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나운서라구요? 몰라봐서 미안해요

'아나테이너'라는 공멸의 덫

등록 2008.01.10 16:05수정 2008.01.10 1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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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아나운서가 사석에서 이런 말을 했다. 어느 모임에 갔는데 어디에 근무하느냐고 묻더란다. 그래서 방송국에 근무한다고 했더니 사무직 직원이냐고 물었다고 한다. 아나운서라고 말한 것은 당연지사. 그런데 그 묻는 사람이 당혹해하면서 미안하다고 했다고 한다.

 

도대체 그 상황에서 그 사람은 왜 미안하다고 했을까? 아나운서인 줄 몰라보아서 미안했을까, 아니면 뜨지 않아 속상한 데 거기에 더 상처를 주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일까. 그 아나운서는 왜 그 상황에서 미안하다고 말했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만약 그가 이른바 '뜬' 아나운서라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면 미안하다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사실 그 아나운서는 가족부터 친구, 친지에 이르기까지 언제 뜨느냐는 질문 공세에 시달린다고 했고 이제는 이력이 났다고 했다. 

 

아나운서는 떠야 존재 의미가 있는 것일까? 물어본 사람의 탓만은 아니다. 각종 매체에서 '아나테이너'에 대한 주목이 클수록 좌절하거나 열패감에 시달리는 아나운서는 많아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 간단한 에피소드에는 아나운서를 둘러싼 대중심리나 담론의 핵심이 들어 있다. 직위에 상관없이 1인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우리 사회 성공학의 이면도 함축하고 있다. 조직 안의 존재인가, 조직에서 독립한 존재인가라는 조금은 무거운 주제의 핵심을 내포하기도 한다.

 

무엇보다 아나운서는 이도 저도 어쩔 수 없는 보이지 않는 덫에 걸렸다. 우선, 아나운서는 '스타'라는 환상이다. 한편으로 아나운서 관리자들은 타사와의 보이지 않는 경쟁의 덫에 이미 움직일 수 없다.

 

그런 가운데 아나운서 조직은 와해되고, 아나운서는 아나운서대로 소모품이 되어가고 있다. 그들은 끊임없이 교체되는 부품과 같다. 모두 거대해지고 있는 아나운서 상품화 공장의 나사와 볼트가 되어간다.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은 감시의 사슬에 얽히고 인터넷의 상품이 된다. 그 가운데 이득을 보는 이들은 따로 있기 마련이다. 논의의 초점이 아나운서나 해당 방송사 아나운서실이나 국에만 맞추어져서는 곤란할 할 것이다.

 

영화 <뷰티플 마인드>를 보면 존 내쉬는 200여년 된 아담스미스의 이론을 뒤집은 거번 다이내믹스(Govern Dynamics)이론을 착상한다. 그 착상은 호프집에서 남녀 간의 작업(?) 구도에서 얻는다. 그 핵심은 치열한 경쟁은 전체적인 이득의 증가를 낳겠지만, 그 경쟁에 전체를 생각하지 않을 때는 이익은커녕 오히려 소모로 손해만 줄 뿐이다.

 

근래에 아나운서가 최고의 주목이 되는 대상이 되는 이유는 최고 스타의 반열에 올라갈 가능성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스타'는 독립과 자유 그리고 부와 명예를 상징한다. 아나운서나 아나운서 직(職)에 대한 관심이 아니라 그 이후에 더 관심이 많은 것이다.

 

조직 구성원은 단일한 수평적인 구성원에 불가하지만 유명/무명이라는 도식으로 판단하게 되면 조직 구성원과 그 안의 구조 그리고 개인의 업무는 별로 중요하지 않게 된다. 아나운서는 더 이상 단순히 직장인, 조직 구성원으로 남아 있으면 무능력자가 된 듯싶다.

 

하지만 아나운서에 주목할수록 뜨지 못하는 아나운서에 대한 열패감은 크게 이어진다. 아나운서가 맡고 있는 일에 대한 관심은 뒷전이고, 그들이 떴는가에 초점이 맞추어지기 때문이다. 아무리 프로그램을 잘 진행하고, 정보를 정확하게 전달해도 뜨지 않으면 의미가 없는 존재인 것으로 강박 된다.

 

뜨고, 뜨지 못한 존재라는 구분은 조직의 기본이나 원칙도 무너뜨리게 된다. 예컨대, 스타 아나운서는 어떠한 일을 하여도 용서가 된다. 이른바 '싸가지'가 없어도 예외가 된다. '떴으니' 건드리지 못하는 존재가 된다. 이러한 면에서라도 조직의 구속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떠야 한다. 여기에 조직의 일관성과 안정성도 훼손된다.

 

그러나 이른바 '떴다'는 아나운서 대부분은 사상누각인 경우가 많다. 즉 거품이 많은 것이다. 근본적으로 조직이 주는 혜택을 생각하지 않고, 모든 좋은 결과를 자신의 능력으로 돌리는 치명적인 한계를 보이기도 한다. 예컨대 방송국의 채널 파워 때문에 대중에게 알려진 것이지, 그 개인 자체가 스스로 알려진 것은 아니다. 그 채널 파워가 없다면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많은 아나운서가 프리선언 이후에 그러한 전철을 밟고 있다.

 

무엇보다 스타 아나운서 상품화 시스템은 스스로 생명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스스로 스타 아나운서 이미지들을 만들어낸다. 그 이미지들이 과연 실체가 있는 것인지 의심이 드는 경우가 많다. 요즘 인기 있는 아나운서 대부분은 방송과 연예 미디어 특히 포털이 만들어낸 허상이다.

 

자본주의체제는 인간이 만들어냈지만 인간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스스로 생명력을 가진다. 자신을 만들어낸 인간을 오히려 자신의 생명력을 위한 자원으로 소모한다. 인간과 기계의 관계, 인간이 지니는 기계에 대한 두려움도 이와 같을 것이다.

 

영화 <매트릭스>나 <터미네이터>의 핵심적인 심리는 인간이 만들어낸 기계가 스스로 자의식을 가지면서 인간을 위협하는 상황에 대한 공포다. 비약일지는 모르지만, 아나운서를 둘러싼 상품화 구조도 마찬가지일지 모른다.

 

처음에는 스타인 아나운서 때문에 아나운서 담론체계가 등장했지만, 이제는 아나운서 상품화 시스템이 아나운서를 인위적으로 소모하며 생명을 유지하려 한다. 특정 아나운서가 유명하지 않아도 항상 상품화시킨다. 특히 관련 미디어 체계에 종속시키도록 만든다.

 

한편으로, 아나운서를 둘러싼 조직인과 비조직인의 대결은 한국사회의 단적인 변화를 반영으로 볼 수도 있다. IMF 관리체제 이후에 한국사회의 화두 중의 하나는 조직 속의 구성요소로 살 것인가, 아니며 자기 자신 자체가 브랜드가 되어 독립적인 존재가 될 것 인지였다.

 

누구나 혼자 스스로 부와 명예 자유를 유지하는 것은 로망이다. 어떻게 보면 소모적인 우문(愚問)일 수도 있다. 조직 속의 구성원이 과연 비독립적인 존재로만 볼 수도 없다. 혹은 자체가 브랜드일지라도 독립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아나운서를 통한 성공의 심리도 이러한 한국사회의 흐름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아나운서는 직장인에서 자신 자체가 독립적인 브랜드가 되고자 한다.

 

하지만 이름을 얻어 독립적인 이미지로 1인 기업이 되겠다는 생각은 벤처기업보다 더 위험할 수 있다. 유명세라는 것이 과연 실체가 있는 것인지 의문일 뿐만 아니라 핵심 기술이 있어도 벤처의 천국이라는 미국에서 성공할 확률은 100분의 1이다. 이름을 얻은 뒤 무분별하게 프리를 선언하는 것은 이 때문에 벤처보다 더 모험적이다. 모험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감당할 수 없는 일이다.

 

요컨대, 방송국에서 무분별하게 아나운서들을 대거 오락프로그램에 출연시키는 것은 결국 소모적일 수밖에 없다. 멋지게 생긴데다 우스개나 잘하고 예능에 능한 이들은 아나운서가 아니어도 넘쳐나고 있다. 핵심적인 원천기술도 없이 엔터테이너 코드로 승부를 걸 수는 없는 문제다.

 

아나운서의 아우라를 유지해야 부가적인 각인 효과가 성공할 수 있다. 대중적 '각인 효과'는 신뢰 있는 아나운서의 이미지 축적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기도 하다. 최근에는 아예 아나운서들이 예능 프로에 무리 지어서 나온다.

 

연예인 지망생처럼 잔뜩 모아놓으면 가치가 없다. 호랑이를 모아놓으면 가치가 없고, 소나무는 숲을 이루면 멋이 없다. 사람들의 눈길을 끌 수도 없지만, 혼자 등장할 때 의미가 있다. 뜬금없을지 모르지만 아나운서는 범이요, 소나무다.

 

조직은 필요악이다. 무조건 긍정의 대상일 수도 없고, 부정의 대상일 수도 없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말은 매우 멋있지만, 무소는 언제나 고독하다. 고독은 고통과 친구다. 성공의 열쇠는 조직과 개인의 근본적인 관계에서 출발한다. 개인들이 조직을 구성하거나 그 안에 그래도 남아있는 것은 조직의 유용성 때문이다.

 

조직 안에 있는 이들은 밖으로 나오고 싶어 하고 조직의 밖에만 있는 이들은 조직 안으로 들어가고 싶어 한다. 아나운서 프로 담론은 이러한 점을 간과하기 쉽다. 많은 매체들이 무분별하게 부추기는 측면도 많다.

무엇보다 승자독식의 아나운서 담론은 우승열패의 수치심을 조장한다. 아나운서는 끊임없이 소모품처럼 소진되고 있다. 어차피 해마다 신입은 들어오며 지원자는 넘쳐나지 않는가. 뜨고 안 뜨고 보다는 일 자체에 즐거움이 우선이어야 한다.

 

프로그램의 진행이 수단화될 때 진정성은 사라지고 좌절과 무력감은 커진다. 그럴 때 좋은 프로그램은 더욱 찾을 수 없게 된다. 방송국에서는 당장의 소모품을 추구하기보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전문아나운서를 육성하는 체제를 만들어야 조직 운영도 건사할 수 있다.

 

우승열패의 관점에서 본다면 소수의 사람만 행복하겠지만, 아나운서의 우승열패의 담론은 더더구나 누구에게도 행복을 주지 않는다. 아나운서를 상품화해 소비하는 미디어 시스템을 위해 소모되는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이 순간에도 유명세에 관계없이 묵묵히 일하는 수많은 아나운서들 덕분에 방송은 여전히 돌아가고 있다. 아나운서 상품화 덫에서 벗어나 방송사는 묵묵한 그들을 더 보듬고, 조직화하는데 더 힘써야 할 것이다.

덧붙이는 글 | 데일리서프라이즈에 실린 글을 고쳤습니다.

2008.01.10 16:05 ⓒ 2008 OhmyNews
덧붙이는 글 데일리서프라이즈에 실린 글을 고쳤습니다.
#아나운서 #아나테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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