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수위와 이경숙씨의 '산 영어'에 대한 환상

몰입보다 체계적인 지도가 중요하다

등록 2008.01.31 08:16수정 2008.01.31 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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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직인수위원회가 전격적인 영어 지도를 위해 새로운 방향을 내놓은 후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최근에 이경숙 대통령 인수위원장은 초등학교 때부터 학생들이 '산 영어'를 하게 하겠다고 하였다. 영어 교육에 대한 여러 의견과 논란은 건설적인 것이다. 다만 인수위가 비판적인 견해를 가진 사람들에게도 귀를 기울여 주기를 바란다.

얼마 전 미국에서 십 수년간 주유소 겸 간이잡화점 (convenience store)을 하는 친구의 가게에 들렀다. 마침 한 미국인이 몇 가지 물건을 계산대로 가지고 왔다. 이 친구의 가게에서는 계산대에 미국인을 고용하고 있지만 그 시각에 그 사람이 부재중이어서 이 한국인 친구가 계산을 했다. 그런데 이 미국인 손님은 물건 값으로 10달러를 내놓았다. 한국인 주인이 계산해 보니 물건값의 총액이 10달러를 넘었다.

미국에서 10년 넘게 살아도 엉터리 영어 써

그래서 이 친구는 아마 "물건 값이 다 합해 13달러인데 당신은 10달러만 주셨군요" 하고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긴 영어를 하기가 곤란한 이 친구는 "당신은 10달러를 제게 주셨는데요" 하는 말로 "You give me ten dollar" 하고 말했다. 전후 상황으로 보아 "You gave me ten dollars"라고 말해야 옳았다.

그러나 미국에서 10년이 넘게 산 이 친구는 사뭇 엉터리 영어를 하고 있었다. 다행이 그 미국인은 무슨 말인지를 알았다. 자기가 방금 10달러를 주었고, 물건값은 그 부근인데 주인이 이견을 말하니 물건값을 다시 살펴본 것 같다. 그래서 미국인 손님은 돈을 더 주었고 상황은 무사히 넘어 갔다.

이것이 많은 이민자들의 영어 상황이다. 수 십년간 미국에 산 사람들이 복수형이나 소유격의 '-s'는 예사로 잘라 먹고 과거형도 잘 쓰지 않는다. '맥도널드스' (McDonald's)를 보통으로 '맥도날드'라고 한다. 발음도 여전히 한국식 발음이다.

필자는 30년간 미국에서 산 사람이 '뉴욕'을 '뉴뇩'이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이것을 보면 "영어를 쓰는 나라에 살면 영어를 한다"는 생각이 옳지 않음을 말하는 것이다. 맞다. 영어를 하긴 한다. 그러나 어법이나 발음을 고치지 않은 채로 수십년을 간다. 이것은 몰입 (immersion)만 가지고는 언어를 바르게 습득하기 어렵다는 것을 말해 준다.


미국인들은 어떻게 영어를 배우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전통적으로 미국인들은 자식들이 아주 어릴 때부터 잠자기 전에 책을 읽어 준다. 그러는 가운데 아이들은 많은 어휘를 배우게 되며 또한 맞는 어법을 배운다.

연구에 의하면 태어나서 다섯살까지 정상적으로 미국인 가정에서 자란 아이는 약 10,000개의 단어를 습득한다. 여기에는 물론 'a,' 'I,' 'the' 등의 간단한 단어까지 포함된다. 또한 미국 가정의 아이들도 초기에는 비문법적인 문장을 말하기도 하나 대체로 초등학교 2학년 무렵에는 기본적인 문법체계가 갖추어진다.


하지만 필자는 미국에서 태어난 한국 교포의 자녀 가운데 3학년에 다니는 아이가 "내 것이 더 좋아" 하는 말로 "Mine is more better"라는 어법에 어긋나는 말을 쓰는 것을 들었다. 미국 아이들은 이런 문장을 부모가 있는 데서 쓰면 부모는 "'Mine is better'라고 말해라" 하면서 고쳐 준다. 혹은 "오, 네것이 더 좋다구?" ("Oh, is yours better?")하고 되물으면서 어법을 수정해 준다.

하지만 부모가 이런 자연스러운 수정을 해주지 않는 나머지 교포 자녀는 틀린 어법 그대로를 오래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부모와 자녀 간의 항시적인 언어 교류가 부족한 나머지 이민자의 자녀들이나 경제적으로 어렵게 사는 미국인들의 자녀는 문장 형태뿐 아니라 어휘 습득에서 정상적인 미국 아이들에게 뒤진다. 초등학교 2학년에서 상위 1/4의 언어 능력을 지닌 아이들과 하위 1/4의 언어 능력을 지닌 아이들은 무려 4,000 단어의 차이가 난다. 그러니까 미국에 살면서 다 같은 영어를 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가르치는 사람 자신이 '산 영어'를 하는 사람이어야

자, 그런데 이경숙 인수위원장은 초등학교 때부터 '산 영어'를 가르치겠다고 한다.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어떻게" 가르치겠다는 것인가? 첫째는 가르치는 사람 자신이 '산 영어'를 하는 사람이어야 하고, 둘째로는 가르치는 방법이 아주 좋아야 한다. 한국어를 말하는 사람이라고 다 한국어를 잘 가르칠 수 없듯이 영어를 쓰는 사람이라고 다 영어를 잘 가르치는 것은 아니다.

본인은 교육학적인 연구와 개인적인 체험으로 영어 말하기, 듣기를 가르치는 아주 좋은 방법 한 두 가지를 알고 있다. 이 방법들은 이미 많은 실험 연구 결과 그 효과가 입증된 것들이다. 그러나 현재 인수위가 거론하는 '몰입'의 방법은 아주 성과가 느릴 뿐 아니라 그 성과를 장담할 수 없는 방법이다.

필자가 보기에 인수위는 영어 습득에 대해 지나친 환상을 가진 듯하다. 필자가 생각할 때 가장 좋은 방법은 몇몇 시범 학교를 정해 '몰입'을 비롯하여 영어를 쓰는 나라에서 사용하는 학습지도 방식들을 각기 다른 학교나 학급에서 사용한 다음 어느 방법으로 학생들이 가장 잘 배우는지를 테스트하여 효과적인 방법을 가려내야 한다.

그리고 그 가장 잘 되는 방법으로 교사 훈련을 시키고 여러 학교에서 사용하도록 해야 한다. 그런 데이타에 입각해서 정책을 만드는 것이 느릴 것 같지만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영어 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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