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역사팩션] 제국과 인간 2회

음독의 후유증으로 사시가 된 신규식

등록 2008.01.16 19:58수정 2008.01.31 1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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흘겨보는 신규식

신규식을 아는 사람은 열에 한둘이었다. 십중팔구는 모른다고 말했다. 민필호를 아느냐고 물으면 약간 실망하는 표정을 지었다. 모르는 사람을 왜 계속 묻느냐는 거였다. 그러나 모든 한국인들은 상해임시정부가 무엇인지는 알고 있었다. 그리고 김구는 상해임시정부만큼이나 지명도가 높았다. 김구는 으레 상해임정과 묶여서 연상되는 경향이 있었다. 이것은 불공정했다.


김태수를 모르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김태수는 실존하지 않았던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의외로 김태수를 알 것 같다는 사람은 많았다. 그들은 김태수가 영화감독이라고 하거나 아니면 국회의원이라고 하는 등 제각기 의견들이 달랐다.

슬프도다!
나라의 수치와 백성의 욕됨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우리 인민은 장차 생존 경쟁의 와중에서 진멸할 위기에 처해 있다.
무릇 살려는 자는 반드시 죽고 죽음을 기약하는 자는 삶을 얻을 터인데
그대들은 어찌 이것을 헤아리지 못하는가?
영환은 다만 한 번 죽음으로써 황은을 우러르고
이 죽음으로써 이천 만 동포 형제에게 사죄하노라.
영환은 죽되 죽지 아니하고 구천에서도 그대들을 기필코 도우리니
제발 바라옵건대 우리 동포 형제가
기필코 자주 독립을 다시 얻는다면
죽은 자는 어두운 저승에서라도 한사코 웃을 것이다.

민영환의 할복 장면을 읽는 육군 참위 신규식의 눈시울은 피처럼 붉었다. 그의 앞에는 치사량을 넘는 독약 아고니친과 물 한 사발, 그리고 민영환의 유서가 게재된 신문이 놓여 있었다. 신규식은 붓을 들어 쓰기 시작했다.

“민충정의 피여, 5조목의 통감협약이 협박으로 이루어지자, 서울로 달려 올라와 대궐 문을 두들겼으나 허사가 되자, 하는 수 없이 칼로 찔러 목에서 가슴까지 이르니 피가 바닥을 적시며 죽어 갔도다.”

신규식은 민영환의 얼굴이 실린 신문을 벽에 대어 바로 세웠다. 그리고는 엄숙히 네 번의 절을 마쳤다. 그는 아내 조정완과 외동딸 신명호의 안녕을 비는 묵도를 올렸다. 얼마 후 그는 약을 입에 넣고는 소리 내지 않고 물을 마셨다.


언젠가 그는 일기에다, ‘욕됨과 부끄러움은 피로써만 씻을 수 있다’고 쓴 적이 있었다.

러일전쟁은 1904년 춘궁기에 시작되었다. 일본은 여순 항에 정박해 있는 러시아 함대를 공격했다. 대한제국은 허울뿐인 영세 중립을 표방하고 있었다. 제국주의 일본은 한국의 조정을 협박하여 이른바 한일의정서라는 것을 체결하였다. 그것으로 일본은 한국에서 군사기지를 임의로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나아가 일본은 그 해 8월, 제1차 한일협약을 강행했다. 협약서에 서명을 마친 일본공사 하야시는 한국 외부대신 서리 윤치호의 수염을 장난삼아 한 번 건드려 볼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이로써 한국은 사사건건 일본이 임명한 고문들의 간섭을 받게 되었다.

을사년 7, 8, 9월은 대한제국의 멸망이 브레이크도 없이 가속된 계절이었다. 을사년 7월에 제국주의 미국은 러일전쟁에서 이기고 있는 일본에 자진해서 선물을 주었다. 그것에는 일본으로 하여금 한국에서의 정치적 우월권을 인정한다는 내용을 담겨 있었다. 우리는 필리핀을 먹고 있을 테니 너희들은 한반도를 독식하라는 것이었다. 이것은 미국인 테프트와 일본인 카스라 사이에 맺어진 음습한 밀약이었다.

을사년 8월에 영국은 이른바 영일동맹이란 것으로 일본과 교합했다. 9월에는 러시아와 일본 사이에 포츠머드 조약이 맺어져서, 일본은 한국에서 우려낼 수 있는 거의 모든 이권을 러시아로부터 넘겨받았다.

구미 열강의 보증과 러시아의 기권을 얻어낸 일본이 급기야 한국 침탈의 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가장 결정적인 사건은 을사늑약의 체결이었다. 그 해 11월 18일에 체결된 이 조약으로써 이제 한국 정부는 국제적인 성격을 띠는 어떠한 조약도 타국과 맺을 수 없게 되었다. 또한 일본 정부는 한국의 황제 밑에 통감을 두어 모든 내정을 감독하게 하였다. 외교권의 박탈은 사실상의 주권 상실을 의미했다. 그리고 통감부의 설치는 통치권의 찬탈과 같은 것이었다.

을사늑약의 체결 소식이 전해지자 한국인들은 슬퍼하거나 분격하였다. 그리고 조약을 체결한 다섯 명의 매국 대신을 규탄했다. 그들은 내부대신 이지용, 외부대신 박제순, 학부대신 이완용, 군부대신 이근택, 농상공부대신 권중현 등이었다. 포도대장 출신 참정대신 한규설은 끝까지 반대했다가 파면 당한다.

육군부장 시종무관장 민영환은 의정대신 조병세, 특진관 이근영과 함께 대궐로 들어가 5적의 처단과 조약의 폐기를 청원하였다. 마침 방방곡곡에서 유림들의 상소가 쇄도하고 있던 터였다. 민영환은 상소인의 대표인 소수를 자임하여 하루도 거르지 않고 상소를 올렸다. 그는 황제의 재가와 참정대신의 인준이 없는 조약은 원천 무효이고, 개인의 영달을 위해 조약에 서명한 적신들은 처단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일본공사 하야시와 내부대신 이지용은 민영환 등을 기소했다. 민영환은 이튿날 새벽 고등재판소 평리원에 소환, 구금되었다. 황제의 특명으로 석방된 민영환은 다시 두 번에 걸친 절박한 상소를 올렸지만 황제는 응답하지 않았다. 급기야 그는 엄동으로 치닫는 11월 말일, 황제와 이천 만 동포에게 고하는 유서를 쓴 다음 자신의 명치에 비수를 들이댔다. 그러나 칼이 작아서 한 번에 일을 이루지 못하게 된다. 게다가 피가 손에 묻어 칼이 잘 쥐어지지 않았다. 그는 피 적신 손을 벽에 문질러 닦았다. 그러자 끌린 핏자국이 바람벽 여기저기에 남게 되었다.

신규식의 아내 조정완은 남편의 기질을 잘 아는 여인이었다. 그녀는 지력과 무용을 겸전한 남편이 의외로 단순한 사람임을 알고 깊이 놀란 적이 있었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남편의 단순함은 특유의 순수성과 자존심에서 비롯되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남편은 부끄러운 일을 당했을 때, 즉시 행동에 나서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노력이 수포화되고 부끄러움을 만회할 길이 막히게 되면 이상하리만치 금세 삶의 열정이 식어 버렸다. 이제 혼인한 지 벌써 10년이었다. 그녀는 남편의 눈빛 하나로 모든 걸 알아채 버리는 여인으로 성숙해 있었다.

요즘 들어 며칠, 2층 서재에서 내려오는 남편의 눈은 언제나 벌겋게 부어 있었다. 정완은 남편의 거듭되는 실패와 슬픔이 안쓰러웠다. 그녀가 충청도 세 천재 중의 하나라고 일컬어지던 남편을 만났을 때, 남편의 나이는 불과 17세였다. 그녀는 남편의 명민한 얼굴과 단정한 옷차림을 보고는 자신의 평온한 미래를 예단했었다. 그러나 남편에게는 뜻밖에도 날카로운 열정과 저돌적인 실천력이 있었다. 이미 남편은 결혼 전부터 동년군이라는 이름의 소년대를 조직하여 의병을 지원하고 있었다.

남편은 서울로 가자는 그녀의 제안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남편은 곧 관립한어학교에 입학하고 독립협회에도 가입하였다. 그는 독립협회의 재무 분과에서 활동하며 한어학교를 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은 느닷없이 무관학교에 입학하겠다고 했다. 이제 정완은 시를 곧잘 쓰기도 하는 남편이 왜 무관학교에 입학하려는지 묻지 않고도 알 수 있었다. 빼앗기고 있는 나라를 지키려면 무력을 키워야 한다는 것쯤은 누구나 아는 일이었다.

경사육군사관학교를 마친 남편은 육군 참위로 임용되었다. 그것이 3년 전 일이었고, 남편은 진위대로 전속되었다. 남편은 다른 한편으로 전기와 통신에도 유다른 관심을 기울였다. 그것 역시 의도가 헤아려지는 일이었다.

한일의정서가 체결되자 남편은 주저 없이 무력시위에 나섰다. 남편의 서재에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게 되었다. 정완은 온종일 남편의 동지들에게 밥과 술을 대접해야 했다. 남편은 전국 각지와 연락을 주고받는 것 같았다. 지방으로 보내는 인편 비용만 해도 남편의 반 년 치 월급보다 많이 들었다.

그러던 중에 어느 날 방문객이 뚝 끊기고 남편의 눈빛에 생기가 없어졌다. 아마도 남편은 전국적인 의병 봉기를 추진했었는데, 그것이 예기치 않은 사태로 중단된 것 같았다. 나중에 들은 말로는, 믿었던 동지의 배신 때문이었다고 했다.

남편은 매일 어딘가에 다녀왔다. 그곳이 민영환이 순국한 전동 이완식의 집이었음을 안 것은 나중이었다. 남편은 종로에서 이상설의 웅변도 들었다고 했다. 이상설은 시민들을 모아 놓고, 민영환의 죽음은 모든 국민의 죽음이라고 외치면서 우리가 슬퍼하는 것은 민영환의 죽음 때문이 아니라 모든 국민의 죽음 때문이라고 말했다고 했다. 정완은 남편의 눈빛에서 열정이 사그라진 대신 새로이 나타난 이상한 의지 같은 것을 읽었다. 그때부터 정완은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어쩌면 남편은 민영환의 뒤를 따라야 한다고 믿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새벽녘에 정완은 2층 서재에서 새어 나오는 울음소리를 들었다. 남편은 벌써 며칠째 새벽마다 울고 있었다. 그녀는 잠들어 있는 딸 명호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아비의 울음을 어린 것이 안다면 어떨까 하고 걱정하고 있던 차에 다행히 울음소리는 그쳤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 밖을 내다보았다. 눈이라도 내린 것처럼 하얀 달빛이 마당에 그득 들어차 있었다.

아침식사를 하면서 그녀의 불안은 확신으로 굳어졌다. 남편은 독상을 마다하고 부부 겸상을 차리라고 하더니, 상에 딸의 밥그릇도 놓으라고 했다. 평소 과묵하기만 했던 남편은 오늘사말고 딸에게 이런저런 것을 자상히도 물었다. 딸을 학교에 보낸 정완은 장 서랍을 열어 보았다. 어렵사리 구해 놓은 해독제가 거기에 있었다.

남편을 살린 것은 그녀의 응급조치와 그 해독제였다. 하지만 남편의 몸에 들어간 독은 그의 시신경을 마비시켰다. 남편은 꽤 오랫동안 병석에 누워 있었다. 남편은 자리에서 몸을 일으킬 때마다 오른쪽 눈을 손으로 가렸다. 독기는 끝내 그의 눈동자 하나를 풀어지게 만든 것이었다. 또한 남편의 기력은 극도로 쇠진해 있었다. 정완은 남편의 몸은 일어났지만 삶의 의욕은 일어나지 않은 것이라고 단정했다. 아니나 다르지 않았다. 남편은 이틀 만에 다시 병석에 누워 버렸다.

그녀는 친정에 가 아버지를 만났다. 그녀의 부친 조종만은 한양 조씨 집안의 기둥이었으며 군수를 지낸 적도 있는 경기도의 부호였다. 친정에서 돌아온 그녀는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 남편의 병석으로 갔다. 일부러 구한 완력 좋은 아줌마가 남편을 돌보고 있었다. 그녀는 남편의 눈가에 고여 있는 물기를 손으로 닦아냈다. 남편은 아내의 손길을 아무런 표정도 없이 받고 있었다.

“다시 일어나 일하세요. 이곳에서 하시다가 안 되면 아라사든 중국이든 가셔서 하세요. 제가 자금을 준비했어요. 더 만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언약해 주세요. 자결하시지 않겠다고 말입니다.”

남편의 눈물을 수도 없이 보고 들은 그녀였지만, 그녀가 남편에게 눈물을 보이는 것은 처음이었다. 남편은 고개를 끄덕이며 아내의 손목을 부여잡았다. 신규식은 병석을 박차고 일어났다.

그는 수염을 기르겠다고 아내에게 말했다. 또한 그는 자신의 호를 재미난 것으로 지어 아내 정완을 안심시켰다. 한쪽 눈에 이상이 생겨 세상을 바로 볼 수 없고 흘겨볼 수밖에 없으니, 흘길 예, 볼 관을 써서 예관으로 한다는 것이었다.

덧붙이는 글 | 묻혀진 역사를 복원하면서, 영혼으로 극일에 성공한 매혹적인 인물들을 오늘에 되살림으로써, 식민지 역사를 창조적으로 청산하고자 쓰는 소설입니다.


덧붙이는 글 묻혀진 역사를 복원하면서, 영혼으로 극일에 성공한 매혹적인 인물들을 오늘에 되살림으로써, 식민지 역사를 창조적으로 청산하고자 쓰는 소설입니다.
#예관 #신규식 #흘겨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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