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후보들은 밥맛을 알까요?

우리집 밥도둑은 밥

등록 2007.12.17 14:23수정 2007.12.17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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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밥
송성영

마당에 보란 듯이 아궁이 불 지필 땔감을 한 지게 턱 하니 풀어 놉니다. 가쁜 호흡을 가다듬어가며 냉수를 마십니다.


"어 시원허다! 엄청 많이 해왔지?"
"그러네…."


늘 일손을 놓지 않고 생활하는 아내의 대답이 시원찮습니다. 썩어 나자빠진 볼품없는 땔나무들이다 보니 같잖아 보이는 모양입니다.

"저래 뵈두 저거 엄청 힘들어, 한번 져 볼텨?"
"어휴, 장하셔…. 괜히 자랑하려구 그러지."
"그려 머슴 힘자랑 줌 허믄 안 돼냐."
"밥이나 드셔."


아내는 기분 좋게 웃으며 앞장서 부엌으로 들어섭니다. 밥상에는 김장김치와 구운 김, 마늘대공 저린 반찬이 놓여 있고 밥그릇에서는 김이 모락모락 오릅니다.

밥이 꿀맛입니다. 단지 땀 흘려 일했기에 그런 것이 아닙니다. 밥에서 향기가 납니다. 아주 어렸을 때 어쩌다 먹어보았던 쌀밥에서 나는 그런 아득한 밥 향기입니다.


"아, 맛있다. 진짜루 맛있지 잉."
"밥만 먹어도 맛있어."


아내는 요즘 정량에서 반 공기를 더 먹습니다. 반찬이 따로 없습니다. 반찬은 그냥 간만 맞으면 됩니다. 밥이 반찬입니다. 게장이다 뭐다가 밥도둑이라지만 요즘 우리 집에서는 밥이 밥도둑입니다. 정말 맛있습니다.


우리 집 밥은 우리 손으로 직접 농사지은 쌀입니다. 쌀농사라 해봤자 밭농사보다도 턱없이 적은 한 마지기 반에 불과하지만 수많은 사람들의 땀방울이 섞여 있습니다.

 볍씨를 틔우고 모를 키우기 까지는 아랫집 유씨할아버지가 도와주셨다
볍씨를 틔우고 모를 키우기 까지는 아랫집 유씨할아버지가 도와주셨다송성영

볍씨를 틔워 모를 키울 때까지 아랫집 유씨 할아버지가 도와 주셨고 논바닥에 뿌렸던 유기농 거름은 전북 부안에서 조은이네 아빠가 무상 제공해 주었습니다. 모내기할 때는 생명평화 마중물 모임 식구들인 강산이 아빠, 승규네 아빠, 그리고 효린이 아빠가 손모내기를 도왔습니다.

 모를 심기 전에 물꼬를 대고 논을 썰었다
모를 심기 전에 물꼬를 대고 논을 썰었다송성영

어디 그뿐인가요. 아내와 둘이 짬짬이 사흘에 걸쳐 모내기를 하다가 우리 집 큰놈네 반 아이들을 끌어들이기로 작정했습니다. 아이들은 물론이고 담임선생님 역시 현장학습거리라 하여 아주 좋아했습니다. 일손이 달리니까 애들 부려 먹는 거 아니냐는 눈총을 주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건 오해입니다. 모 심는 기계로 몇 차례 왔다 갔다 하면 그만입니다. 사실 그 기계 빌리는 비용보다 간식거리가 더 많이 들었습니다.

 우리집 큰 놈, 인효네 반 아이들과 함께 모내기를 했다
우리집 큰 놈, 인효네 반 아이들과 함께 모내기를 했다송성영

하지만 아이들의 즐거움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이들이 즐거우니 우리 또한 즐거웠습니다. 시골 아이들이라지만 다들 손모내기는 처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녀석들에게 질퍽거리는 논바닥은 놀이터였습니다. 서로 얼굴에 논흙을 묻혀 가며 자빠지고 뒹굴고 야단법석이었습니다. 모 줄도 삐뚤빼뚤, 제대로 심지 않아 모들이 물 위에 둥둥 떠다녔습니다. 하여 나중에 다시 심어야 하는 모들이 꽤 많았습니다.

 모내기 보다 장난치는데 더 정신이 팔린 인효 친구들
모내기 보다 장난치는데 더 정신이 팔린 인효 친구들송성영

그런데 볍씨를 넉넉하게 키우지 못해 모가 많이 부족했습니다. 이때도 도움의 손길이 있었습니다. 동네 형님인 선우 외삼촌이 이 논 저 논 구석에 남아 뒹굴고 있는 모를 권해 줬습니다. 그래서 우리 벼는 그 품종을 알 수 없는 여러 가지 종이 섞여 있습니다. 아마 4가지 품종쯤 섞여 있을 것입니다. 하물며 동네 형님이 건네준 찰벼까지 섞여 있으니까요.

 모가 부족해 찰벼를 비롯,여러 논에서 4가지 이상의 벼품종을 얻어 심었다.
모가 부족해 찰벼를 비롯,여러 논에서 4가지 이상의 벼품종을 얻어 심었다. 송성영

그렇게 우리 밥은 벼 품종뿐만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의 기분 좋은 손길로 밥상에 오른 것입니다. 좋은 사람들의 기운에 제초제며 화학비료조차 주지 않은 누런 벼 논에 수많은 메뚜기들이 찾아든 쌀이었으니 얼마나 맛이 있겠습니까?

 농약은 물론 화학비료조차 주지 않은 논에 수많은 메뚜기들이 찾아 들었다.
농약은 물론 화학비료조차 주지 않은 논에 수많은 메뚜기들이 찾아 들었다. 송성영

거기다가 또 얼마 전에는 가정용 정미기까지 구입했습니다. 새것은 백이십만원 정도 하여 삼십오만원짜리 중고 정미기를 구입했습니다. 내년 논농사를 두어 마지기 더 늘리기 위해서입니다. 정미기는 그때그때 쌀을 쪄서 채소꾸러미에 덧붙여 판매하고자 작정하고 구입한 것입니다.

중고 정미기라고는 하지만 벼를 부으면 자동으로 끌어올려 주고 또 돌까지 골라줍니다. 현미며 이번에 알게 된 오분도 쌀이며 원하는 대로 쌀이 나옵니다. 쌀눈이 붙은 채로 쏟아져 나옵니다. 참으로 신기하기만 합니다. 쌀겨는 닭 모이로 주고 왕겨는 양파밭에 덮어줍니다. 정미기가 있으니 버릴 게 하나도 없습니다.

 중고 가정용 정미기를 구입했다. 쌀겨며 왕겨며 버릴 것이 하나도 없다.
중고 가정용 정미기를 구입했다. 쌀겨며 왕겨며 버릴 것이 하나도 없다. 송성영

그렇게 정미기를 이용해 즉석에서 필요한 만큼 져서 곧바로 밥해 먹으니 밥맛이 얼마나 기가 막히겠습니까? 밥이 밥도둑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겠습니까?

누가 찾아오면 밥맛 자랑하다가 좀 퍼주고 또 고마운 얼굴들 떠올려지면 여기 쪼금, 저기 쪼금 택배로 보냅니다. 따져 보지 않았지만 그 양이 적다 보니 쌀값보다 택배 값이 더 많이 들었는지도 모릅니다.

천수답 물꼬 때문에 고생한 것이며 이것저것 경제성을 따진다면 논바닥에 들어간 것의 반도 건질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도 즐겁습니다. 그 즐거움을 어떻게 돈으로 환산할 수 있겠습니까?

주변 사람들 중에 아직도 우리 쌀 맛을 못 분들이 많습니다. 아, 깜빡할 뻔했네요. 모내기를 했던 큰 놈네 학교 반 녀석과 애초에 약속한 대로 떡도 쪄 줘야 합니다. 모두가 즐거운 일들입니다. 우리가 가진 것이 넉넉했다면 이런 즐거움은 상상도 못했을 것입니다. 많이 가진 사람이 밥 한 공기며 떡 몇 쪼가리에 만족할 수 있겠습니까?

밥을 다 먹고 우리 집 큰놈, 작은놈이 자리에서 일어납니다. 작은 녀석은 두 그릇이나 비웠습니다. 가만히 보니 녀석들 밥그릇에 밥알 몇 개가 굴러다닙니다.

"짜식들이, 다 먹어야지, 니들이 농사지은 건데, 고맙게 잘 먹고 되돌려 줘야지."

녀석들은 눈만 꿈뻑거립니다. "뭘 돌려줘?" 그런 표정입니다.

"하늘과 땅에서 얻었으니 다시 하늘과 땅으로 돌려 줘야지, 거기서 얻은 밥알 하나라도 버리지 않고 먹어서 기운이 생기면 그걸 좋은 마음으로 세상에 다시 돌려줘야 하는 겨, 그래야만 니들에게 다시 하늘과 땅이 밥을 주지…."

나는 사이비 교주처럼 우쭐거리며 일장 연설을 합니다. 그러다가 문득 혹시나 싶어 내 밥그릇을 봅니다. 내 밥그릇에도 밥알이 남아 있습니다. 슬그머니 한 알을 떼어먹습니다. 그런데 또 한 알이 더 있습니다. 아이들이 묘한 표정으로 봅니다. 심각했던 나 자신을 봅니다.

"얼래? 또 있는디? … 두울, 반쪼가리 밥알까지 셋, 아빠 밥그릇에도 밥알이 세 개나 남아있네…."

나는 머쓱하니 입을 닫습니다. 일찍이 장일순 선생께서 나락 한 알에도 우주가 담겨 있다고 했듯이 분명 밥은 모든 것을 담아내는 우주입니다. 하늘입니다. 밥맛은 바로 하늘과 땅의 맛입니다. 또한 밥맛은 좋은 사람들의 맛이고 그들의 마음입니다. 하늘과 땅과 더불어 먹을거리를 만들어 냈으니 사람도 하늘이며 땅이 아니겠습니까?

 쌀 한톨에도 우주가 담겨 있다고 한다.
쌀 한톨에도 우주가 담겨 있다고 한다.송성영

좀 더 많이 먹고자 한다면 밥 한 공기는 눈에 보이지도 않을 것입니다. 밥이 얼마나 맛있는 ‘반찬’인지를 모를 것입니다. 그걸 모르기에 온갖 반찬으로 배불리 먹고 또 먹어야만 직성이 풀릴 것입니다. 아니, 그래도 직성이 풀리지 않을 것입니다. 아귀처럼 끊임없이 먹어대야 합니다. 맛있어서 먹는 것이 아닙니다. 탐욕으로 먹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밥그릇까지 탐냅니다. 급기야 빼앗아 먹기까지 합니다. 그야말로 진짜 밥도둑놈입니다.

대통령 선거가 내일모레입니다. 나라를 이끌어갈 지도자 역시 마찬가지라고 봅니다. 하늘과 땅을 강탈하여 국민들을 상대로 사기 쳐가며 닥치는 대로 많이 먹는 세상을 꿈꾸는 인간말종이 아니라, 하늘과 땅과 더불어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밥 한 그릇 뱃속 편하게 먹고 살 수 있는 세상, 그런 세상을 꿈꾸는 사람이 나라를 이끌어가야 할 것입니다.

백주대낮에 술주정 부리는 것도 아니고 대국민 사기극을 벌이는 정신 나간 후보야 말할 가치도 없고, 대통령 후보들 중에 '진짜 밥맛'을 아는 사람이 있을까요? 투표하는 날 기분 좋게 밥 한 그릇 비우고, 밥의 소중함을 아는 그런 후보를 찍을랍니다.
#밥도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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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살리고 사람을 살릴수 있을 것이라 믿고 있는 적게 벌어 적게 먹고 행복할 수 있는 길을 평생 화두로 삼고 있음. 수필집 '거봐,비우니까 채워지잖아' '촌놈, 쉼표를 찍다' '모두가 기적 같은 일' 인도여행기 '끈 풀린 개처럼 혼자서 가라' '여행자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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