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당수에 안 빠지겠습니다, 대신 점자책 사드리죠"

고전 여성의 재발견 "내 며느리는 천고에 영웅 군자로다"

등록 2008.01.26 10:26수정 2008.01.28 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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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양은 실제 설문조사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가상의 인물임을 밝힙니다. 설문조사의 자세한 결과는 기사 맨 아래 상자 기사를 참조…<기자 주>

숙명여고 3학년 학생 A양은, 문학 수업 시간 문득 의문이 생겼다.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자세로 님을 기다리는 것이 '전통적 여성적 화자'란다. 고전 문학의 <가시리> <속미인곡>도 그렇단다. 그런데 작가는 거의 남자다. 결국 현대시라는 김소월의 <진달래꽃> 앞에 이르러 고개를 갸우뚱한다.

"휴. 그 시대엔 어쩔 수 없었구나. 일단, 이해가 쉽게 가긴 하는데. 편견이 들어있는 것 같아 맘에 안 들어. 수동적이고 소극적인 '여성'에 내가 속한다는 것도 이상하고. 여성/남성을 구분해놓고 학생들한테 틀에 박힌 걸 주입시키려 하나. 그러고 보니 김소월은 게이인가? 남성적 화자들은 왜 다 명령어야? 여자도 충분히 강할 수 있는데. 나중에는 이거 바꿔야 하는 거 아냐?"

고전이 서운해질 지경인 A양을 위해 전통적인 한국 여성을 재발견하는 취재를 떠나보았다.

'여성적 화자'는 순종적이다, 정말일까?

2007년 10월 14일 대한민국 여성축제(문화세상 이프토피아 주관)에서는 심청이·춘향이·팥쥐 엄마, 선녀가 총출동해 무대에 올랐다. 심청이는 빼어난 수영실력으로 인신매매에서 탈출하고, 춘향이는 성매매근절 활동가로 변신했다. 선녀는 한부모가족을 위해 앞장섰다.

"공양미 삼백석에 팔려가서, 용왕을 만나지 못했다면, 제가 살았겠습니까? 제가 아들이라면 저를 파셨겠습니까? 어푸어푸~"


 대한민국 여성축제의 한 장면
대한민국 여성축제의 한 장면김홍주선

머리에 연꽃을 쓰고 검정 치마를 껑충 올려입은 심청이가 소리높여 외치자 남인사동 마당을 메운 관객들이 박수를 보낸다. 극단 옥토를 이끌며 <자기만의 방>을 연출했던 이영란 씨가 경희대 연극영화과 제자들과 함께 참여했다. 신화 속 여성을 발굴해서 과거와 현재를 접목하는 소재를 올해(2008년) 여성 축제 주제로 예정한 이프토피아. 최인숙 사무국장이 전래동화 다시 읽기의 중요성을 지적한다.

"전래동화는 어릴 때부터 무의식적으로 접해서 일반문학보다 영향이 더 클 수 있습니다. 관습이 완전히 배인 동화에 알게 모르게 세뇌를 당하는 거죠. 외국에서는 백설공주 뒤집어보기 같은 시도를 많이 하고 있습니다. 우리 고전을, 버리지 않고 새롭게 현대적으로 재조명하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서예은 학생의 어머니 공지애(40)씨는, 딸과 함께 우연히 인사동 길을 지나다가 여성축제에 머물렀다.

"두 자매의 엄마가 되고 나니 관심이 더 생겼습니다. 여자아이들이 읽을 수 있는 현대적인 창작동화가 많이 생겨났으면 좋겠습니다."

효성에만 갇히지 않으려는 심청이의 반란은, 사실 역사가 깊다. 김승희 시인의 시에서 심청이는 인당수에 빠지는 대신, 어머니께 점자책을 사드린 바 있다. 

인당수에 빠질 수는 없습니다./어머니,/저는 살아서 시를 짓겠습니다.//공양미 삼백석을 구하지 못하여/당신이 평생 어둡더라도/결코 인당수에는 빠지지 않겠습니다.//…그 대신 점자책을 사드리겠습니다./어머니,/점자읽는 법도 가르쳐 드리지요/우리의 삶은 이와 같습니다./우리들 각자가 배우지 않으면 안되는/외국어와 같은 것.//어디에도 인당수는 없습니다./어머니,/우리는 스스로 눈을 떠야합니다. (<배꼽을 위한 연가 5> 중에서)

"내 며느리는 천고에 영웅 군자로다"

<공감적 자기화를 통한 문학교육 연구 : <심청전>의 이본 생성을 중심으로 >(서울대학교 국어교육과 박사과정 논문)을 쓴 목원대학교 서유경 교수는 고전이 다양한 이본들로 전래되어왔음을 지적하고 있다. <심청전>의 비교적 초기 경판본에서 후기 완판본으로 오면 인물 구성이나 장면 장면에서 차이가 있다.

후기 판본에서 인당수에 빠질 때에 가다가 쓰러지고 가다가 쓰러지고 하는 모습은 맹목적인 효성보다 심청이의 인간적인 면모를 드러낸다. 여성이 필사한 판본에는 “ 제대로 된 딸 하나 열 아들 부럽지 않네”라는 필사후기가 덧붙여 있어, 당시 여성 독자에게 심청이가 표면적 효 주제를 넘어 다양한 의미로 읽혔음을 짐작케 한다.

한편 <한국 고전 여성문학회>의 회원인 조혜란 교수는 심청이는 ‘효 자체는 미덕이나, 지나치게 희생을 강요하는 인물이라 위험할 수 있다’며 다양한 고전들을 소개한다.

"고전 소설은 어떻게 읽느냐가 중요합니다. <금방울전>과 같은 작품도 당대 맥락에 따라 여성인물 해석이 달라질 수 있지요.<포의교집>이나 한문단편 <범여>와 같은 작품에서도 주체적으로 사랑을 리드해가는 여성을 읽을 수 있습니다. <범여>는 양반집 소저의 몸종으로 칼쓰는 하층여성입니다. 자기가 남자를 선택하고 떠나는 흥미로운 인물이죠."

조혜란 교수에 따르면 군담 소설의 30%가 여성장군이 주요 소재였다. 이외에도 학계에서 고전 여성 문학 발굴은 꽤 진척되었다. <한국의 여성영웅 소설>(정병헌, 이유경 엮음. 태학사, 2000)은 여성 영웅 소설을 세 유형으로 나누어 설명한다.

첫 번째 유형은 여성주인공이 남성을 대리인으로 내세워 자신의 능력을 드러내는 경우이다. <박씨부인전> <금방울전> <신유복전> <황부인전>이 있다. 두 번째 유형은 여성주인공이 남장을 한 후 스스로의 의지에 따라 직접 공적인 영역에 진출해 능력을 발휘하는 경우이다. <김희경전> <이대봉전> <옥주호연> <황장군전> <이봉빈전>이 있다.

두 번째 유형이 정체가 밝혀진 후 가정으로 돌아가는 반면,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아 획득한 지위를 유지하는 경우도 있다. 바로 세 번째 유형이 <홍계월전> <정수전전> <방한림전> <이학사전> 등이다.

보국 원수에게 하직하고 돌아와 부모전에 욕본 사연을 낱낱이 고하니 여공이 그 말을 듣고 대소하여 칭찬하여 왈, "내 며느리는 천고에 영웅 군자로다"(<홍계월전>)/계월이 비록 네 아내 되었으나 벼슬이 그저 있어 놓지 아니하고 의기 당당하여 족히 너를 부릴 사람이로되 예로써 너를 섬기니 어찌 심사를 그르다 하리오(<홍계월전>)

"가시내? 갓 쓴 애가 왔다!"

고전이 독자들에게 많이 읽히려면 현대어로 다시쓰기가 필수. 딸을 키우는 부모라면 눈이 번쩍 뜨일 어린이책 <가시내>도 있다. 나라에 전쟁이 났는데, 여자라서 전쟁터에 받아주지 않는다, 주인공은 갓을 쓰고 정체를 숨긴 채 맹활약을 펼쳐 적을 무찔렀다. 적들은 외친다 '갓 쓴 애가 왔다!' 그 이후 '갓 쓴 애'는 입을 타고 '가시내'가 되었다.

 <가시내>에 들어있는 삽화
<가시내>에 들어있는 삽화사계절 출판사

동양화를 전공한 그림 작가 이수진씨가 <기센 여자가 팔자도 좋다>라는 한국여성 고전선집에서 영감을 얻어 기획한 책이다. 사계절 출판사의 김장성씨가 글을 썼다. 자신 역시 일곱 살 난 딸아이의 엄마라는 이수진씨는 기획의도를 이렇게 말한다.

"딸을 임신했을 때, 여자에 관한 이야기를 묶어놓은 <기센 여자…> 책을 봤어요. 아이가 태어나면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고 생각했지요. 외동딸에게 '니가 여자애지만, 하고 싶은 거 있으면 다해라. 여자이든, 장애아든, 누구든 노력하면 되는 거다'라고 말하고 싶었습니다.”

'말 띠 여성이 팔자가 사납다'는 말처럼, 원래 우리 말에는 없었던 말이거나, 좋은 뜻이었는데 일제 시대를 거치면서 들어오거나 왜곡된 말이 많다.(<한국 동물 민속론>(천진기, 2003) 229쪽 참고) 가시내라는 어원은 현재 거의 욕처럼 쓰이는데, 이수진 작가는 이걸 뒤집고 싶었다고 한다.

어린이책 시장에서 여자아이는 중요한 독자다. 책을 읽는 비율이 더 높다. 소재로도 많이 다뤄진다. 그 중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신데렐라나 백설공주 같은 책은 여아들이 좋아하는 책이고, 명작임이 틀림이 없다. 그러나 자신의 노력이 아니라 운이나 외모, 다른 요인으로 성공하는 '공주물'은 아이들을 오도할 위험이 있다고 느꼈다고.

"제 딸은 예쁜 공주물도 좋아하지만, 슈렉도 엄청 좋아하거든요. 여주인공이 공주긴 하지만 싸움도 잘 하고, 괴물이라서 못 생기고, 실실 까불고…."

현대적 수요에 맞아 떨어져 한 달에 300부 정도 나가고 있는 <가시내>는 특히 딸을 기르는 부모들에게 인기가 높다. 작업이 쉽지는 않았다며 이 작가는 덧붙인다.

"그림쟁이라면 글을 읽으며 그림이 떠올라야 하거든요. 그런데 여자 같기도 하고, 남자 같기도 하고, 어떻게 그려야 할지 잘 떠오르지 않았어요. 원래 굉장히 사실적으로 그리던 편인데, 이 책 때문에 그림 스타일을 바꿔야 하나 괴로워했지요. 6년이 걸렸습니다."

과연 전통 있는 여인의 후예들은 뭔가 달라도 달랐다. 이쯤에서 A양, 속이 좀 풀렸을까? 그런데 이 따끈따끈한 소식들이 입시의 장벽을 뚫고 교실까지 들어오려면, 얼마쯤 더 기다려야 할지. 백옥 같던 요 내 손길 오리발 되고, 삼단 같던 요 내 머리 비사리춤 될 때는 아니겠지요.

 설문지
설문지김홍주선

고전문학을 집중적으로 접하는 건 역시 학교 국어시간. 2007년 10월 설문조사를 위해 서울 도곡동 소재 숙명여자고등학교를 찾았다. 설문조사는 국어담당선생님의 도움으로 17살, 18살 학생 82명을 대상으로 미리 작성한 객관식, 주관식 문항의 설문지를 통해 실시했다. 

‘고전문학에는 주몽신화와 같은 영웅서사구조 작품이 등장한다. 주체적인 여성이 등장하는 작품을 알고 있는가’라는 질문에 5명을 제외한 77명의 학생들이 ‘그렇다’고 답했다. 75명의 학생들은 대표적인 작품으로 ‘박씨전’을 꼽았다. 홍계월전, 정수경전, 방한림전, 운영전, 금방울전까지 최고 6개를 꼽은 학생이 1명 있었다.

‘학습교재에서 수동적, 소극적 화자를 ‘여성적’, 그 반대를 ‘남성적 화자’라고 표현한 문구를  보았는가’라는 질문에 본 적 없다는 대답은 4명, 가끔 1-2회 보았다는 대답이 14명, 5-6회 혹은 종종 보았다는 대답이 36명, 거의 매번 그렇다는 대답이 24명, 무응답이 4명 있었다.

이에 대한 의견을 묻는 주관식 문항에는 총 49명이 답변했는데,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냥 그러려니 했다” 등의 대답이 15명, “알기 쉬워 좋았다”, “좋았다”, “의미전달이 잘 됐다” 등의 긍정적 대답이 3명, 부정적인 대답이 31명 있었다.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한 부정적인 대답의 내용으로는 “남자와 여자의 성향을 획일적으로 구분지어 놓고 학생들에게 여성적, 남성적이라는 것을 주입시키고 있다”,”맘에 안듦”,”웃긴다. 맘대로 여자는 수동, 소극, 남자는 그 반대라고 하는 건 말도 안 된다”,”왜 항상 여자는 님을 그리워하고 못 잊어야하나”,”답답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는 바뀌어야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여성도 충분히 강할 수 있는데”, “성에 대한 편견이 있다”, “남녀차별”, “짜증난다”, ”씁쓸”, “김소월은 게이인가” 등이 있었다.

적은 숫자이기 때문에 표본으로서의 가치는 없지만, 기사작성에 앞서 참고가 되었다. 설문에 응해준 82명의 학생들에게 감사를 전한다.

#심청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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