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풍속화, '도시의 삶'을 그리다

황주리 회고전(1980~2008), 갤러리현대에서 2월 13일까지

등록 2008.01.29 17:07수정 2008.01.31 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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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학' 2007. 경복궁 동문 쪽에 있는 갤러리현대 황주리전 홍보용 현수막 ⓒ 김형순

'식물학' 2007. 경복궁 동문 쪽에 있는 갤러리현대 황주리전 홍보용 현수막 ⓒ 김형순

 

종로구 사간동 갤러리현대(두가헌갤러리 포함)에서 2월 13일까지 '1980~2008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라는 제목으로 황주리 작가의 대규모 회고전이 열린다. 이번 전에는 연대별로 100여점 작품이 전시되어 30여 년간 그의 작품을 한눈에 감상할 수 있다. 

 

황주리는 80년 첫 전시회를 마치고 그 후유증으로 다시는 그림을 그리지 못할 거 같은 허탈감에 빠졌다고 들었다. 하지만 이젠 30년 회고전을 열고 있으니 그는 분명 긴 세월과 싸워 너끈히 이겨낸 승자로 우뚝 선 셈이다. 어디서 그런 열정과 용기와 에너지가 나오는지 궁금하다.

 

하찮은 일상에서 영원한 시간을 건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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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에 관한 명상' 파인아트지에 아크릴릭 162×130cm 2007. 작가는 "여행하는 마음은 욕심 부리지 않는 마음이고, 사물을 소유하는 일보다 눈길로 만져본 풍경의 소중함을 깨닫는 마음이다"라고 말한다. ⓒ 김형순

'여행에 관한 명상' 파인아트지에 아크릴릭 162×130cm 2007. 작가는 "여행하는 마음은 욕심 부리지 않는 마음이고, 사물을 소유하는 일보다 눈길로 만져본 풍경의 소중함을 깨닫는 마음이다"라고 말한다. ⓒ 김형순

 

황주리는 하찮고 평범한 것에서 기적처럼 그림을 건진다. 그에게 있어 그림 아닌 것이 없다. 모든 것이 그림의 오브제가 되고 창작의 모티브가 된다. 그는 그림을 통해 사람과 사물을 보고 만나고 대화하고 소통한다.

 

일상이라는 캔버스에 일기를 쓰듯 수많은 삶의 흔적과 마음의 풍경을 담고 있다. 옴니버스작품을 모은 '여행에 관한 명상'에서 보듯 일상이 주는 추억과 주변의 삶이 그림으로 변한다. 다채롭게 경험한 세계의 합창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다. 

 

그는 이번 회고전과 동시 출간한 산문집 <땅을 밟고 하는 사랑은 언제나 흙이 묻었다>에서 "우린 모두 언젠가는 멈출 수밖에 없는 시계 하나씩을 가슴속에 품고 산다"라는 극(劇)의 한 대사를 인용한다. 이는 그가 매순간을 얼마나 소중히 안고 사는지를 알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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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에서' 캔버스에 아크릴릭 162×131cm 1993 ⓒ 김형순

'땅에서' 캔버스에 아크릴릭 162×131cm 1993 ⓒ 김형순

 

그의 이런 라이프스타일은 그가 평생 수집광이라는 점과도 무관하지 않다. 뭔가 모이고 쌓이면 큰 힘이 되고 어떤 난관도 극복할 수 있다는 신념, 스쳐가는 시간 속에 꿈과 비전을 심고 뿌려 유적 같은 작품을 남기고 싶다는 무의식적 욕망이 뒤엉켜 있다.

 

위의 '땅에서'라는 제목이 암시하듯 무한한 시간 속에 유한한 존재로 살아가야 하는 자의 고민이 엿보인다. 작가는 어려서 "외할머니가 너 중학교까지 살겠니?" 하는 말에 충격을 받고 죽음을 인식하기 시작했고 이에 대한 대안으로 그림을 생각했다며 이렇게 고백한다.

 

"죽음에 대한 공포를 극복하는 방법으로 내가 고안한 게 그림그리기였다"

 

수많은 자화상, 시대정신의 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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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화상' 캔버스에 아크릴릭 162×131cm 2000 ⓒ 김형순

'자화상' 캔버스에 아크릴릭 162×131cm 2000 ⓒ 김형순

 

황주리는 고흐나 렘브란트처럼 자화상을 많이 그린다. 앞으로도 또 그릴 것이다. 그의 자화상은 시대상황에 영향을 받는다. 이는 또한 작가가 그 시대를 어떻게 보고 있는가를 추리할 수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2000년의 황주리 자화상에서 보듯 그는 지적이고 세련되고 우아한 여자이고 서울과 뉴욕을 오가며 그림을 그린 도시의 화가다. 그러나 문명의 혜택만큼 자연의 혜택은 누리지 못해서 그런지 도시적 쓸쓸함과 외로움이 여전히 몸에 묻었다.

 

그의 자화상은 자신을 찾아가는 여행이자 삶을 제대로 살아보려는 몸부림인지 모른다. 때론 타인의 거울로 자신을 비추며 인생과 행복과 사랑에 대해 진지하게 탐색하는 과정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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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화상' 파인아트지에 피그먼트 잉크 80×100cm 2007. 아래는 전시 오픈하는 날 작가의 사진. 서로 많이 닮은 것 같다 ⓒ 김형순

자화상' 파인아트지에 피그먼트 잉크 80×100cm 2007. 아래는 전시 오픈하는 날 작가의 사진. 서로 많이 닮은 것 같다 ⓒ 김형순
 

2007년 자화상은 2000년 자화상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힘이 넘친다. 젊은 팝아트 풍으로 어깨에 힘이 들어가 있다. 한국에서 여성작가로 살아간다는 것이 전투였음을 보여주는 것 같다. 결혼할 틈도 없이 자신과 약속을 지키며 그림에만 몰두하며 살아온 모습이다. 

 

작가의 자신감은 남과의 경쟁에서 이기는 자만심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과 싸움에서 이긴 자부심에서 온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과 싸움이 가장 치열하기 때문이다. 그런 뿌듯함이 위 작품에 듬뿍 배여 있다.

 

외로운 도시의 21세기 풍속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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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학' 캔버스에 아크릴릭과 오일 파스텔 161×131cm 1996 ⓒ 김형순

'식물학' 캔버스에 아크릴릭과 오일 파스텔 161×131cm 1996 ⓒ 김형순

 

황주리는 자화상 이상으로 우리의 살아가는 사회상도 그리고 있다. '식물학' 같은 작품은 뉴페인팅 풍의 21세기 풍속화로 사실적이라기보다는 상징적이고 은유적이다. 도시에 사는 사람들의 거칠지만 진솔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는 '삶의 70%는 사막이고 30%는 오아시스'라고 했던가? 작가의 말대로 메마를 대로 메마르고 황폐해진 시대에 고독한 개인으로 살아가는 인간군상을 그리고 있다. 그러나 '식물학' 연작은 그 제목처럼 하늘로 쭉쭉 뻗어나는 생명의 힘과 도약의 정신도 품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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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안의 풍경' 캔버스에 아크릴릭과 오일 파스텔 131×162cm 1997 ⓒ 김형순

'그대 안의 풍경' 캔버스에 아크릴릭과 오일 파스텔 131×162cm 1997 ⓒ 김형순

 

'그대 안의 풍경'도 '식물학'처럼 도시문명의 주는 혜택과 함께 그 이면에 가려진 현대인의 소외와 좌절도 예리하게 파헤친다. 이는 바로 우리들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그의 그림에 등장하는 대부분 사람은 눈을 지그시 감고 골똘히 생각중이다. 그 표정은 담담하고 때로는 일그러져 있다. 사람들은 흩어진 삶의 파편을 주워 담기에 하루가 모자란다. 하긴 이 세상 누가 하루라도 마음 편히 그냥 넘어갈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작가는 인간에 대한 연민과 따뜻한 시선을 놓치지 않는다. 일상 속에서도 스쳐가는 사소한 즐거움이나 정겨움을 품고 꿈과 행복을 노래한다.

 

미묘한 갈등 속 연애 풍속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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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 캔버스에 아크릴릭과 오일 파스텔 117×91cm 1996. 아래 '삶은 어딘가 다른 곳에(부분화)' 1998 ⓒ 김형순

'두 사람' 캔버스에 아크릴릭과 오일 파스텔 117×91cm 1996. 아래 '삶은 어딘가 다른 곳에(부분화)' 1998 ⓒ 김형순

 

그의 그림에는 젊은 연인들이 연애하는 장면이 많이 나온다. 뜨겁게 입 맞추는 장면은 압권이다. 18세기 조선시대 혜원(蕙園)과는 다른 우리시대의 연애 풍속화를 그리고 있다. 하긴 연애야말로 인간의 행복과 기쁨이 극적으로 압축된 가장 인간적 풍경이 아닌가.

 

위 '두 사람'도 분명 연인인 것 같은데 뭔가 잘 풀리지 않는 모양이다. 인생의 공식은 어찌 보면 아주 단순하지만 두 사람이 결혼한다는 것이 그리 만만하거나 쉬워 보이지는 않는다.

 

하지만 두 사람은 난해한 사랑의 공식을 풀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 같다. 낡은 바지를 입은 남자는 월급봉투를 들고 있는데 돈이 문제인가보다. 또한 남자 속마음을 찍는 여자는 남자를 믿을 수 없다는 것인가보다.

 

화가는 24시간(?) 눈을 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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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화상' 파인아트지에 피그먼트 잉크 80×100cm 2007 ⓒ 황주리

'자화상' 파인아트지에 피그먼트 잉크 80×100cm 2007 ⓒ 황주리
 
하여간 황주리의 그림에는 거의 다 눈이 붙어 있다. 그에게 보는 것은 바로 사는 것이다. 그는 24시간(?) 눈을 뜨고 있다. 물론 밤중에는 눈을 감겠지만 그 정도로 사람과 사물을 꿰뚫어보고 있다는 뜻이다. 랭보는 시인을 '보는 자(voyant)'라고 했는데 그와 다르지 않다.
 
그는 두 손을 모으고 기도하듯이 눈을 통해 삶을 기록하고 꿈을 찍고 시대를 증언한다. 그러기에 그의 눈길은 예리하고 날카롭다. 그러나 그의 미소는 부드럽고 따뜻하다.
 
균형감 있게 삶의 추악하고 끔찍한 면도 선하고 아름다운 면도 나란히 그린다. 물방울로 바위를 뚫듯 하찮은 일상에서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유물 같은 작품을 이끌어낸다.
덧붙이는 글 [전시장소개] 갤러리 현대 www.galleryhyundai.com 전화 734-6111~3
종로구 사간동 80.  경복궁 동문 쪽. 오전 10시~오후 6시(월요일 휴관). 2월13일까지 입장무료

[작가소개] 황주리 1957년 서울 생. 이화여대 서양학과, 홍익대 대학원 미학과, 뉴욕대 대학원 졸업. 90년대 서울과 뉴욕을 오가며 10여 년 작업함. 25회 개인전. 100회 그룹전. 산문집 <세월>, <날씨가 너무 좋아요>, <아름다운 이별은 없다> 등이 있다. 신간 <땅을 밟고 하는 사랑은 언제나 흙이 묻었다(생각의 나무)>를 내다. 번역서는 <행복한 여행자>가 있다. 석남미술상, 선미술상을 수상하다.
#황주리 #갤러리현대 #자화상 #풍속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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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중 현대미술을 대중과 다양하게 접촉시키려는 매치메이커. 현대미술과 관련된 전시나 뉴스 취재. 최근에는 백남준 작품세계를 주로 다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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