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역사팩션] 제국과 인간 11회

신규식의 출정과 제국주의 담론

등록 2008.01.29 16:35수정 2008.01.31 1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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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문이 열렸다.
“충청도 문의 신공이라고 전하시오.”
잠시 후 김인용의 아들이 화급히 나왔다. 그는 공손히 절부터 올렸다.
“안녕하셨습니까? 신 선생님. 저는 이 집 아들 태수입니다. 아버님께서 속히 올려 모시라고 했습니다.”

태수는 어렸을 때 본 얼굴이 아직 남아 있었다.
“몰라보게 성장했구나.”
신규식은 태수의 안내로 중문을 건너 안채로 들어섰다. 김인용이 섬돌에 나와 신규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신공, 어서 오시오 정말 반갑구려.”
“안녕하셨습니까? 사돈어른. 숙모께서도 평안하시지요?”
“아, 그럼요. 태수야 절 올려라. 문과 무와 예를 갖추신 우리 고향 신동이시다.”

김인용은 진심으로 신규식을 반기는 것 같았다. 하기야 장안에서 김인용의 친척이라고 는 신규식이 유일한지도 몰랐다.
“평소 아버님 말씀으로 전해 듣고 우러르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김태수는 격식에 조금도 벗어남이 없이 절을 올리고는 뒷걸음질로 방을 나갔다.
“어른께 배움을 얻고자 왔습니다.”
“무식한 내가 신공께 무엇을 가르친다는 말이오?”
“중국을 잘 아시지 않습니까?”
“그건 좀 그런 편이지요.”
“조선을 한양이라고 했을 때, 중국 땅에서 반도의 말죽거리 격인 곳을 고르라면 어디를 선택하시겠습니까?”

신규식은 말죽거리의 이모저모에 대해 말해 주었다. 김인용은 말죽거리의 어원과 위치 외에는 달리 아는 바가 없었지만, 신규식의 설명을 귀를 세우고 경청했다. 그는 신규식의 말이 끝났는데도 한동안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가장 유사한 곳은 일차로 상해입니다.”
“상해라고요?”
신규식은 가슴이 벅차올랐다. 자기 생각하고 같았기 때문이었다.


김인용은 왜 상해인지를 조목조목 설명했다. 역시 그는 중국에  통달하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신규식은 신발을 신으며 사의를 거듭 표했다.
“아니오. 신공, 오히려 내가 고맙소.”
“무슨 말씀을?”
“나도 말죽거리 땅에 관심이 많아졌어요. 허허허.”

신규식의 희망은 대륙으로부터 전해 오는 새로운 소식을 들으며 더욱 구체성을 띠어 갔다. 그것은 중국의 혁명이 성공할 조짐을 명확히 보이고 있다는 점이었다. 중국의 혁명은 2,000년 간이나 지속되어 온 전제 군주제를 붕괴시키고 있었다. 청나라는 외세의 속국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중국의 혁명 정부는 항일, 반외세의 기치를 내걸고 있었다.


열강에 대한 청나라의 굴종적 자세는 심화되었고, 부정부패로 인한 국민의 생활고는 가중되고 있었다. 1905년 각지의 반 왕조 세력은 중국 최초의 근대 정당이라 할 수 있는 중국혁명동맹회를 결성했다. 청나라 조정도 이에 반응하여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는 운동을 벌였으나 국민은 조정에 냉소를 보냈다. 국민들의 동향은 세납을 거부하면서 대중 투쟁으로 치달았다. 이에 합세하여 일본 유학파와 청년 지식인들이 봉기하였고, 이것은 무장 투쟁으로 발전하였다. 특히 사천과 우창에서의 성공은 중국 혁명을 성사시키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격렬한 혁명의 중심에는 중산 손문이 있었다. 광동성에서 태어난 그는 의사에서 혁명가로 변신한 지도자였다. 혁명의 과정에서 그는 몇 번의 좌절을 겪어야 했다. 그는 무장 봉기의 실패 이유를 자금 부족이라고 판단했다. 그는 미국으로 건너가 엄청난 군자금을 확보했다. 그리고 청년들과 다시 봉기하여 우창 점령에 성공했다. 이를 시작으로 각지의 성들이 독립을 선언하여 거의 모든 성들이 손중산의 노선에 동조했다. 이어서 난징 정부가 수립되었고 손중산은 대총통으로 추대되었다. 삼민주의를 지도 이념으로 하는 중화민국은 이렇게 하여 탄생된 것이었다.

신규식은 재산을 처분하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이 관여하고 있던 광업회사와 도자기 공장으로부터 자금을 뺐다. 아내 조정완도 큰 몫을 했다. 그녀는 세 차례 이상 친정에 다녀왔다. 결과 그는 2만원의 자금을 현찰로 확보했다. 쌀, 만 삼천삼백삼십 가마를 살 수 있는 금액이었다. 그는 이미 민족 독립을 위한 자신의 행로와 방법론을 결정해 놓고 있었다.

“상해에 임시정부를 만든다. 그러기 위해서는 중국과의 우호 관계가 필수적이다. 이를 이루기 위해 손중산의 혁명군이 되어 혁명도 배우면서, 그 혁명 정부와 돈독한 우정을 쌓아간다.”

꽃잎에 흙먼지가 이는 날이었다. 산과 강의 살구꽃 진달래가 흔들거렸다. 흰나비 노랑나비들이 흙바람에 쏠렸고 제비들이 낮은 허공을 화살같이 비행했다. 가르마 같은 논길 위에서 쫓기는 아지랑이가 사그라지고 구름 그림자가 호수의 수면 위를 괴물처럼 부유하고 있었다. 알을 까는 뻐꾸기 소리가 유달리 처절한 반면 부엉이는 눈만 꿈벅이며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신규식의 준마는 모든 것을 아랑곳하지 않고 달리고 있었다. 카이저 식 수염이 검은 선글라스와 함께 흔들렸지만 그의 굳은 입술을 감추지는 못했다. 그는 하얀 뱀처럼 움직이는 실개천의 허리를 한숨에 넘어 건넜고 느닷없이 쏟아지는 빗줄기에도 뺨을 훔치려 하지 않았다. 마침내 파란 하늘빛이 나타났을 때, 비로소 그는 정자나무 기둥에 말을 묶더니 바위 아래 시냇물을 몇 차례씩이나 손으로 움켜 마셨다.

먼 데서 황소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듯했고, 찔레나무 가시덤불에서 파랑새가 울었다. 그는 떡갈나무 우거진 산길을 흘겨보고는 다시 말 위로 올랐다. 구름 모여 있는 곳에 골짜기가 있었고 그 골짜기를 따라 나 있는 등성이 하나를 넘어야 주막이라도 나올 성싶었다.

동방은 하늘도 다 끝나고
비 한 방울 내리잖는 그 때에도
오히려 꽃은 빨갛게 피지 않는가?
내 목숨을 꾸며 쉬임 없는 날이여.
북쪽 툰드라에도 찬 새벽은
눈 속 깊이 꽃맹아리 옴작거려
제비 떼 까맣게 날아오기를 기다리나니
마침내 저버리지 못할 약속이여
밤마다 복판 용솟음치는 곳
바람결 따라 타오르는 꽃성에는
나비처럼 취하는 회상의 무리들아
오늘 내 여기서 너를 불러 보노라.
이육사, <꽃>


필호는 형, 제호와 함께 종남산을 넘고 있었다. 필호는 이제 곧 형과 이별하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사실 필호의 예감대로 제호의 출국은 불과 일주일 앞으로 예정되어 있었다. 제호는 누구보다도 어린 동생 필호가 걱정스러웠다. 그래서 동생과 함께 소풍을 나온 것이었다. 제호는 출국 준비로 이런저런 일이 걸려 있었지만 오늘 하루만은 전부 동생을 위해 쓰고 싶었다.

그들은 종남산 약수터에 들렀다. 남산의 동쪽 봉우리를 그때는 그렇게 불렀다. 필호는 이마에 맺힌 땀을 손바닥으로 닦은 후에, 형이 받아 주는 차가운 약수를 벌컥벌컥 마셨다. 그러고는 남은 물을 돌려 표주박을 부시더니 형에게 공손히 되돌려 주었다. 그들은 작은 봇짐 하나씩을 등에 지고 있었다. 제호는 산에 올라가 좋은 자리를 잡아 동생과 함께 밥도 지어 먹으며 하루를 재미나게 보낼 요량이었다.

형제는 땀을 쏟으며 종남산을 넘었다. 한강이 시원하게 보이고 있었다. 그들은 한강 쪽으로 내려가다가 물이 많이 흐르는 골짜기에 자리를 잡았다. 그들은 봇짐에서 취사도구를 꺼내 밥을 지었다. 필호가 거들려 했지만 제호는 동생더러 그냥 앉아 있으면 된다고 했다. 제호는 반찬을 꺼내 자리에 상을 차렸다. 그는 수저와 나무젓가락을 챙겨 동생에게 건넸다. 이제 떠나면 다시 동생을 본다는 보장은 없었다. 그래서 동생에게 도움이 되는 얘기라도 될수록 많이 들려주고 싶었다. 제호는 동생의 이름을 정겹게 불러 보았다.

“필호야!”
“예.”
형과 동생은 서로 얼굴을 마주 보았다. 동생은 아직 애티가 가시지 않는 얼굴이었다. 제호는 가슴이 뭉클해졌다. 어린 것의 공부를 더 뒷바라지해 주지 못하고 가는 마음이 아팠다.
“요즈음 학교는 재미있냐?”

한성어학교를 마친 제호는 아직 휘문의숙에 다니는, 여덟 살이나 연하인 동생에게 물었다.
“재미는 있지만 보람은 없습니다.”
“보람이 없다니?”
“작년에 나라가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나라 없는 백성이 어떤 일을 한들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래. 꼭 책에 나오는 애국자처럼 말을 하고 있구나. 그렇다면 너는 왜 우리나라가 없어졌는지 알고는 있니?”

필호는 대답하지 못했다. 일본에게 빼앗겨서라는 대답을 들으려고 묻는 것은 아닐 터이기 때문이었다. 또한 우리가 못나서라는 대답도 형에게는 통하지 않을 거였다. 사실 형은 머리가 비범한데다, 외국어도 잘할 뿐더러 독서량도 엄청난 사람이었다. 그에게는 언제나 명석한 판단과 예리한 분석이 있음을 필호는 알고 있었다.

“필호야, 제국주의라는 말은 들어 보았지?”
“네. 들어 보긴 했습니다.”

덧붙이는 글 | 묻힌 역사와 잊혀진 인물을 재발견함으로써 식민지 역사 청산을 온전히 하기 위한 소설입니다.


덧붙이는 글 묻힌 역사와 잊혀진 인물을 재발견함으로써 식민지 역사 청산을 온전히 하기 위한 소설입니다.
#신규식 #민필호 #제국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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