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주 시인의 <사상의 거처>를 읽으며

등록 2007.12.30 16:21수정 2007.12.30 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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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의 거처 ⓒ 창작과 비평사

사상의 거처 ⓒ 창작과 비평사

김남주 시를 접할 때마다 독자는 통렬함을 느낀다. 시어(詩語) 하나 하나는 화살처럼 우리 심장에 꽂힌다. 김남주 시어는 책상머리에서 사유로 만들어 낸 말이 아니기 때문에 쉽게 읽혀지지만 삶을 동반했기에 독자가 자신의 삶에 적용하기에는 벅차다. 그리고 부담스럽다.

 

그가 삶은 삶을 흔적을 보면 <사상의 거처>를 발문한 김윤태가 말한대로 '온몸을 온몸으로 밀고 나간 시대'의 선지자다. 말로서는 자기 몸을 바치는 거룩한 희생을 요구하지만 자신을 던져 사회변혁의 과제와 성취를 이룩하는 이는 많지 않다.

 

하지만 그는 온몸으로 혁명을 꿈꾸었고, 해방전사로서 시인의 삶을 살았다. 해방전사와 혁명 투쟁을 위하여 살았기에 그가 쓴 시어는 민중의 삶을 짓밟는 자를 역설과 촌철살인같은 표현을 통하여 통렬한 비판을 했다.

 

  바로 걷는 자와 함께 까막소에 넣었다
  바로 걷는 자의 가족 중 관직에 있는 자는 쫓아냈고
  그 자손들은 영원히 공직에 오르지 못하게 했다
  그 당시에도 오늘날과 같은 사법제도가 있었는바
  판사는 검사의 사돈지간이었고
  검사는 판사의 사돈지간이었다

  그 무렵에 성이 어(漁)가이고 이름이 무적(無跡)이란 자가 있었다
  성 그대로 이름 그대로 그는 바르게 걷거나 거꾸로 걷거나
  물고기처럼 뒤에 자취를 남기지 않는 신출귀몰한 재주를 가졌으니
  그는 그 재주를 믿고 할 소리 못할 소리 죄다 하고 다녔다
  그 소리들 중에서 한두 개를 골라잡아 여기에 적어 보자면 다음과 같다

  그놈이 그놈이고 그놈이 그놈이여
  정가가 최가이고 최가가 이가이고 이가가 경가이고
  성과 이름만 바꿔치기했단 말이여
  아니 무신정권 수십 년에 날강도 아닌 놈이 있었던가

  사기군 협잡꾼 정상모리배 아닌 놈이 있었던가
  왕궁이란 게 원래 음모의 토굴이라는 것은 세상이 다 아는 일이고
  관가에 들락날락하는 놈치고 쥐새끼 아닌 놈이 없는 법이여
  보라고 저 쥐새끼들의 피묻은 주둥아리를
  그 주둥아리가 물고 있는 나락모가지를 그것은 다름아니고
  우리 백성들이 불볕에 땀흘려 키워놓은 바로 그 나락 모가지나니
  오 모가지여 모가지여 피묻은 나락모가지여
  그 모가지 언젠가 어느 날엔가는 왕의 모가지를 감을 밧줄이여

 

   - 모가지여 모가지여 부분

 

 그가 살았던 시대, 아니 인간의 역사는 분명 정의와 바르게 사는 자들보다는 그릇된 자와 불의한 자가 지배하는 역사였다. 검사와 판사가 사돈지간이 되는 웃음 나오는 일이지만 현실이 되어버린 현상을 그는 고통스럽게 외치고 있다. 인민 모가지에 피묻은 밧줄을 감아버리고 그들만의 세상을 꿈꾸었다.

 

하지만 인민를 피를 뽑아내어 자신의 배를 가득 채우는 자들은 분명 인민에게 파멸되라는 확신을 가졌다. 역사의 반전을 믿었다. 그 모가지가 언젠가 어느 날엔가는 왕의 모가지에 밧줄을 감으리란 역사의 반전을 기대하고 있다. 정의와 공의가 승리하라는 역설의 반전을 그는 기대하고 있다.

 

하지만 <사상의 거처>에는 혁명과 투쟁만을 노래하지 않고 있다. 옥중 생활에서는 적대자와 투쟁에만 머물렀지만 출옥을 통하여 그는 다양한 인간이 살아가는 현장을 목격헸으리라. 흑과 백만이 존재하는 세상이 아님을 느꼈으리라.

 

   할머니는 산그늘에 앉아 막대기로 참깨를 털고 
   어머니는 따가운 햇살 등에 받으며 호미로 고추밭을 매고 
   아버지는 이랴 자랴 소를 몰아 논수밭에서 쟁기질을 하고 
   나는 나는 학교 갔다 와서 산에 들에 나가 
   망태 메고 꼴을 베기도 하고 염소를 먹이기도 했지요 
   나는 보고는 했지요   어린 시절에 
   할머니가 개를 터다 말고 막대기를 훼훼 저어 
   메밀밭을 해치는 산짐승을 쫓는 시늉을 하는 것을 
   나는 보고는 했지요 어린 시절에 
   어머니가 김을 매시다 말고 사금파리를 주워 
   고추잎에 붙은 진딧물을 긁어내는 것을 
   나는 보고는 했지요 어린 시절에 
   아버지가 쟁기질을 잠시 멈추시고 꼬챙이를 깎아 
   황소 뒷다리에 붙은 진드기를 떼어내는 것을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내 시에는 
   그 시절 우리 식구들이 미워했던 것들--- 
   산짐승 진딧물 진드기 같은 것이 자주 나오지요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내 시에는 
   그런 것들을 내치느라 일손을 잠시 놓으시고 
   우리 식구들이 대신 들었던 것들--- 
   막대기 사금파리 꼬챙이 같은 것이 많이 나오지요

 

    -시에 대하여

 

할머니와 아버지, 어머니가 농부로서 살아가는 일상을 그리고 있다. 그들에게는 투쟁과 적대세력이 없다. 소와 염소와 사람이 함께 어울려 사는 세상이다. 꼴을 베어 염소를 먹이는 모습에는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일과는 대비된다. 사람이 염소 꼴을 벤다. 아버지는 황소 뒷다리에 묻은 진딧물을 잡는다. 아버지와 황소는 하나가 된다. 사람이 이익을 위하여 사람을 적으로 삼는 것과 대비된다.

 

김남주에게 시란 결국 사람이다. 그 사람은 가지기를 탐하는 자가 아니다. 이익을 위하여 다른 사람 것을 탐하거나 빼앗는 자는 사람이 아니다. 사람이란 함께 어울려 사는 자를 말한다. 황소 뒷다리 진딧물을 사람이면서도 떼어내는 자가 사람이다.

 

시대는 김남주 시인이 살았던 상황과는 분명 다르다. 계급투쟁과 혁명투쟁만이 최고 진리는 아니다. 다양성 시대다. 이제 시는 인민의 삶과 이념을 함께 아우리는 시어로 표현되어야 한다. 더 새롭고 더 다양하게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사람이 삶을 살아가는데 재물과 권력만을 탐하면서 살아가는 것은 비극이다.

 

  조상 대대로 토지 없는 농사꾼이었다가 
  꼴머슴에서 상머슴까지 
  열 살 스무 살까지 남의 집 머슴살이었다가 
  한 때는 또 뜬세상 구름이었다가 
  에헤라 바다에서 또 십년 배 없는 뱃놈이었다가 
  도시의 굴뚝 청소부였다가 
  공장의 시다였다가 현장의 인부였다가 
  이제는 돌아와 고향에 
  황토산 그늘에 쉬어 얹은 나그네여 
  나는 안다 그대 젊은 시절의 꿈을 
  그것은 아주 작은 것이었으니 
  보습 대일 서너 마지기 논배미였다
  어기여차 노 저어 바다의 고기 낚으러 가자 
  통통배 한 척이었고 
  풍만한 가슴에 푸짐한 엉덩판 
  싸리울 너머 이웃집 처녀의 넉넉한 웃음이었다 

  그것으로 그대는 족했다  

  그것으로 그대는 행복했다

 

  십 년 만에 고향에 돌아와서도 
  선뜻 강 건너 마을로 들어서지 못하고 
  바위산 그늘에 쉬어 앉은 나그네여


  -나그네여

 

내가 어떤 삶을 살았던지 나는 결국 나그네다. 머슴살이, 굴뚝청소부, 현장 인부로 살았을 지라도 나는 나그네 인생을 산 것이다. 가진 것, 권력이 없어 고향에 들어가지 못하고 바위산 그늘에 앉아 버린 나그네이지만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멋진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지 모를 일이다. 모든 것을 다 가진 자라고 해도 고향을 바라보면서 그늘에 앉은 이 나그네와 무슨 차이가 있을까?

 

하지만 이런 말은 신세 한탄이 아니다. 그저 그렇게 살아가는 인생살이를 찬양함도 아니다. 그는 사람을 노래하면서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꿈꾸면서 살았다. 나그네 인생이란 곧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아니라 다른 이와 함께 사는 세상을 꿈꾸는 자를 말한다.

덧붙이는 글 | 사상의 거처 ㅣ 김남주 ㅣ 창작과 비평사 ㅣ 1991년 12월 5일 ㅣ 2,550원

2007.12.30 16:21 ⓒ 2007 OhmyNews
덧붙이는 글 사상의 거처 ㅣ 김남주 ㅣ 창작과 비평사 ㅣ 1991년 12월 5일 ㅣ 2,550원

사상의 거처

김남주 지음,
창비, 1991


#김남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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