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한나의 데뷔앨범. 스승인 로스트로포비치가 지휘하고, 런던 심포니가 협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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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한나의 데뷔음반을 산 것이 이미 12년 전인 1996년이다. 앨범 표지에는 자신의 몸체만한 첼로를 안고 있는 소녀의 사진이 실려 있었다. 야무지게 입을 다물고 정면을 응시하는 12살짜리의 모습은 소녀가 보통내기가 아님을 말해주고 있었다.
런던 심포니가 협연하고 로스트로포비치가 지휘했다는 표지 설명 덕분에 앨범을 들고 계산대로 향하는 것은 큰 모험이 아니었다. 그러나 놀라운 일은 음반 비닐을 뜯고 휴대용 시디플레이어에 얹었을 때 일어났다. '이 꼬마가 얼마나 작은 축소 악기를 연주할까' 생각하며 이어폰을 귀에 꽂는 순간, 머릿속이 멍해지는 충격을 받았다.
그것은 흔히 나타났다 사라지는, 기교만 익힌 '영재 음악가'의 설익은 솜씨가 아니었다. 표지에 눈을 반짝이는 꼬마의 사진이 아니었다면, 그 연주가 어린아이의 것이라고 생각조차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애늙은이'라는 말은 이럴 때 쓰는 말일 것이다. 가슴 아프게 흘러나오는 차이코프스키의 로코코 변주곡을 들으며, 나는 서울의 2호선 지하철 안에서 눈물을 쏟을 뻔했다.
그때의 영악한 소녀가 자신의 나이만큼을 더 살고 난 겨울, 시카고의 '엘(L)' 지하철은 요란한 소음과 진동을 내며 시내로 진입해 들어가고 있었다. 그동안 장한나는 훌륭한 기교를 갖춘 연주가뿐 아니라, 쇼스타코비치와 프로코피에프 등 러시아 음악가의 탁월한 해석자로서도 명성을 쌓았다. 두 번이나 그래미상 후보에 오른 그녀의 음반은 이미 명반의 반열에 올랐다.
그녀의 고전음악, 낮은 데로 임하다그러나 내가 그토록 장한나의 공연을 기다려온 데에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
장한나는 대학을 졸업하기도 전에, 자신의 전공인 철학을 삶 속에서 구현하고 있다. 가난한 사람을 위한 무료 공연과 적십자 평화대사 순회활동은 그 가운데 하나다. 2006년 11월 한국 순회공연을 할 때, 그녀가 첫 무대로 삼은 곳은 충남 금산의 '다락원 생명의 집'이었다. 이제 그녀는 존경하는 사회활동가 가운데 한 명이 되었다.
나는 고전음악을 좋아한다. 그러나 특권의식으로 무장한 채 대중과 구분되기 위해 애쓰는 음악가나 관의 냄새가 짙게 밴 엘리트적 문화정책을 혐오한다. 그런 나로서는 전국 각지의 소규모 공연장을 마다하지 않고, 자활센터에서 김밥을 마는 그녀가 사랑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연주가들은 한 달에 몇 시간 연주하면 나머지는 노는 거 아니냐'고 태연히 물으면서도 '폼 나는 오페라하우스' 건설에 열정을 쏟는 정치인들 덕분에 그녀의 활동은 더욱 빛난다.
땀에 젖은 주홍 드레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