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소피아성당과 술탄아흐멧자미의 아름다운 대조

[문화탐방] 정복과 관용이 공존하는 도시, 터키 '이스탄불'

등록 2008.02.12 15:56수정 2008.02.12 1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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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 이스탄불의 옛 이름은 비잔틴이다. 이곳을 점령한 고대 그리스 장군의 이름을 따서 붙인 거란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330년 도읍을 비잔틴으로 옮기고 콘스탄티노플이라 불렀다. 이후 로마는 동서로 분열되었고, 서로마는 476년 게르만족에게 멸망당했다. 서로마제국이 망한 뒤 천년이나 꿋꿋함을 유지한 동로마제국은 이탈리아 로마와 구분하기 위해 비잔틴제국이라 불렸고, 콘스탄티노플도 비잔틴이 되었다.

a 갈라타탑에서 바라본 구시가 골든혼 바다 건너 왼쪽부터 톱카프궁전, 아야소피아성당, 술탄아흐멧자미 누루오스자미 예니자미 그리고 갈라타다리가 보인다. 바다와 구시가 신시가로 구분되는 야경이 환상적이다.

갈라타탑에서 바라본 구시가 골든혼 바다 건너 왼쪽부터 톱카프궁전, 아야소피아성당, 술탄아흐멧자미 누루오스자미 예니자미 그리고 갈라타다리가 보인다. 바다와 구시가 신시가로 구분되는 야경이 환상적이다. ⓒ 신병철




비잔틴하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성소피아성당이다. 소피아는 ‘지혜’라는 뜻이고, 성(聖)은 그리스어로 ‘하기야’이고 터키말로는 ‘아야’이어서 하기아소피아 성당 혹은 아야소피아 성당이라고 한다. 지금의 아야소피아성당은 (동)로마제국의 유스티나아누스 황제 때 재건한 것이다. (동)로마제국은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때 최전성기였다. 이때 로마제국은 발칸반도와 터키의 아나톨리아지방을 비롯한 지중해 주변지역을 석권하여 세계 최강국이 되었다.

a 아야소피아성당 외형 530년대 유스티니아누스대제때 재건한 기독교성당이었으나, 15세기 오스만제국이 점령하고 모스크로 개조하였다. 주변의 첨탑은 모스크일때 만들었다. 둥근천정과 아치를 근간으로 한 비잔틴양식의 최고 아름다운 건물이다.

아야소피아성당 외형 530년대 유스티니아누스대제때 재건한 기독교성당이었으나, 15세기 오스만제국이 점령하고 모스크로 개조하였다. 주변의 첨탑은 모스크일때 만들었다. 둥근천정과 아치를 근간으로 한 비잔틴양식의 최고 아름다운 건물이다. ⓒ 신병철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532년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화재로 불탄 성소피아성당을 불에 타지 않는 돌을 주로 사용하여 5년 만에 재건하였다. 이전의 성당이 직사각형의 바실리카 모습이었으나, 모두가 예배에 집중할 수 있는 정사각형의 공간을 위하여 거대한 둥근 천정인 돔과 그에 덧붙인 조금 작은 돔을 활용하였다. 지금 성당 본체는 동서로 77m, 남북 71.7m로 정사각형에 가깝고, 중앙돔은 지름이 32.96m이며 높이가 54m이라고 한다.

성소피아 성당 내부로 들어가보자. 엄청 큰 둥근 천정이 마치 하늘처럼 보인다. 돔과 연결되는 작은 돔과 아치들이 곡선의 향연을 펼치는 듯하다. 햇빛을 받아들이기 위해 돔의 8부쯤엔 작은 창문이 있었고, 마찬가지 이유로 직각 벽면엔 큰 창이 나 있었다. 아치면의 창문이 직선과 곡선, 밝음과 어둠의 적절한 조화를 창출해내고 있다.

a 아야소피아성당 내부 둥근천정 작은 둥근천정 수직벽 그리고 중간의 크고작은 창문들이 성서러운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모스크일때는 회반죽으로 성화들을 가렸으나 1932년에 모두 걷어내고 박물관이 되었다.

아야소피아성당 내부 둥근천정 작은 둥근천정 수직벽 그리고 중간의 크고작은 창문들이 성서러운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모스크일때는 회반죽으로 성화들을 가렸으나 1932년에 모두 걷어내고 박물관이 되었다. ⓒ 신병철


중간에서 빛을 받아들이는 창문들이 마치 비행접시의 창문처럼 보이고 돔은 하늘로 붕 떠오르는 것처럼 느껴졌다. 곡선과 직선이 어우러지고 명암이 교차하는 거대한 하늘을 만나는 듯한 감흥이 단번에 파도처럼 다가온다.

6세기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처음 만들었을 때 성당 내부가 어떤 모습이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아마도 십자가와 모자이크 그림이 곳곳에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726년부터 (동)로마제국에서는 우상숭배가 철저히 금지되었고, 모든 성화는 파괴되었다. 지금 아야소피아 성당 내부의 그림들은 두 번째 우상파괴령이 끝난 843년 이후에 그린 것이며, 중간에 있는 거대한 둥근 널빤지의 아라비아글자 문양은 오스만 제국 때 붙인 것이라고 한다.


a 이스탄불 시내 지도 보스포러스해협에서 갈라져 나온 바다가 골든혼이고 그것을 기준으로 앞쪽이 구시가, 뒷쪽이 신시가 위스크다르이다. 갈라타탑 오른쪽 아래에서 갈라타납을 지나 골든혼으로 메흐멧2세가 70여척의 배를 이동시켜 비잔틴제국을 정복하였다.

이스탄불 시내 지도 보스포러스해협에서 갈라져 나온 바다가 골든혼이고 그것을 기준으로 앞쪽이 구시가, 뒷쪽이 신시가 위스크다르이다. 갈라타탑 오른쪽 아래에서 갈라타납을 지나 골든혼으로 메흐멧2세가 70여척의 배를 이동시켜 비잔틴제국을 정복하였다. ⓒ 신병철


아야소피아성당은 (동)로마제국의 멸망과 오스만제국의 점령으로 엄청난 변화를 맞이하였다. (동)로마제국은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이후 급격히 쇠락해져갔고 이슬람제국이 그 자리를 차지하였다. 이슬람제국의 지배권을 차지한 셀주크 투르크는 지금의 아시아지역쪽 터키 대부분을 차지하였고, 그 뒤를 이은 오스만 제국은 지금의 이스탄불 북쪽 에디르네를 도읍으로 삼고 이스탄불을 제외한 주변의 광대한 영역을 차지하였다. 그리고는 끝임없이 비잔틴제국을 점령하기 위한 공격을 감행하였다.

a 술탄 메흐멧2세의 비잔틴 정복 그림 젊은 술탄 메흐멧2세는 숙원이었던 비잔틴 정복을 기상천외의 방법으로 실현시켰다. 이 그림은 배를 산을 넘어 골든혼 안쪽으로 이동시키는 내용이다.

술탄 메흐멧2세의 비잔틴 정복 그림 젊은 술탄 메흐멧2세는 숙원이었던 비잔틴 정복을 기상천외의 방법으로 실현시켰다. 이 그림은 배를 산을 넘어 골든혼 안쪽으로 이동시키는 내용이다. ⓒ 신병철


1453년 여러겹의 성벽과 골든혼 입구의 쇠줄을 넘어 비잔틴을 점령한 것은 젊은 술탄메흐멧2세였다. 거대한 대포로도 비잔틴의 성벽을 뚫기란 불가능하였다. 함대가 골든혼 입구에 쳐놓은 방어용 쇠줄을 넘어가기도 불가능하였다. 술탄이 택한 전술은 성벽공격에 치중하는 듯하면서 갈라타탑을 돌아 배를 골든혼으로 끌어들이는 작전이었다. 로마제국은 생각지도 못했던 전술이었다. 70여척의 오스만의 전함이 골든혼을 공격하자 천년동안 버티던 로마제국은 하루아침에 무너지고 말았다.


술탄 메흐멧2세는 정복자 파티가 되었다. 승리의 문이라는 에디르네문(카프)으로 들어서서 곧장 아야소피아성당으로 향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관대한 정복자답게 문입구에 있는 코라수도원을 비롯한 기독교성당들을 그대로 두었다. 성소피아성당 이름도 그대로 사용하게 하였다. 다만 아야소피아성당을 이슬람 모스크로 개조하도록 했다. 개조라고 해서 크게 달라질 것은 없었다. 곳곳에 그려진 성화들을 감추고 메카쪽을 향한 벽면을 미흐랍으로 약간 장식하면 그만이었다.

a 아야소피아성당의 미흐랍 기독교성당을 점령한 술탄은 그것을 이슬람 모스크로 개조하였다. 성화들을 가리고 메카쪽을 향한 벽면에 소박한 미흐랍을 설치하는 것으로 대신하였다. 이름도 아야소피아성당이라 불렀다. 어디에도 종교 강제는 보이지 않는다.

아야소피아성당의 미흐랍 기독교성당을 점령한 술탄은 그것을 이슬람 모스크로 개조하였다. 성화들을 가리고 메카쪽을 향한 벽면에 소박한 미흐랍을 설치하는 것으로 대신하였다. 이름도 아야소피아성당이라 불렀다. 어디에도 종교 강제는 보이지 않는다. ⓒ 신병철


그러나 이후 술탄들은 성소피아성당 모스크에 가득한 우상(?)들을 회반죽으로 덮어버렸다. 이 회반죽은 1932년에 벗겨내었고, 이후 박물관이 되었다. 유물을 가득 모아 진열한 박물관이 아니라 박물관 자체가 큰 가치를 지니게 된 것이다.

결국 아야소피아성당은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만든 이후 900년 동안 기독교성당으로 사용되었고, 이후 500년 동안 이슬람 모스크로 사용되었으며 80년 가까이 박물관의 역할을 수행하며 오늘도 건재하고 있는 것이다. 모스크 사용 기간 동안 4개의 미나레트(첨탑)가 세워졌다. 나이가 많은 만큼 운명도 기구했다. 지금은 그 모든 영광을 찾아오는 사람 모두를 껴안으며 나눠주고 있는 듯했다.

a 술레이마니예자미의 무덤 내부 오스만 제국의 최전성기 술탄은 술레이만1세였다. 사람들의 왕래가 빈번한 곳에 거대한 술레이마니예자미를 건축했다. 그는 죽어서 이곳에 묻혔다. 술레이마니아자미의 일부인 무덤의 내부이다.

술레이마니예자미의 무덤 내부 오스만 제국의 최전성기 술탄은 술레이만1세였다. 사람들의 왕래가 빈번한 곳에 거대한 술레이마니예자미를 건축했다. 그는 죽어서 이곳에 묻혔다. 술레이마니아자미의 일부인 무덤의 내부이다. ⓒ 신병철


오스만제국의 술탄들은 재위기간 동안 몇 개씩의 자미(이슬람사원)를 건축했다. 정복자 메흐멧2세는 이스탄불에서 사람들의 왕래가 가장 잦은 곳에 정복자 파티의 이름을 가진 파티자미를 건축했다. 재래시장으로 연결되어 지금은 가장 많은 사람들이 쳐다보고 예배하는 자미가 되었다. 오스만 제국의 가장 번성기를 구축했던 술탄 술레이만1세는 술레이마니예 자미를 건축했다. 자미가 종교예배장소일 뿐만 아니라 무덤과 광장과 상가와 음식점도 겸하고 있어 민중의 삶을 상당히 배려했다.

오스만 제국의 술탄이 축조한 자미 중에서 가장 뛰어난 것은 뭐니 뭐니 해도 술탄아흐멧자미라는데는 큰 이견이 없다. 술탄 아흐멧(1603-1617)은 아야소피아 성당의 맞은편, 사람들의 왕래가 별로 없는 지역에 자신의 이름을 가진 자미를 건축하도록 명령했다. 아야소피아성당보다도 더 거대하고 더 화려하고 더 아름답게 그리고 그와 조화를 이루도록 지으라고 했나보다.

a 술탄아흐멧자미(블루모스크) 17세기초 술탄아흐멧은 소피아성당의 맞은편에 기독교성당이 아닌 이슬람모스크를 건축했다. 미나레트를 6개나 세우고 거대한 돔들을 연결하였다. 그러나 술탄은 이것을 완공한 다음해에 죽고 말았다. 지금은 누구나 예배할 수 있는 이스탄불 최고의 자미가 되었다.

술탄아흐멧자미(블루모스크) 17세기초 술탄아흐멧은 소피아성당의 맞은편에 기독교성당이 아닌 이슬람모스크를 건축했다. 미나레트를 6개나 세우고 거대한 돔들을 연결하였다. 그러나 술탄은 이것을 완공한 다음해에 죽고 말았다. 지금은 누구나 예배할 수 있는 이스탄불 최고의 자미가 되었다. ⓒ 신병철


블루모스크라고 속칭되는 술탄아흐멧자미는 이렇게 아야소피아 성당과 함께 이스탄불의 상징물이 되었고, 오스만 제국을 크게 발전시킨 군주는 아니었지만 술탄 아흐멧은 그가 남긴 자미 하나로 지금도 수없이 이름이 불려지고 있다. 그러나 술탄 아흐멧은 자미가 완공된 다음해에 죽고 말았다. 이름 하나 알리기 위해 쓰러져가는 제국의 운명도 아랑곳않고 1년 밖에 사용하지 못한 거대한 자미를 건축하다니, 어리석고도 어리석도다. 그러나 그것 덕분에 우리는 빼어난 문화에 흠뻑 젖어들 수 있으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술탄아흐멧자미는 일단 거대하다. 중앙의 돔 주위로 사방에 반돔들을 짜맞췄다. 집의 사방을 받치는 기둥과 벽 위로 크고 작은 둥근 돔들이 우아하고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벽들도 창문과 장식을 위하여 아치를 이루고 있다. 이런 중심 건물 주위에 정면에 두개, 건물 모서리에 4개 모두 6개의 미나레트를 세웠다.

미나레트는 기도시간을 알리는 탑이기도 하지만 곡선으로 단장한 모스크에 높은 상승감을 주어 조화를 이루는 건축미학적 기능도 아우르고 있다. 곡선의 천장을 가진 크고 작은 지붕들의 조화는 분명 아야소피아성당에서 출발했지만 이슬람식 건축물의 형식은 첨탑의 미나레트가 완성하고 있었다.

a 술탄아흐멧자미 내부 둥근천정에 아치, 직선 기둥 황홀한 무늬, 아름다운 조각 색유리 등, 붉고 푸른 색조가 중심이 되었기에 사람들은 블루모스크라고 부른다. 이곳에서 예배하면 저절로 진리와 정의의 세상이 이뤄질 것 같다.

술탄아흐멧자미 내부 둥근천정에 아치, 직선 기둥 황홀한 무늬, 아름다운 조각 색유리 등, 붉고 푸른 색조가 중심이 되었기에 사람들은 블루모스크라고 부른다. 이곳에서 예배하면 저절로 진리와 정의의 세상이 이뤄질 것 같다. ⓒ 신병철


기도 시간만 피하면 언제든지 술탄아흐멧자미에 들어갈 수 있다. 어느 정도까지 직선의 벽과 기둥이 위로 올라가면 그 위는 모두 곡선이다. 돔의 반원들이 거대한 기둥에서 갈라져 아치를 그리고, 그 위에 큰 돔의 천장이 얹혀진다. 돔의 높이만 23m이며 천장을 받치는 기둥은 마치 수십 명이 팔을 맞잡아야 한바퀴 돌 수 있다고 하는 거대한 고목처럼 보인다. 채광을 위하여 돔과 벽에 260개의 크고 작은 창문을 달았다.

창문에는 색유리를 끼워 넣었다. 스태인드글라스가 고딕양식 성당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벽과 천정은 푸르고 붉은 대리석으로 화려하게 치장했다. 유난히 푸른색조가 강하여 서양사람들이 제멋대로 블루모스크라고 한다고 하나 내부를 보는 순간 그것은 너무나 주관적인 평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붉은 색조와 푸른 색조가 적당히 어울리고 있었다. 사원의 내부장식에 푸른색을 사용하는 경우가 없기 때문에 푸른색조가 더 강하게 느껴진 건 아닐까, 해석해 본다.

이슬람의 철저한 우상금지에 따라 내부는 모두 추상적이고 아름다운 무늬들로 채워져 있다. 각종 모양과 조밀하고 성긴 무늬들이 다채로운 색을 띠고 조화를 이루고 있다. 무늬들만으로도 훌륭한 장식이 된다는 사실이 놀랍다. 디자인을 생각하는 사람들이여 이스탄불로 모일지로다.

외형에 일단 놀란 사람들이 안으로 들어가 내부를 보는 순간 또 다시 큰 감흥에 뒤집어지고 만다. 아야소피아성당은 박물관으로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야 하지만, 술탄아흐멧자미는 누구에게나 언제나 개방되어 있다. 이스탄불에 머무는 사흘 동안 아침 식사 시간 전에 자미에 들어가 보았다. 그 안에서 무슨일이 일어나고 있을까 궁금해서다. 마지막날에는 예배에 참여해 보았다.

a 파티자미 부근의 재래식 시장 재래식 시장은 이렇게 사람들이 흘러넘친다. 옷차림에서 남녀노소 보수 개혁의 의지가 보인다. 인샬라를 생각하는 이들은 어떤 세상을 추구하고 있을까

파티자미 부근의 재래식 시장 재래식 시장은 이렇게 사람들이 흘러넘친다. 옷차림에서 남녀노소 보수 개혁의 의지가 보인다. 인샬라를 생각하는 이들은 어떤 세상을 추구하고 있을까 ⓒ 신병철


기둥 쪽의 이맘이 무슨 소리를 하니 각자 기도드리고 있던 사람들이 모두 미흐랍의 이맘 앞에 횡렬로 줄섰다. 이맘은 계속해서 뭐라고 주문을 외웠다. 쿠란을 암송하는 걸까? 그 소리가 마치 아름다운 노래처럼 들렸다. 반주도 없이 생으로 하는 구성진 노래에 감동이 일었다. 진흥하지 않은 음악이 이처럼 이맘의 기도 소리로 발전해갔던 걸까? 어떤 소리가 나오니 굻어 앉았다가 다시 엎드렸다가를 반복한다.

무슨 소리인지도 모르면서 그래도 기도한다는 생각으로 화두를 생각해본다. 이들이 종교풍의 인사말로 하는 ‘인샬라(신의 뜻대로)’를 화두로 삼았다. 인샬라 인샬라 그게 어떻다는 걸까. 왜 신의 뜻에 나의 주관을 맡기려고 하는 걸까? 신의 뜻은 과연 무엇인가? 신이 만약에 엉뚱하고 불행한 삶을 이끌어간다고 해도 그에 따라야 하는 건가.

역사에서 항상 진리에 가까운 쪽이 거짓 세력을 이겨나간 것은 아니지 않은가. 지금 세상은 또 어떻고…. 신의 뜻에 대한 반감이 일어난다. 그래도 인샬라를 말하는 것은 결국 진리와 정의를 위하여 온 몸과 마을을 바쳐 노력하자는 말이 아닌가? 맞아! 인샬라는 결국 신의 뜻에 모든 것을 맡겨버리자는 뜻이 아니라 진리와 정의의 핵심인 신의 뜻을 제대로 살리기 위해 애쓰고 힘쓰고 어떤 경우는 싸워야 한다는 뜻이 아닐까?

남의 나라 성당에 들어와 온갖 생각을 다 해본다. 그러고도 결론이 나지 않아 얼버무리고 말았다. 상식에 어긋나지 않게 살고, 웬만한 것은 용서하고, 나의 작은 잘못에 대해서는 용서를 받고, 그리고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거짓에 대해서는 처절하게 싸우는 삶이 바로 ‘인샬라’일 것이라고.

아무리 그래도 이것만은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 저 숭례문을 홀라당 불태워버린 우리의 어리석음이 바로 그것이다.

덧붙이는 글 | 1월 중순 15일동안 터키를 여행하였습니다. 이스탄불-사프란볼루-앙카라-카파도키아-콘야-안탈리아-파묵칼레-에페스-베르가모-차낙칼레-이스탄불을 둘러보았습니다.

너무나 많은 문화재가 부럽기짝이 없었습니다. 우리는 조금 있는것마저 지키지 못하는데... 예닐곱차례로 여행기겸 문화탐방기를 나눠 실어볼까 합니다.


덧붙이는 글 1월 중순 15일동안 터키를 여행하였습니다. 이스탄불-사프란볼루-앙카라-카파도키아-콘야-안탈리아-파묵칼레-에페스-베르가모-차낙칼레-이스탄불을 둘러보았습니다.

너무나 많은 문화재가 부럽기짝이 없었습니다. 우리는 조금 있는것마저 지키지 못하는데... 예닐곱차례로 여행기겸 문화탐방기를 나눠 실어볼까 합니다.
#이스탄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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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에서 살고 있습니다. 낚시도 하고 목공도 하고 오름도 올라가고 귤농사도 짓고 있습니다. 아참 닭도 수십마리 키우고 있습니다. 사실은 지들이 함께 살고 있습니다. 개도 두마리 함께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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