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녀‘안’평등”이라 자꾸 쓰이는 ‘그녀’

[우리 말에 마음쓰기 175] ‘그녀’ 걸러내기 (3) 그녀 → 한국 여학생

등록 2007.12.28 14:49수정 2007.12.28 1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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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ㆍ일 전쟁 무렵, 나는 하얼빈에서 꽤 많은 한국 여학생들과 함께 여학교를 다녔다. 그때 그녀들은 식민지 정책 때문에 성과 이름마저 바뀐 채 ..  <이응노ㆍ박인경ㆍ도미야마/이원혜 옮김-이응노―서울ㆍ파리ㆍ도쿄>(삼성미술문화재단,1994) 5쪽

 

일본책에는 틀림없이 ‘彼女’로 적었을 테지요. 이렇게 적힌 글을 한국말로 옮기는 분은 딱히 더 생각하지 않고 ‘그녀’로 적었을 테고요. 세상사람들이 두루 ‘그녀’라는 말을 쓰는 오늘날이기 때문에, 번역하는 사람이든 창작하는 사람이든 ‘그녀’라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씁니다. 아니, 문학맛을 한껏 살려 주는 말이라고 느끼며 일부러 더 자주 쓰기도 합니다.

 

 ┌ 꽤 많은 한국 여학생들과 함께
 │
 ├ 그녀들은 성과 이름마저 바뀐 채
 │→ 그 여학생들은 성과 이름마저 바뀐 채
 │→ 그 학생들은 성과 이름마저 바뀐 채
 │→ 한국 학생들은 성과 이름마저 바뀐 채
 └ …

 

보기글에서는 ‘한국 여학생’으로 적어야 알맞습니다. 앞에서 ‘한국 여학생’으로 적은 말이 길다고 느껴지면 ‘여학생’이라고 하면 됩니다. ‘여-’라는 말을 덜고 ‘학생’으로 써도 좋습니다. ‘한국 학생’으로 밝혀도 좋고요.

 

하지만 이처럼 안 쓰는 우리들입니다. “그 한국 여학생”, “그 한국 학생”, “그 학생” 가운데 하나로 쓰면 되는데, 이렇게 쓰는 사람 보기가 아주 어렵습니다. 이도 저도 아닌 ‘그녀’뿐입니다. 이 낱말 하나면 어디에서든 다 말이 되고 술술 이어진다고 느끼는구나 싶습니다.

 

“한국 남학생”을 이야기하는 자리였다면 “그들은”으로 쓸까요? 그럴 테지요. 아무렴. 그러면 남학생과 여학생은 어떻게 다를까요. 둘 모두 똑같은 ‘사람’이 아닐는지요. 우리 말 문화와 역사를 살피면, 남자라고 해서, 또 여자라고 해서 따로 나누어서 가리키지 않았습니다. 둘을 똑같이 가리킬 뿐입니다. “그 남학생”과 “그 여학생”으로 가리키기도 하지만, 딱히 남자와 여자임을 밝히지 않아도 되는 자리라면(보기글처럼) “그 학생들”이라고만 했어요.

 

‘여교사-여직원-여기사-여사장’ 같은 말이 남자와 여자를 갈라놓고 푸대접하는 말이라고들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말하는 사람 가운데 어느 누구도 ‘그녀’를 ‘사람을 가리키는 자리’에서 따로 뚝 떼어놓고 써도 무어라 토를 달지 않습니다. 남자이든 여자이든 ‘교사-직원-기사-사장’이잖아요. 남자이든 여자이든, 대이름씨로 가리키는 자리에는 똑같이 ‘그’ 하나일 뿐이에요. 보기글에서는 학생이 남자이든 여자이든 똑같이 ‘학생’일 뿐이고요.

 

말에는 우리들 생각과 삶과 문화를 고이 담습니다. 지금처럼 ‘그녀’ 말씀씀이가 부쩍 늘기만 하고 줄거나 사라지지 않는 까닭 가운데 하나는, 남녀평등을 외치면서도 정작 남녀평등보다는 남녀‘안’평등으로 자리잡기를 바라는 마음이 깊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지 싶어요. 서로를 똑같은 ‘사람’으로 느끼거나 생각한다면, ‘그녀’ 말씀씀이도 쫓아낼 일입니다. 이 말투가 일본 식민지 말투임을 떠나서도 말입니다.

덧붙이는 글 | 인터넷방 <함께살기 http://hbooks.cyworld.com> 나들이를 하시면 여러 가지 우리 말 이야기를 찾아보실 수 있습니다~

2007.12.28 14:49 ⓒ 2007 OhmyNews
덧붙이는 글 인터넷방 <함께살기 http://hbooks.cyworld.com> 나들이를 하시면 여러 가지 우리 말 이야기를 찾아보실 수 있습니다~
#우리말 #우리 말 #그녀 #우리 말에 마음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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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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