썩은 선비들처럼 글만 읽고 있겠습니까

[누가 이 나라를 지켰는가 21] 광산 - 오성술 의병장 (2)

등록 2008.01.31 19:39수정 2008.02.04 1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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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아버지에 그 아들

 

a  오성술 의병장

오성술 의병장 ⓒ 오용진

오성술 의병장 ⓒ 오용진

오성술 의병장은 1884년 전남 광산군 삼도면 송산리 죽산 마을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나주로 본명은 인수(仁洙), 자를 성술(成述), 호를 죽파(竹坡)라 하였다. 참봉이었던 아버지 오영선(吳榮善)은 마을에서 상당한 재산과 영향력을 가진 분으로, 외아들 오성술은 유복한 유년시절을 보냈다.

 

그는 여덟 살 때 후송(後松) 양상하(梁相賀)에게 학문을 배우고, 18세 때 후석(後石) 오준선(吳駿善)이 강학하던 용진정사에서 경학과 도학을 공부하였다. 1905년 21세의 나이로 참봉을 제수 받은 뒤 오참봉으로 불렸고, 뒷날 그의 의병부대마저도 오참봉 의병부대로 불렸다.  

 

1905년 11월에 을사늑약으로 망국에 이르게 되자 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이 ‘청토오적소(請討五賊疏)’와 ‘창의토적소(倡義討賊疏)’를 올려, 매국 대신들을 처단할 것을 요구하며 구국 의병항쟁을 주창하였다. 1906년 1월, 면암이 충남 논산 노성의 궐리사에서 각지 유림을 모아 시국강회를 열고는 국권회복투쟁에 동참할 것을 촉구하였다.

 

이 시국강회에 참석한 오성술은 강회가 끝난 뒤 면암을 만나 창의의 뜻을 밝히자, 면암은 “나는 이미 늙은 몸, 그대와 같은 열혈청년들이 나서겠다니 마음 든든하네. 천하 대세와 나라의 형편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마땅히 일사보국(一死報國)할 기회가 온 것이 아니겠는가. 한시도 지체하지 말기를 바라네”라고 당부하였다.

 

이때부터 오성술은 거의(擧義) 준비를 서둘렀다. 병서를 탐독하며 널리 동지를 모으고자 동분서주하였다. 그는 아버지에게 “나라의 흥망이 경각에 이르렀습니다. 소자 비록 백면서생이오나 혈기방장하온데, 썩은 선비들처럼 글만 읽고 앉아 있겠습니까?”하고 거의의 뜻을 펴자, 아버지 오영선은 이에 적극 찬동하며 전답 50여 마지기를 팔아 군자금을 마련해 주었다.

 

a  손자 오용진씨가 할아버자 무덤을 가다듬고 있다. 할아버지의 고마워하는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손자 오용진씨가 할아버자 무덤을 가다듬고 있다. 할아버지의 고마워하는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 박도

손자 오용진씨가 할아버자 무덤을 가다듬고 있다. 할아버지의 고마워하는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 박도

 

창의 깃발을 들다

 

1907년 2월, 오성술은 고향마을 용진산을 근거지로 창의(倡義; 의병을 일으킴) 깃발을 들었다. 그때 오성술 의병부대의 편제는 다음과 같았다.

 

대장 오성술

도통장 오상렬(吳相烈) 선봉장 김성현(金聖鉉) 중군장 오원규(吳元圭)

도포장 김봉선(金奉先) 호군장 이종석(李鍾晳) 후군장 양치홍(梁治洪)

좌익장 오성범(吳聖範) 우익장 양지술(梁志述) 운량장 김목사리

 

a  일제의 '남한대토벌작전'으로 체포된 호남의병장들(앞줄 가운데가 오성술 의병장이다).

일제의 '남한대토벌작전'으로 체포된 호남의병장들(앞줄 가운데가 오성술 의병장이다). ⓒ 박도

일제의 '남한대토벌작전'으로 체포된 호남의병장들(앞줄 가운데가 오성술 의병장이다). ⓒ 박도

이 무렵 나주 출신의 의병장 김태원이 합진(合陣; 부대를 합침)을 제의해 왔다. “창의의 목적이 똑같은데 제 각지에서 흩어져 싸우면 적에게 허점만 드러낼 뿐일세”라는 명분에 오성술은 참모회의를 거쳐 김태원 의병부대와 합진하여 막좌(幕佐 우두머리 참모)가 되었다.

 

오성술은 김태원 의병부대 막좌로서, 고창 문수사 전투와 김태원 의병장이 앞장 선 호남창의회맹소의 영광 법성포 탈환 작전, 창평 무동촌 전투에도 참전하여 큰 전과를 올렸다.

 

호남창의회맹소는 법성포 전투 직후에는 일제 군경의 추격을 피하고자 부대를 분산하여 활동케 되었다. 오성술은 이때부터 독립된 의병부대를 이끌면서 호남평야를 무대로 경제 침탈을 자행하던 일제 응징에 전력을 기울였다. 1908년 1월, 오성술 의병장은 20여 명의 부하를 이끌고 광주군 마지면 일본인 농장과 광주군 대지면 전촌에 있는 일본인 농장을 습격하여 농업 수탈에 앞장선 지주들을 응징하였다.

 

이합집산 전술로 적을 교란하다

 

호남창의회맹소를 중심으로 한 호남의병의 활동이 날로 격화되자, 1908년 초부터 일제는 대대적인 의병 탄압을 감행하였다. 이에 따라 호남창의회맹소를 이끌던 기삼연 의병장이 그해 2월 순창에서 일제 군경에 붙잡혀 광주 서천교 백사장에서 총살당했다. 이어 오성술 의병장과 의형제를 맺어온 김태원 의병장도 그해 4월 광주 어등산전투에서 치열한 교전 끝에 전사 순국하고 말았다.

 

오성술 의병장은 이때부터 의병부대를 더욱 소규모로 나누어, 다른 부대와 수시로 이합집산하며 일제 군경을 교란하였다. 이는 한층 더 강화된 일제 군경에  대항하는 효과적인 전술로 많은 전과를 올릴 수 있었다. 이후 오성술 의병부대는 전해산(全海山), 심남일(沈南一), 안규홍(安圭洪) 의병부대와도 이합집산을 거듭하는, 단독 또는 연합전선으로 대일 항전을 펼쳐나갔다.

 

a  오성술 의병부대의 석문산 전적지를 가리키는 오용진씨

오성술 의병부대의 석문산 전적지를 가리키는 오용진씨 ⓒ 박도

오성술 의병부대의 석문산 전적지를 가리키는 오용진씨 ⓒ 박도

 

1908년 7월, 오성술 의병부대는 전해산 부대와 연합하여 광산군 미량면 석문산 전투에서 일본군과 싸워 승리하였고, 그해 10월 함평 대명동 전투에서도 일본군 7인을 사살하고 숱한 무기를 노획하는 전과도 올렸다. 또, 오성술 의병부대는 일제 끄나풀인 밀정 처단에도 주력하였다. 1908년 12월에는 나주군 이노면(현, 노안면) 신기촌의 밀정 황아무개를, 이듬해 2월에는 나주군 신촌면 곡룡동의 밀정 나아무개를 잡아 처단하기도 하였다.

 

1909년 1월 1일 새벽  오성술 의병부대는 전해산 부대와 연합으로 고막원 일제 헌병분파소를 습격하여 헌병 보조원 2인을 사살하고, 다수의 무기를 노획하는 전과를 거두기도 하였다. 그러면서 오성술 의병부대는 일제 군경의 예봉을 피해 나주 문평의 용문산, 광주의 용진산으로 근거지를 수시로 옮기면서 끈질긴 대일 항전을 펼쳐나갔다.

 

a  호남의병들의 근거지였던 용문산

호남의병들의 근거지였던 용문산 ⓒ 박도

호남의병들의 근거지였던 용문산 ⓒ 박도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독립기념관 연구원 박민영 박사가 쓴 “오성술 선생의 생애와 호남의병”과 국가보훈처의 “공훈록”을 바탕으로 썼음을 밝힙니다.

2008.01.31 19:39ⓒ 2008 OhmyNews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독립기념관 연구원 박민영 박사가 쓴 “오성술 선생의 생애와 호남의병”과 국가보훈처의 “공훈록”을 바탕으로 썼음을 밝힙니다.
#의병장 #오성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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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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