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누스의 구리반지>디디우스 팔코 시리즈 3편
황금가지
허름한 아파트 6층에 있는 팔코의 사무실 겸 집은 그래서 썰렁할 때가 많다. 팔코에 표현에 의하면, 사무실에 있는 것은 죽은 빈대들이 섞인 흙이 발라진 벽뿐이다. 집세도 제대로 내지 못해서 수개월간 연체되고, 그 때문에 집주인이 팔코를 보면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기도 한다.
팔코가 이런 정보원 일을 시작한 것은 5년 전이다. 그전에는 브리타니아에서 7년 동안 군복무를 한 경력이 있다. 상이병으로 제대했고 춥고 습한 지역인 브리타니아에서의 생활을 어두운 기억으로 가지고 있다.
당시의 로마는 계급사회였다. 귀족, 중산계급, 자유시민, 노예 등의 계급으로 나뉘어진 사회다. 자유시민 신분의 남자가 중산계급의 여자를 넘본다는 것은 상상하기도 힘든 일이다.
팔코는 이런 자유시민의 신분이다. 노예의 신세는 아니지만 돈벌이가 시원찮기 때문에 그보다 특별히 더 좋을 것도 없다.
자유시민이 중산계급으로 오르기 위해서는 40만 세스테르티우스(로마의 화폐단위)의 돈이 있어야 한다. 팔코의 1년 생활비는 약 1천 세스테르티우스다. 이 정도면 팔코의 신분과 중산계급의 신분 차이가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다.
하지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가진 자들의 욕심은 끝이 없는 법. 당시 로마에서도 중산계급의 사람들은 자신의 위치에 만족하지 못한다. 중산계급의 사람들은 어떻게든 서민들에게 돈을 뜯어내서 한 단계 더 신분상승을 하려 한다.
서민들을 상대로 고리대금업을 하고 부동산을 임대한다. 대출금이 연체되면 가혹한 방법으로 돈을 징수한다. 팔코는 이런 중산계급의 사람들을 증오한다. 임대업을 가리켜서 더러운 전염병같은 것이라고 하고, 시내에는 사회 기생충들이 득실거린다고 말한다. 제정로마에 반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로마는 공화정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당당하게 주장하기도 한다.
그렇다고 팔코가 세상에 대한 분노로 뭉친 인간은 아니다. 서른 살의 젊은 나이인만큼, 그도 사람들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유머감각을 잃지 않는다. 친구와 함께 포도주를 마시면서 기분좋게 취하고, 술집에서 괜찮은 여종업원에게 농담을 건네기도 한다. 조카들을 자상하게 돌봐주는 좋은 삼촌이기도 하다. 빈민가의 허름한 아파트에서 산다는 것만 빼면, 수입이 별로 없다는 것만 빼면 그럭저럭 살아가는 인생인 셈이다.
소설로 복원한 2000년 전의 로마그러던 어느날 팔코에게 색다른 일이 터진다. 첫 번째 작품인 <실버 피그>에서 팔코는 귀족출신의 한 소녀를 우연히 만나고 이때부터 잔인한 살인과 기이한 음모 속에 휘말려들게 된다. 가정문제만 추적하던 팔코가 베스파시아누스 황제를 만나는가 하면, 그의 아들인 티투스와 함께 술을 마시기도 한다. 팔코는 이것을 기회로 돈벌이와 신분상승을 함께 이룰 수 있을까.
물론 로마의 기득권층은 그렇게 만만하지 않다. 팔코는 로마제국을 둘러싼 음모를 파헤치기 위해서 동분서주한다. 하지만 팔코가 가는 길은 고난의 연속이다. 정체모를 사람에게 두들겨 맞는가 하면 칼에 찔리기도 한다. 자유를 박탈당하기도 하고 강제노역장에 끌려가기도 한다. 로마의 뒷골목만을 누비고 다녔던 팔코가 넓은 세상으로 나오자마자 온갖 악전고투를 겪는 것이다.
<실버 피그>에서 시작되었던 귀족들의 음모는 <청동조각상의 그림자>로까지 이어진다. 팔코는 자신에게 부여된 임무를 무사히(?) 마치지만, 그 보상은 보잘것없다. 팔코는 항상 공화정을 주장했지만, 그의 활동은 결과적으로 황제의 권력을 확고하게 만들어주는 것이었다.
정치판에 환멸을 느낀 팔코는 다시는 정치에 개입하지 않겠다고 다짐할 정도가 된다. 그래서 팔코는 세번째 작품 <베누스의 구리 반지>에서 다시 현실로 돌아온다. 광활한 로마제국의 영토가 아닌, 냄새나고 더러운 로마의 골목으로 돌아온 셈이다.
하지만 로마의 골목에서도 환멸을 느끼기는 마찬가지다. 로마시내의 거리는 그 시대의 추한 모습을 가지고 있다. 테베레 강 너머의 비참한 빈민가, 담보사기로 돈을 긁어모으는 중산층, 계약에 문제가 있다는 이유로 노점상을 쓸어버리는 임대업자, 재개발을 위해서 세입자가 살고 있는 건물을 통째로 무너뜨리는 건물주 등.
팔코는 탐욕스럽고 비열한 유산계급에게 분노를 느낀다. 하지만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 자신은 사건을 의뢰받아서 해결하고 그 보상금으로 하루하루 살아갈 뿐이다. 세상에 대한 분노를 터뜨리기보다는, 집으로 돌아가서 휴식을 취하는 것을 택한다. 하나의 일이 끝나면 당분간은 일도 없고 의뢰자도 없고, 이 사회에는 정의도 없기 때문이다. 아니면 팔코의 말처럼, 정의란 오직 부유한 사람들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실버 피그 - 로마의 명탐정 팔코 1
린지 데이비스 지음, 정회성 옮김,
황금가지,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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