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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에 집이 있고, 사무실은 성남이기에 나는 고속버스를 자주 탄다. 처음엔 감흥이 새로워서 도로 밖의 환경에 넋을 빼앗기는 일이 많았지만 이젠 하도 타다보니 그런 것도 없다. 그래서 버스에 오르기 전에는 읽을거리를 먼저 챙기게 된다.
그날 저녁에도 신문을 말아 쥐고 버스에 올랐는데 내 자리를 찾는 순간 마음의 동요가 일었다. 옆 자리에 젊은 여자가, 그것도 너무도 고혹적인 미인이 앉아있는 것이다. 은근히 부끄러움을 타는 나로서는 횡재로 간주해야 할지, 난감해 해야 할지 망설여질 지경이다. 고속버스 여행을 여러 번 했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실례하겠습니다."
의례적인 인사를 하고 옆자리에 앉았어도 여자는 들여다보고 있는 팸플릿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다행이었다. 아니, 조금은 섭섭했다. 도대체 읽고 있는 것이 무슨 팸플릿인지 엉뚱한 호기심이 들었지만 그 쪽으로 눈길을 돌릴 자신이 없는 나로서는 확인할 길이 없었다.
그냥 신문을 펼쳐들었다. 펼치는 신문에 분 냄새가 쓸려 다가왔다. 그 냄새가 이상하도록 달콤했고, 더욱이 여자의 긴 머리카락까지 넘실대면서 내 목덜미를 간지럽히고는 달아났다. 신경이 곤두섰다. 어차피 신문내용은 아침에 거의 읽은 기사들이었다. 게다가 신경이 달아난 눈에 그 내용이 들어올 리도 만무했다.
이런 경우에 익숙지 않은 나는 슬슬 불안에 빠져들었다. 혼돈스럽기까지 했다.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나, 잠시 생각해보았지만 딱히 떠오르는 묘안도 없었다. 그 여자는 내 눈에 잠깐의 영광을 베풀고는 내 영혼을 처형해버린 것이다. 빅토르 위고의 소설이 생각났다.
프랑스 혁명을 토대로 쓴 위고의 소설 <93년>에 나오는 주인공은 반혁명파이자 무시무시한 랑트냐크 후작이다. 그의 배가 항해 도중 폭풍우를 만났을 때 대포가 포좌(砲座)를 이탈한 사고가 일어났다.
배가 이리저리 움직이는 대로 대포는 갑판을 휘저으며 좌우 난간을 부수고 다녔다. 이때 실수로 대포를 포좌에 단단히 고정시키지 못한 포병 스스로가 그 괴물에 용감하게 달려들어 끌고 와서는 포좌에 고정시켜 사고를 일단락 짓는다.
그러자 사람들 앞에서 랑트냐크 후작은 자신의 목에 걸려있던 훈장을 포병에게 걸어주며 그의 빛나는 희생정신과 용감함을 극찬한다. 그런 다음 후작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 실수는 용납할 수 없다”라고 말하고는 그 자리에서 총살해버린다.
그 대목이 떠오르자 전율이 일었다. 급기야 나는 무서워졌다. 이 순간이. 이 상황이. 그래도 카오스에 휘둘려진 내면을 정화시키기 위해 온힘을 기울여 신문을 쳐다보고 있을 즈음 뜻하지 않게 여자가 내 쪽을 돌아다보았다.
"저어…."
이유 모르게 큰 소리로 내려앉는 가슴을 떠안은 채 돌아보니 여자의 눈이 반은 치켜떠져 있었다.
"신문 넘기는 소리 좀 작게 낼 수 없을까요?"
"아, 네. 미안합니다."
그 순간 내 얼굴이 붉어지지 않았기를 빌었다. 신문을 접어 앞좌석 포켓에 쑤셔 넣은 나는, 자신을 배반한 카르멘을 울면서 찔러죽일 수밖에 없었던 돈 호세의 심정을 그제야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었다.
읽을거리마저 한순간 잃어버린 내 손과 의식의 방황이 시작됐다. 요(尿)기가 치밀어 올라왔고, 여자 쪽의 옆구리가 슬금슬금 가려웠으며, 무엇보다도 선반 위의 가방 안에 들어있는 책이 그리웠다. 그러나 이미 꼼짝없이 처형당한 내 영혼은 자리에서 일어날 엄두를 내기엔 회생이 불가능했다.
혹시 여자에게 닿을까 겁이 나서 좌석 중간 팔걸이에 언감생심 팔을 올려놓을 수도 없었다. 불편했다. 그래도 버스는 무심코 한참을 달렸다. 눈을 감아도 의식이 자꾸만 옆자리로 흘러갔고, 무언가 모를 불안으로 잠도 오지 않았다.
아, 하느님은 어찌하여 내가 컴퓨터 앞에 앉아 예매를 하던 그 순간에 이 자리를 클릭하게 만들었던가. 어째서 우등고속의 빛나는 자리인 홀로 앉는 좌석을 모두 동나게 만들었던가. 일이 바쁘지만 않았어도 좀 더 이른 시간에 버스를 탈 수도 있었을 텐데. 차라리 더욱 일이 바빴다면 심야 버스를 탔던가, 아예 이 여행을 포기했을 것을. 어째서 하느님은 하필이면 이 버스를 타게 하여 이다지도 사람을 고통으로 몰아넣으신단 말인가.
"죄송하지만, 나갈 수 있게 비켜주시겠어요?"
구약의 욥처럼 내게 운명 지어진 이 짐스러움에 대한 한탄을 하느라 휴게소에 버스가 정차한 것도 모르고 있었다. 나는 이유모를 죄인인양 버스에서 내린 여자가 멀리 사라졌을 때에야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는 되도록 여유 있는 걸음걸이를 흉내 내며 어슬렁어슬렁 화장실을 향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내 걸음은 뒤뚱이는 것 같았다. 화장실에서 소변을 본 후 손을 씻은 것은 물론, 입까지 헹구어 내고는 다시 버스에 올랐다. 그러는 내 자신이 밉살스러울 지경이었다.
여자가 휴대전화를 귀에 대고 저만치 오는 모습을 땅거미 지는 어스름 속에 애써 외면하면서 나는 이제부터 내가 가야 할 길을 가늠하고는 신음소리를 냈다. 아직도 한 시간 반이 넘는 거리. 만약 승객 중 누군가 휴게소에 떨어져 남아 이 버스에 빈자리를 만들어준다면 그는 복을 받으리라. 불행하게도 물론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여자는 전화기에 대고 계속 지껄여댔다.
"그러게 말이야. 걘 정말 웃기는 얘야. 한 번은 같이 옷 사러 간 적이 있었거든. 그런데 싸구려만 고르는데 미치겠더라니까. 그것도 나 같음 그냥 줘도 안 입을 것 같은 그런 것만 고르는 거 있지? 내가 왜 저런 얘랑 같이 다녀야 되나 회의가 들더라니까. 그리고 걔는 있지?…. "
여자의 목소리는 컸다. 게다가 자신이 하는 이야기 내용에 대한 의미를 생각할 겨를도 없이 빠르게 말했다. 대화라기보다는 거의 혼자서 조잘대는 수준이었다. 그런데 여자의 통화가 계속 될수록 내게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큰 소리로 떠드는 여자의 얼굴을 흘끔 쳐다보았고 그동안 엉켜있던 마음속의 카오스가 서서히 제자리를 잡아갔다. 신문을 다시 꺼낸 후, 창가에 앉은 여자의 머리 위로 일어나 실내등까지 켤 수 있었다. 내 저고리 깃이 여자의 얼굴을 스칠까 두려운 마음 같은 것도 없었다.
마치 여자가 직접 내 자리에 푹신한 보료를 깔아준 것처럼 편안했다. 스스로가 생각해도 좀 전에 비해 믿을 수 없을 만큼 갑작스러운 변화였다. 더욱 여유를 차린 나는 “목소리를 조금만 낮춰 주겠어요?”라고 점잖게 말 할 수 있을 정도였다. 더구나 여자의 흘기는 눈이 이젠 거슬리지도 않았다. 그저 씁쓸한 웃음이 나올 뿐이었다.
그 순간 나는 잠깐 스스로에게 회의(懷疑) 했다. 사람의 외모와 엿보여진 내면 사이를 오가며 일사분란하게 반응했던 내 의식에 대한 부끄러움이 밀려왔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꼭 부끄러운 일인가'라는 자각 또한 뒤 이어 다가왔다. 어차피 '창조주의 설계를 넘어선 성능을 피조물에게서 바란다면 무리가 아닐까'라는 자조적이지만 조금은 이치에 닿을 법한 믿음 때문이었다.
어쨌든 여자의 통화는 계속 이어졌다. 그럴수록 나는 신문 기사 내용에 자신을 파묻힘으로서, 여행시간의 진행을 무의식 속에서 빠르게 돌릴 수 있었다. 도착지를 알리는 차내 방송이 흘러나올 때, 정신을 차려보니 언제부턴가 내 한쪽 팔이 좌석 중간의 팔걸이 위로 여유롭게 올라가 있었다.
어느 사이, 등받이에 기대고 입을 벌린 채 자고 있던 여자는 방송 소리를 못 들은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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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하 장편소설 (족장 세르멕, 상, 하 전 두권, 새움출판사)의 작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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