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리온 순례자숙소시원한 레몬수 한 잔과 따뜻한 온정의 기억으로 남은 곳
JH
잿빛 수도복을 입은 수녀님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방금 도착한 순례자들에게 레몬향 나는 시원한 음료수를 권하던 곳, 순례자들이 둘러앉아 함께 영적인 나눔 시간을 갖는 프로그램이 있는 곳, 그러나 부엌에는 달랑 전자레인지뿐인 곳. 소라씨와 나는 다른 곳을 향할지 이곳에 짐을 풀지를 두고 고심하다 그대로 주저앉았다. 천주교 신자인 나를 위해 그가 배려한 것이었다. “언니가 좋은 경험을 할 수 있을 것 같아서요” 그녀의 마음이 고마웠다.
짐을 풀고 샤워와 빨래를 마친 후 마을로 나와 오래된 약국에서 햇빛에 익은 피부에 좋다는 알로에 젤과 ‘콤피(Compeed)'라고 불리는 물집보호 밴드를 사고 상점으로 향했다. 오래간만에 카트를 끌 수 있는 큰 상점이 반가웠다. 이것저것을 살펴보며 한참을 고민하다 아차, 전자레인지밖에 쓸 수 없죠, 우리의 신세를 깨닫고 전자레인지에 데울 수 있는 인스턴트 라자냐와 닭 들어간 쌀밥을 고르며 마음 속으로 눈물을 삼켰다. 어젯밤의 상상과는 너무나 다른 모습이었다.
돌아온 숙소에서 한바탕 전쟁을 치르며 식사를 마치고 쉬었다. 숙소에서 알려준 순례자 모임 시간이 가까워졌다. “강요는 아니에요. 시간이 되면 함께 할 수 있다면 좋은 시간이 될 거예요”, 수녀님의 목소리가 기억났다. 피곤하기도 하고 귀찮기도 한 마음에 뭉그적거리다 1층 로비로 내려갔다. 거실과 계단에까지 가득 찬 순례자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마땅히 앉을 자리가 없어 바닥에 앉았지만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기타와 클라리넷, 리코더를 닮은 피리를 불며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하는 수녀님들과 봉사자들의 모습이 참 아름다웠다. ‘삶에는 기쁨과 즐거움만큼 아픔과 슬픔이 함께 해’, 삶에 감사하고 또 하느님께 감사하는 노래들을 함께 부르며…. 나는 고개를 끄덕거리고 박자에 맞춰 소심한 박수를 치며 시간 속에 녹아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