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찮고 부족했지만 마음만은 넉넉했던 설날

"동상은 대목장 봐다 놨능가?"

등록 2008.02.05 14:18수정 2008.02.05 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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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장에 나갔다가 코흘리개시절이 떠올라 카메라에 담아보았습니다. 백열등이 켜있는 가게들과 하늘이 훤히 보일정도로 찢겨진 천막이 고향의 장터를 떠올리게 하더군요.

장에 나갔다가 코흘리개시절이 떠올라 카메라에 담아보았습니다. 백열등이 켜있는 가게들과 하늘이 훤히 보일정도로 찢겨진 천막이 고향의 장터를 떠올리게 하더군요. ⓒ 조종안


민족의 최대 명절인 설날이 이틀 남았습니다. 새해 새날이 시작되는 설은 조상숭배와 효(孝)사상에 기반을 두고, 죽은 자와 산 자, 헤어져 살던 가족들이 한자리에 모여 차례를 지내고 덕담을 나누는 신성한 날이지요.


옛날에는 설빔 장을 ‘대목장’이라고 했는데, 사나흘 전부터는 ‘단대목’이라고 했습니다. 이맘때쯤이면 시장 상가들이 밤늦도록 백열등을 켜놓았는데, 비록 불빛이 초라하고 희미했지만, 지금의 불꽃놀이보다 더욱 화려하고 풍성했던 것 같습니다.

집에 오신 외숙모에게 “동상(동생)은 대목장 봐다 놨능가? 지사 상에 올릴 나무새들이 앵간치 올랐어야지···”라고 하시던 어머니의 한숨과 표정이 기억에 생생합니다. 그런 어머니를 따라다니며 ‘오늘이 며칠이니 설날이 며칠밖에 남지 않았네요’라고 뇌까리다 혼났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그래도 “오늘은 ‘양키시장’으로 교복 맞추러 가야긋따!”라고 하실 때는 기쁘기보다 충격이었습니다. 한 번 맞추면 2∼3년은 입었으니까 명절 때마다 들을 수 있는 말이 아니었으니까요. 정작 설날에는 새 옷을 입고 밖에 나가지도 못하면서, 거울 앞에서 몇 번씩 입어보던 그때의 기쁨을 어떻게 필설로 표현하겠습니까.

설날을 손꼽아 기다렸던 이유

그래서인지 오십 대 졸업을 앞두고 있는 지금도 어린아이처럼 달력을 보며 집안 행사를 챙기고 지난 추억을 더듬는 게 작은 취미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렇게 설날을 손꼽아 기다렸던 이유는, 새 옷에 나이를 한 살 더 먹고, 아버지 눈치를 볼 필요 없이 상위의 음식을 마음껏 먹을 수 있으며, 연날리기, 딱지치기 구슬치기를 하면서 내 돈으로 영화관에도 갈 수 있는 날이기 때문이었지요. 1년 중 수입이 가장 많은 날이었으니 단연 최고의 날이 될 수밖에요.

단대목이 되면 손님을 부르는 시장 상인들의 목소리도 구수한 전라도 육자배기로 변했습니다. 이른 아침부터 막걸리를 얼큰하게 걸치고 손님을 끄는 상인들 모습은, 낙천적이고 정이 넘치는 전라도 지역이 가장 흥겨웠을 것입니다. 서편제와 동편제, 진도아리랑 등이 잘 설명해주고 있지요.


옛날 어른들은 주머니는 가벼웠어도 명절에 차려야 할 기본은 차렸던 것 같습니다. 대목이 되면 이발소와 목욕탕, 고무신 가게와 옷가게 등이 밤늦도록 불을 켜놓고 장사를 했으니까요. 그러다 단대목이 되면 이발소 같은 곳은 아예 날을 새워가며 영업을 했습니다.

공설시장과 한 마장도 안 되는 거리에 살았던 저는 길거리를 환하게 비추는 상가의 백열등 불빛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습니다. 저녁을 먹기 무섭게 환해진 상가를 구경하려고 신작로를 왔다 갔다 했으니까요.

귀향전쟁에 담긴 사연

빠트리고 갈 수 없는 추억이 하나 있는데 귀향전쟁 이야기입니다. 화물열차를 이용하거나 트럭에 얹혀오는 등 귀향전쟁은 5∼60년대에도 여전했는데, 힘들게 부모·형제를 찾아온 사람들에 담긴 사연들도 많지요.

“서울 부잣집서 식모 사는 시암거리 집 큰딸은 엄니 아버지 속옷을 사오고 연탄도 사왔다더라”,  “대전서 담배공장 댕기는 철곤이는 약이 들어가는 라디오를 사왔다더라”, “기생집 골목에 사는 대식이는 아버지 와이셔츠에다 동생들 학용품까지 사왔다더라”라는 소문이 동네를 떠돌았으니까요.

작은아버지 공장에서 심부름하던 귀철이가, 장항선 굴(터널)이 내려올 때는 넷인데 올라갈 때는 세 개라는 둥 ‘꽁갈’을 섞어가며 해주는 서울 얘기는, 기차 한 번 타보지 못한 촌놈에게 명절 때나 들을 수 있는 별천지 얘기였습니다. 아침저녁으로 교통전쟁이 일어나는 서울을 뉴욕의 다운타운이나 라스베이거스 같은 환상의 도시로 상상했던 것이지요.

부족했던 시절의 아름다운 잔상

올해는 설날이 입춘(立春)과 우수(雨水) 사이에 들어 있습니다. 입춘은 무자년 첫 번째 절기이고 우수는 눈이 비로 바뀌면서 얼었던 땅이 녹고 따뜻한 봄비가 내리기 시작한다는 두 번째 절기이지요.

해가 바뀌면 아버지는 인기 여배우 ‘조미령’씨 사진이 들어 있는 신문사 달력을 머리맡에 붙이고 그해 집안의 대소사를 메모하셨습니다. 그러나 저는 설날이 며칠 남았는지부터 확인해서 친구들에게 알렸지요. 신문지 1면 정도의 한 장짜리 달력도 구하기 어려운 시절이었으니 정확한 날짜를 알려주는 것도 큰 정보제공이었던 것 같습니다.

우리는 썰매를 타고 젖은 옷을 말리면서도 손가락을 꼽아가며 설날을 기다렸습니다. 세뱃돈을 어떻게 쓸 것인지가 대화의 핵심 주제였지요. 지금 생각하면 서커스 구경이나 필름이 자꾸 끊기는 싸구려 극장 구경을 가는 게 최고의 이벤트였는데···.

요즘에도 민족 최대의 명절인 설날을 '구정'이라고 하는 사람들을 종종 봅니다. 대학교수라는 자들이 TV에 출연해 ‘구정’이니 ‘구정선물’이니 하며 가르치려 드는 장면을 볼 때는 역겹기까지 합니다. 우리의 소중한 전통문화를 스스로 깎아내리는 그들의 사고가 의심스럽기도 하고요.

옛날에는 모든 게 하찮고 부족했지만, 마음만은 넉넉했습니다. 그런데 고급 아파트에 자가용까지 갖춘 지금은 오히려 ‘풍요 속의 빈곤’을 느끼며 사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그래도 부족했던 때의 기억들이 아름다운 잔상으로 남아 졸필이지만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고맙고 다행인지 모릅니다.

오늘의 고통은 내일의 아름다운 이야깃거리가 되기도 하지요. 해서 아무리 힘들어도 ‘희망’을 버리지 않으면 행복이 찾아온다고 합니다. 그러니 가슴에 ‘희망’의 선물을 가득 담고 고향을 찾아 즐겁고 보람된 설연휴를 보내시기 바랍니다. 아름다운 추억도 가슴에 가득 담으시고요.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뉴스보이(http://www.newsboy.kr/)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기사는 뉴스보이(http://www.newsboy.kr/)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단대목 #설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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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 마을'(다움카페)을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정치와 언론, 예술에 관심이 많으며 올리는 글이 따뜻한 사회가 조성되는 데 미력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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