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족선사와 서경덕, 누가 더 좋아요?

황진이 만나러 박연폭포 가는 길

등록 2008.01.23 15:54수정 2008.01.23 1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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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개성. 아침 7시. 남북출입사무소

개성. 아침 7시. 남북출입사무소 ⓒ 이정근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새벽 6시. 광화문을 출발했다. 조선의 명기(名技) 황진이를 만나기 위해서다. 남측 출입사무소가 있는 남방 한계선까지 1시간. 출경수속과 입북수속이 1시간. 다시 버스에 올라 30분 만에 박연폭포에 도착했다. 실지로 버스가 달린 시간은 1시간 30분. 실로 멀고도 가까운 길이다.


군사분계선을 통과하고 개성 시가지를 벗어난 버스가 비포장도로에 들어섰다. 천마산 자락이다. 민둥산 이어서일까? 산천은 의구한데 낯설다. 구불구불 언덕길을 오르면서 마음이 설렌다.

산은 옛 산이로되 물은 옛 물이 아니로다
주야(晝夜)에 흐르거든 옛 물이 있을손가
인걸(人傑)도 물과 같아 가고 아니 오는 것은
-황진이


황진이의 시(詩)를 읖조리는 입술이 마르고 목이 타들어 간다.

“정말이지 황진이가 거기 있을까?”

조선 중종 때 사람이지만 박연폭포에 가면 만날 수 있을 것 같았다. 박연폭포는 황진이의 전용구역이고 무도장이 아니던가. 조선 팔도의 시인묵객을 시와 음률로 석 죽이고 내로라 하는 한량들을 빼어난 자태로 후리던 곳이 아니던가.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베어내어
춘풍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님 오신 날 밤이어든 굽이굽이 펴리라
황진이/동짓달 기나긴 밤


캬 좋다. 황진이의 시처럼 천마산을 베어내어 뜨끈한 아랫목에 넣어 두었다가 반갑게 맞이할 것만 같았다. 동지섣달 추운 날씨를 무릅쓰고 서울에서 달려온 나그네가 아니던가.


박연폭포 주차장에 내려 언덕길을 올랐다. 금강산 구룡폭포, 설악산 대승폭포와 함께 우리나라 3대 폭포라 하는데 어떠한 모습일까? 웅장한 모습일까? 단아한 모습일까? 가슴이 뛴다. 황진이를 빨리 보고 싶은 마음이 조급해서일까. 야트막한 언덕길이지만 숨이 차다.

폭포수 백 길 넘어 물소리 우렁차다
나는 듯 거꾸로 솟아 은하수 같고
성난 폭포 가로 드리우니 흰 무지개 완연하다
어지러운 물방울이 골짜기에 가득하니
구슬 방아에 부서진 옥 허공에 치솟는다.
나그네여, 여산을 말하지 말라
천마산야말로 해동에서 으뜸인 것을.
황진이/박연폭포


5분 정도 오르니 박연폭포가 시야에 들어왔다. 37m 장쾌한 물줄기를 뿜어대던 폭포가 강추위에 얼어붙었다. 빙폭이다. 왼손으로 치맛자락을 걷어 올린 여인이 사나이의 넓은 가슴에 안겨있는 듯한 모습이다. 아랫도리의 속살이 눈부시다. 지족선사를 유혹하던 황진이의 뒷모습을 훔쳐보는 것 같아 얼굴이 붉어졌다.

a 박연폭포. 박연폭포가 얼어 붙어 있습니다.

박연폭포. 박연폭포가 얼어 붙어 있습니다. ⓒ 이정근


청산리 벽계수(靑山裏 碧溪水)야 수이 감을 자랑 마라.
일도창해(一到蒼海)하면 돌아오기 어려우니
명월(明月)이 만공산(滿空山)하니 쉬어간들 어떠리.
-황진이


좋다. 헛물켜지 말라는 얘기인 것 같은데 난 네가 없을까봐 조바심쳤다. 있어주어 고맙다. 네 말처럼 쉬어 갈테다.

황진이의 시를 새겨놓았다는 용 바위에 앉으니 절벽에 걸린 폭포가 일품이다. 과연 절경이다. 팔도의 한량들이 무릎을 칠 만하다. 

한송(漢松)이 만공창(滿空蒼)하니 말동무나 되어다오. 한양과 송도의 하늘이 충만하게 열렸으니 한담이나 나누어 보자.

“박연폭포와 서경덕 그리고 기생 황진이를 송도삼절(松都三絶)이라 하는데 그 중에서 어느 것이 으뜸이라 생각하오?”

“그야 당연히 황진이죠.”
거침없는 답변이다. 공주병에 걸려도 단단히 걸렸나 보다.

“왜 그렇게 생각하시오?”

“생각해 보시라요. 박연폭포는 그냥 계곡에서 떨어지는 물줄기였다 그 말씀이야요. 여기에서 내가 사내들을 후리면서 좀 놀았더니만 절경으로 알려졌고. 서경덕 역시 그래요. 화담은 조선에서 별로 알려지지 않은 서생이었다 이 말씀이야요. 이러한 서생이 나하고의 염문설 때문에 전국구 유명인사가 됐잖아요? 그러니 내가 없으면 박연폭포는 맹물이고 서경덕은 시체라요. 그러니 내가 으뜸이지요.”

발칙하다. 명월이라는 기명에 걸맞게 당차고 황당하다.

“그렇다면 지족선사와 서경덕 중에 누가 진정한 사나이우?”
하도 기가차서 꼬면서 물었다.

“지족선사지요.”
의외였다. 황진이가 흠모하고 존경했던 인물은 서경덕이지 않은가.

“궁금한데요. 얘기 좀 해줄 수 있나요?”
“다 지나간 얘긴데 무슨 얘기를요?”

꽁무니를 뺀다. 두 눈을 지긋이 감은 황진이가 먼 하늘을 바라본다. 눈을 감았으니 천마산에 걸친 흰 구름은 보이지 않고 그 때 그 시절이 생각났을 터.

“그 때 몇 살이었어요?”
“누구? 나??”

“아니오, 지족선사.”
“서른다섯이오.”

“진이는?
“스무울... 아니 이 사람이 지금 유도질문하고 있잖아?”
말끝을 흐려버리고 통통 튄다. 뽀루퉁한 모습이 넘 귀엽다.

“그렇담 지금 몇 살이에요?”

“갈수록 가관일세. 숙녀 나이를 묻는 것은 결례라는 것을 알면서도 왜 물어?”
490년 전 사람이면서 숙녀라니 당혹스럽다. 할머니도 몇 바퀴 돌아간 호호 할머니 일텐데 웃긴다.

“그게 아니고요. 생몰년대가 미상이라 이러쿵저러쿵 말들이 많아서요.”

“연산군을 몰아내고 더 좋은 세상을 만들겠다던 박원종과 성희안이 세도를 부리던 어지러운 세상에 별 볼일 없는 진사가 외도하여 태어나 젊은 나이에 죽었다 하면 됐지. 뭘 더 알려고 그래?”

“처음부터 ‘지족선사를 유혹하겠다’ 라고 작심하고 찾아 갔어요?”
“그런 건 아니었지만 만나 보니까 뽕 가드라고...”

“왜요?”
“왜긴 왜야? 잘 생겨서 그렇지.”

잘 생긴 모습은 얘나 지금이나 여자들을 꾸뻑가게 하는 무기였는지? 황진이의 연막 전술인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덧붙이는 글 | 연속 3회 게재합니다.


덧붙이는 글 연속 3회 게재합니다.
#황진이 #박연폭포 #개성 #지족선사 #천마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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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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