거리는 그를 거의 ‘회 쳐놓다시피’ 온 몸을 쑤셔놓은 기산도 의사의 칼날은 민족정기가 살아있음을 보여준 장쾌한 의거였으리라.
"같은 깃의 새는 같이 모인다"나는 장세윤 연구위원으로부터 소개받은 기산도란 인물에 관심을 가졌지만 강원도와 전라남도 고흥과는 워낙 먼 거리요, 그 후손을 찾는 일도 만만치 않아 접어두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지난해 전라도 창평, 녹천(鹿川) 고광순(高光洵) 의병장 추모대제 때 고영준 선생을 만나 이런저런 얘기 끝에 기산도 의사를 만나고 싶다는 말을 하자, 바로 그분이 당신 대고모부라고 하지 않은가. 곧 기산도 의사는 녹천의 사위라고 했다. 그래, 나는 고 선생에게 길 안내를 부탁드린 바 있었다.
“같은 깃의 새는 같이 모인다”는 속담이나, 서로 같은 자끼리 패가 된다는 ‘유류상종(類類相從)’이란 고사 성어처럼 우리나라 항일명문가 혼맥(婚脈)을 보면 서로 얽혀 있었다. 특히 만주로 망명간 왕산(旺山), 석주(石洲), 일송(一松) 집안간은 사돈에 겹사돈으로, 동지에다 혈연으로, 똘똘 뭉쳐 있는 걸 본 적이 있었다. 백범 김구 선생과 안중근 의사간도 사돈 간이다. 백범 선생의 큰 자부(인의 부인) 안미생씨가 안중근 의사 동생 안정근 선생의 딸이다. 녹천 선생은 기산도의 의기(義氣) 하나만 보고 당신 사위로 삼았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