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테로 델 카스티요의 풍경쫓기듯 도망쳤던 성당의 첨탑이 멀어진다.
JH
바에서 날린 3유로보다는 당장 이 곳을 떠나는 것이 상책이라는 생각에 문을 박차고 나와 동네를 떠났다. 미친 듯이 걸었다. 마치 밀밭이 길을 가로막고 있는 것만 같았다. 겁도 없이 밀밭에 뛰어들어 가시나무 풀에 찔리며 내달리듯 걸었다.
왔던 길로 돌아가면 그 남자를 다시 만날 것 같아서 바들바들 떨었다. 웬 숲길에 뜬금없는 집 한 채와 세차 중인 남자가 보였다. “다음 마을인 이테로 데 라 베가로 가려면 어디로 가야 돼요?” “쭉 가면 나와” 그러나 이 남자도 믿을 수가 없었다. 그저 걷고 또 걸었다. 남자에게 풍겼던 지독한 스킨 냄새가 몸에 밴 것 같기만 하다. '빨리, 샤워를 하고 싶어.'
한 시간 여를 노란 화살표를 찾아 절박한 마음으로 도망치듯 걸은 걸음이었다. 다행스럽게 멀리서 짐을 짊어지고 길을 걷는 무리들을 발견했다. 순간 마음이 놓여 길이고 밭이고 구분도 없이 그들을 향해 걸어갔다.
“안녕! 너무 반가워!”
호들갑 떨듯 인사를 건네는 내가 얼마나 이상했을까? 나는 스페인과 독일인으로 구성된 네 사람의 일행에 끼어 더듬더듬 겪은 이야기를 풀어내기 시작했다. 처음 만나는 이들에게 뜬금없이 길을 잘못 들고 성매매(그것이었다!)의 유혹에 빠졌다가 되돌아온 이야기를 하자니 대체 내가 뭘 하는 건지, 여기는 어디인지…, 모든 것이 뒤죽박죽인 것만 같았다.
“결국, 아무 일도 없었던 거지? 그걸로 천만다행이네.”
주의 깊게 이야기를 듣던 남자는 나를 안심시키려는 듯이 말한다. 그러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일까? 육체적으로, 그것은 정말 아무 일도 아니었다. 그러나 정신적으로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상황에 처음으로 내맡겨진 셈이었다.
나는 ‘여성성’에 대하여 끊임없이 의문을 품어왔다. 여자라는 것은 무엇일까? 남자를 만나 그의 아내가 되어 살림을 꾸려가는 모습, 혹은 가족들의 뒷바라지에 자신을 버리고 희생하는 모습, ‘여자’라는 사람들은 ‘남자’, 혹은 ‘가족’이라는 단어가 없이는 성립되지 않는 것만 같았다. 나약하고 수동적이며 희생적이며 아름다운… 여자. 인류라는 장막 뒤의 비극의 주인공이자 하염없이 눈물짓는 것만이 그들이 가진 유일한 무기.
그것이 내가 가진 ‘여자’의 모습이었고, 나는 그런 ‘여자’가 되고 싶지 않았다. 아니, 그럴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 마음은 내게 있어 ‘여자아이들을 상징하는 것들의 반대’를 갖는 것으로 나타났다. 짧은 머리를 하고 남자에는 무심하다는 투로, 예쁘고 작은 것들에 대한 비하감으로 살아왔다.
패션잡지와 예쁜 치마에 열광하던 또래들을 마음 속으로 비웃으며 하이테크와 미니기기를 즐기는 나를 마치 우등한 것처럼 여겼다. 그러나 사실, 패션잡지 ‘신디 더 퍼키’와 파나소닉의 시디 플레이어 ‘CT-570'이 다를 것이 무엇인가.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을 끝없이 부정하던 내가 스페인 깡촌 마을에 떨어져서 ‘한번 해 주면 돈 줄게’라는 비밀스럽고 탐탁지 않은 거래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는 충격적인 현실 앞에서, 아무리 나만의 세계에서 ‘나는 여자가 싫어. 여자로 대접받는 것도 싫어. 모두 싫어. 그냥 나대로 살면 안 돼?’ 라고 생각해봤자 타인에게는 어쨌든 ‘조금 짧은 머리를 한 수수한 스타일의 여성’으로 보이고 있다는 현실과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썩 유쾌하지 않았다.
혼이 쏙 빠져 다음 마을인 ‘이테로 데 라 베가(Itero de la Vega)'에 닿았다. ‘이테로’라는 이름이 썩 내키지 않았다. 그러나 피로감이 몰려왔다. 더 이상은 걸을 수 없었다. 마음 같아선 당장 헬기라도 불러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러나 그렇게 할 수 없었다. 도착한 사설 숙소는 문이 활짝 열려 있었고 아무리 둘러봐도 인적 하나 없었다. 나가 있는 것이 맞는 것 같아 근처 작은 공원으로 발길을 돌렸다. 커다란 배낭을 옆에 두고 쉬고 있는 순례자가 보였다.
“안녕하세요? 혹시 오늘 여기서 묵을 예정인가요?”
“응. 가보니까 사람이 없어서 기다리고 있어.”
문득, 그녀에게 말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대로 예전처럼 기억들을 꿀꺽 삼키고 말면 그것들이 내 안에서 얼마나 요동을 칠 것인가, 하는 생각에 그녀 옆에 앉아 오늘 하루를 이야기했다. 여자는 열심히 들어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잘했어. 이럴 때엔 누군가에게 얘기하는 것이 아주 중요해. 그리고 다시는 이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해야지.”
그녀의 따뜻한 이야기가 고마웠다. 오스트리아에서 온 브리기테는 학교 선생님이었다. 우리는 곧 숙소로 돌아갔고, 2인실 방을 같이 쓰기로 하고 짐을 풀었다.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마음을 안정시켰다. 그러나 이미 한 번 휘저어진 마음 바닥의 먼지들이 부옇게 떠올라 그저 심란하기만한 하루다. 끝없이 글을 쓰며 마음을 가라앉히려 노력했다.
"왜 사람들이 이 구간을 버스로 지나는지 알겠다. 청결에 대한 개념도 심히 떨어지는 것 같고, 파리는 또 왜 이렇게 많아! 영어는 통할 기미가 안 보인다. 사람들도 이상하게 보인다. 먹을거리 사러 간 작은 바에 죽치고 있던 남자들은 왜 휘파람을 불지? 짜증 난다. 자꾸만 도망치고만 싶다. 최대한 빨리 이 지긋지긋한 메세타 지역을 벗어나고 싶다. 하루에 40킬로미터씩 끊어야 하나?
왜 어른들은 그렇게 술을 마시지? 미친 듯이 일하지? 그것 말고는 없나? 정말? 맨정신으로, 나를 제대로 맞닥뜨리고 사는 것이 괴로운 삶, 그래서 걷는다, 먹는다, 마신다, 잠든다…. 모르는 말로 시끄럽게 떠드는 사람들이 불안해지기 시작한 첫 날, 이 길이 갑자기 극도로 불안해지기 시작한 밤. 그렇지만 길 위에 서면 오로지 홀로 될 수 있을 테니, 오히려 이렇게 마을 안에 들어서는 것보다 길 위에서 더 힘이 나는 느낌이다. 초반엔 숙소가 천국이었는데, 이젠 길이 더 그립다(삶과 비슷한 듯싶다)."
남자 혼자서 꾸리는 숙소의 전쟁터 같은 부엌에서 저녁을 먹기 위해 치킨스프를 끓이며, 브리기테는 ‘이 집엔 여자가 필요하다’며 어쩔 줄 몰랐고, 나는 산더미처럼 쌓인 설거지거리와 손에 묻어나는 기름때, 뒹구는 빵조각을 바라보며 점심으로 이곳 식당에서 먹었던 메뉴가 떠올랐다. 차라리 모르고 말 것을…, 그렇지만 이것이 현실이었다. 아무리 아니라고 부정하고 벗어나려고 해도 한 낮의 밀밭 한가운데서 반갑지 않은 남자의 스킨 냄새에 치를 떨며 길을 찾아 달리던 나의 모습처럼.
미칠 듯이 단조로운 동네의 젊음은 탈출구를 찾지 못한 채 술로 밤을 지새우고, 나는 처음으로 귀마개를 꺼내 귀에 틀어막고 눈을 질끈 감는다. 푹신한 1층 침대에 누워도, 잠이 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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