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나 댁이나 왜 이렇게도 못 나고 못 살까?"

[누가 이 나라를 지켰는가 27] 함평 - 심남일 의병장 (1)

등록 2008.02.22 08:25수정 2008.02.22 1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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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의병은 우열을 가려서는 안 된다

a  후손이 간직하고 있는 심남일 의병장 영정

후손이 간직하고 있는 심남일 의병장 영정 ⓒ 박도

<전남폭도사>는 1906년부터 1909년 말까지 일제 경찰과 호남 의병 사이에 벌어진 전투일지로서, 전라남도 경무과에서 1913년에 작성한 갑종 비밀문서이다.

이 자료에 따르면, "심남일 의병부대를 비롯한 전해산과 안규홍이 이끄는 의병부대가 호남지역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 <폭도에 관한 편책>에 따르면, “의병장 심남일은 강무경과 함께 일본군의 집요한 추적을 피해 잠복해 있다가 결국 1909년 10월 9일에 모두 체포되었다. 그 이튿날인 10월 10일에 ‘남한폭도대토벌작전’도 일단락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내가 살펴본 대부분의 문헌에는 호남의병에 심남일 의병장이 언급되어 있었다. 사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의병 이야기를 쓰면서, 가장 조심스러운 것은 그 우열을 가리는 일이기에 역사 지식이 얕은 사람으로 - 설사 역사 지식이 깊다고 할지라도- 그 우열을 가려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머슴 출신 안규홍 의병장 후손 안병진씨는 “졸병이 없는 대장이 어디 있습니까?”라고 당신 조상 사당을, 기념관 건립을 하지 않았던 까닭을 말씀한 적이 있었다. 동아대 홍순권 교수의 <한말 호남지역 의병운동사 연구>에 따르면, 1907년~19012년 기간 중 일제에 희생당한 의병의 수는 1만7846명(조선총독부 조사)이라고 한다. 어느 한 분 고귀한 희생이 아닐 수 없다. 그래도 의병장은 꽃다운 이름이라도 남겼지만, 이름도 없이 조국 산하에 까마귀 밥이 된 선열도 헤아릴 수 없이 많다고 추산된다.

조선정벌의 꿈


a  심남일 의병장 진중일지 <진지록>

심남일 의병장 진중일지 <진지록> ⓒ 박도

그래서 나의 의병 전적지 답사는 애초부터 아무 순서도 가리지 않고, 연락이 닿는 대로 순례하고 있다. 순천대 홍영기 교수로부터 함평의 심남일 의병장을 추천받았지만, 나를 도와주시는 여러 분에게 후손 연락처를 문의해도 모두 모른다고 하였다. 하지만 일제가 폭도 중 가장 강력한 ‘수괴(首魁)’라고 지목한 심남일 의병장 전적지를 어떻게 빠트릴 수 있으랴.

그래서 함평군청 민원실에 문의하자, 곧 사회복지과로 연결해 주었고, 담당 공무원이 매우 친절하고 자세하게 함평군 월야면 계림리에 사는 심남일 의병장 손자 심만섭씨와 의병장 며느님 백옥련씨의 근황 -손자는 청각장애인이고 며느님은 아흔의 고령이라는-과 전화번호를 가르쳐 주었다.


출발 전날 확인전화를 한 뒤, 2007년 12월 9일 아침 출발에 앞서 다시 전화를 드리고는 고영준, 고태석씨와 함께 함평으로 달렸다. 담양 숙소를 출발한 뒤 광주광역시를 가로 지르자, 곧 함평의 너른 들판이 나타났다. 여기가 호남평야가 아닌가. 늘 식량이 부족했던 일제는 우리나라 땅 가운데 호남평야에 유독 눈독을 더 들여 이 지역 토지 침탈에 광분하였기에, 그들에게 땅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백성들의 항쟁이 더 거센 까닭으로 호남의병 항쟁이 크고 더 끈질겼으리라 짐작이 된다.

일본의 산하를 보고 우리나라의 산하를 보면 확연히 다르다. 어느 해 일본을 여행한 뒤 부산에서 서울로 열차를 타고 내 조국 산하를 다시 보니까, 일본의 산하가 보리밥이라면 우리나라 산하는 쌀밥처럼 밝고 맑았다. 예로부터 일본의 지도층들이 자나 깨나 대륙진출의 꿈과 조선정벌을 마음속에 품는 그 까닭을 알 수 있었다.

그들의 산하는 어딘지 거무튀튀하고 지진과 태풍, 해일 등으로 늘 불안전하다. 그런 그들이 바다 건너 조선반도에 와 보면, 그네와 견줄 수 없는 조선의 산하를 보고는 환장할 정도로 탐욕을 가질 것이다. 이미 지난날 그랬고, 지금은 여건이 안 돼 고양이 발톱처럼 숨기고 있을 것이지만, 언젠가 다시 여건이 마련되면 침략의 야욕을 드러낼 것은 불을 보는 것처럼 분명한 일일 것이다. 우리나라 백성들은 이 점을 늘 경게하며 살아야 후환이 없을 것이다.

무슨 정의와 도덕, 양심이 있나

a  길을 친절히 가르쳐 준 함평 월악리주민 이귀남(41)씨

길을 친절히 가르쳐 준 함평 월악리주민 이귀남(41)씨 ⓒ 박도

출발 전에는 심남일 후손 집을 쉽게 찾으리라고 생각했지만 그게 아니었다. 가장 큰 어려움은 겨울 시골길에는 도통 사람을 볼 수가 없는 점이다.

월야초등학교 가까운 한 마을에서 한 분을 만나 길을 묻자 친절히 가르쳐 주는데 만만치 않았다. 그분도 곧 그걸 알았는지 자기 차로 앞장서서 10여 분 꼬불꼬불한 들길을 달린 끝에 심남일 의병장 후손이 사는 계림리 마을 어귀까지 데려다 줘서 크게 고생하지 않고 찾았다.

전화연락을 받은 심만섭(65)씨가 집 앞에서 우리 일행을 영접했는데 청각장애인으로서 조금은 어설퍼 보였다. 고영준씨가 차의 시동을 끄면서 혼잣말처럼 뱉었다.

“나나 댁이나 의병이나 독립지사 후손들은 왜 이렇게도 못 나고 못 살까?”

그분을 따라 집안에 들어서자 심남일 의병장 며느님 백옥련(90)씨가 마당에서 약재(오가피나무와 복분자)를 말리다가 일어서 반겨 맞았다. 당신은 4남매를 뒀는데 모두 객지(도시)로 나가고 막내아들과 둘이서 산다고 하였다.

a  심남일 의병장 자부 백옥련씨와 손자 심만섭씨

심남일 의병장 자부 백옥련씨와 손자 심만섭씨 ⓒ 박도


심만섭씨는 준비해 둔 할아버지 의병 자료들을 꺼내 마루에 펼쳤다. 나는 마루 벽에 걸린 심남일 장군 초상화부터 촬영하고는 심남일 장군의 의병투쟁일지인 <진지록(盡至錄)>을 펼쳤다. 순간 이번 답사 길에 스캐너를 놓고 온 것이 무척 후회되었다. 짐에 지친 나머지 집에다 두고 왔기 때문이었다. 

“우리 아들이 농사 지어 산 집 뒤의 땅에다가 지난 11월 28일에 ‘남일 심수택 의병장 기념관’을 들어서는 기공식을 했는디 다 짓거든 꼭 오시오.”

a  심남일 의병장 기념관 부지 앞에 선 심만섭씨

심남일 의병장 기념관 부지 앞에 선 심만섭씨 ⓒ 박도

의병장 며느님은 우리 일행에게 준공식 때 꼭 와 달라고 몇 번이나 당부했다.

“저 몸으로 농사 지어 모은 돈으로 땅을 사서 할아버지 기념관 부지를 마련했어요.”

늙은 어머니는 청각장애인 아들이 대견한 양 몹시 자랑했다. 나는 마루에 내놓은 자료들 훑으며 몇 가지는 복사를 부탁하고는 복사료와 우송료를 드린 뒤 강원도 내 집으로 우송을 부탁하고는 곧장 일어서려고 하니까 당신 집에서 만든 복분자 차라고 꼭 마시고 가라고 붙잡아 다시 마루에 앉았다.  

상큼한 복분자 찻잔을 비우자 심만섭씨가 함평군 신평면 덕동 갓점에 있는 할아버지 기념공원(의병을 일으킨 터)에 안내하겠다면서 앞장섰다. 의병장 며느님은 뜰에서 말리던 복분자 열매를 비닐봉지에 담아 나에게 주려고 하는 걸, 짐도 가야할 곳도 많다고 끝내 사양하고는 대문을 나섰다.

a  잘 가라고 배웅하는 심남일 의병장 자부

잘 가라고 배웅하는 심남일 의병장 자부 ⓒ 박도

“또 오시오잉.”

의병장 며느님은 대문 앞마당에서 손을 높이 치켜들고는 우리 일행을 배웅했다. 순간 나는 “굽은 나무가 선산 지킨다”는 속담이 떠오르며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의병이나 독립지사 후손들은 왜 이렇게도 못 나고 못 살까?”라는 말이 상기되었기 때문이다.

근세 일백년 동안 쥐구멍에서 쥐새끼처럼 좌고우면(左顧右眄 이리저리 돌아봄)하면서 간에 붙었다가 쓸개에 붙으며, 일본으로 미국으로 돌아다니고 와서는 혀 꼬부라진 말 잘하는 요령 좋은 놈들이 높은 벼슬하면서 온갖 편법 탈법으로 자자손손이 잘 먹고 잘 살고 있다. 

그런데, 기울어져가는 나라 지키겠다고 목숨을 지푸라기처럼 바친 의병 후손들은 자자손손 무지렁이로, 기껏 남의 머리나 감겨주거나 페인트 통을 들고 거리를 헤매는 이 나라에 무슨 정의와 도덕, 양심이 있다는 말인가.

내 발이 아프더라도 길가에 돌부리라도 차야지 직성이 풀릴 것 같다. 정말 엿 같은 세상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홍영기 교수의 <대한제국기 호남의병연구>, 홍순권 교수의 <한말 호남지역 의병운동사연구>를 참고로 하여 썼음을 밝힙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홍영기 교수의 <대한제국기 호남의병연구>, 홍순권 교수의 <한말 호남지역 의병운동사연구>를 참고로 하여 썼음을 밝힙니다.
#의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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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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