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죽는 날 어찌 눈을 감을 수 있으랴

[누가 이 나라를 지켰는가 28] 함평 - 심남일 의병장 (2)

등록 2008.03.02 11:49수정 2008.03.02 1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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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절 기념사 유감

 

“기미년 삼월 일일 정오 터지자 밀물 같은 대한독립만세

 태극기 곳곳마다 삼천만이 하나로 …….”

 

제89주년 ‘3·1절 기념식’이 3월 1일 오전,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이명박 대통령을 비롯한 5부 요인과 각계 대표 등 3천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이 날도 예년과 다름없이 대통령의 3·1절 기념사에 이은 3·1절 노래로 기념식이 끝났다.

 

a  <남한폭도대토벌기념사진첩>에 실린 심남일 의병장

<남한폭도대토벌기념사진첩>에 실린 심남일 의병장 ⓒ 눈빛출판사

<남한폭도대토벌기념사진첩>에 실린 심남일 의병장 ⓒ 눈빛출판사

새 대통령 취임한 뒤, 첫 국경일 기념사의 요지는 “한국과 일본도 서로 실용의 자세로 미래지향적 관계를 형성해나가야 합니다. 역사의 진실을 외면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과거에 얽매여 미래의 관계까지 포기하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였다. 

 

독립운동가나 그 후손들은 차라리 기념사를 듣지 않은 게 마음 편했을 게다. 광복 이후 언제 한 번 일본이 우리나라에게 침략에 대한 진심어린 사과를 했던가.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나이에 강제로 전쟁터로 끌려간 이 땅의 아들 딸들은 일본군의 총알받이로, 성노리개로 몸과 마음이 갈기갈기 찢어진 채 돌아왔건만 일본 정부나, 우리 정부가 그분들의 상처를 보듬어 준 적 있는가.

 

바다 건너 이웃 나라인 한국과 일본이 서로 실용의 자세로 미래지향적 관계를 형성해나가는 일은 좋은 일이다. 하지만 과거 없는 현재가 없으며, 현재가 없는 미래가 어찌 있을 수 있는가. 일본으로부터 과거 침략에 대한 사죄를 단단히 받고, 다시는 우리나라를 침략치 않겠다는 다짐을 받아도, 그들은 약속을 저버리고 우리 강토를 넘볼 것은 불을 보듯이 뻔한 일이다.

 

그런데도 지난날 이 땅을 짓밟고 무고한 백성들의 목숨을 뺏은 데에 대한 사과나 보상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더욱이 삼천만 동포가 독립만세를 부른  3·1절 날에 우리가 먼저 과거를 털어버리자고 하는 것은 도대체 어느 나라 대통령이며, 온전한 정신을 가진 지도자가 할 말인지 묻고 싶다.

 

페인트 통을 든 독립운동가 후손

 

하루 종일 우울하게 보내다가 저물녘에는 며칠 전 한 방송국에서 독립운동가 후손 추천 의뢰를 받고, 마침 추천한 후손이 오늘 방송에 나온다고 하여 시청하였더니, 그리던 할아버지 나라에 와서 페인트 통을 들고서 다녔다. 그분 할아버지(性山 許蒹)가 독립운동을 하지 않고, 고향에서 일제 35년간 엎드려 지냈다면 오늘 어찌 여자 몸으로 페인트 통을 들고 다니겠는가.

 

새로 임명된 국무위원들의 인사청문회에서는 불법 탈법 편법으로 살아온 이가 더 많아 심지어는 임명장도 받지 못하고 낙마하는 진풍경을 연출하니까, 철없는 아이들은 3·1절 날이 저희들 스트레스 푸는 날인양, 오토바이를 몰고 서울 도심에서 광란의 곡예를 벌였던 모양이다.

 

이런 시절에 '누가 이 나라를 지켰는가'라는 일백년 전 의병 이야기를 들려준들 어느 누가 귀담아 듣겠는가. 그만 붓을 꺾으려다가 이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친 선열을 생각하고, 그래도 깨어 있는 소수의 젊은 영혼을 위해 더욱 열심히 끝까지 정성을 기울여 써야겠다는 소명감에, 며칠째 몸살 기운으로 누웠던 자리에서 일어나 컴퓨터를 켰다. 역사의 물길을 튼 이는 늘 깨어있는 소수이리라.

 

하지만 글이란 책상에 앉으면 그냥 술술 써지는 게 아니다. 명경지수와 같은 평정심을 찾아야 제대로 쓸 수 있다. 비록 내 글이 여러 학자들의 저서를 참고하고, 후손을 만나서 들은 이야기를 가다듬는 답사기일지라도, 오늘같이 마음이 어지러운 날은 좀체 진도가 나가지 않는다.

 

다행히 함평 심남일 의병장은 훈장 출신으로, 생전에 남기신 시가 많다. 장군의 생애 이야기는 다음 회로 미루고, 이번 회는 장군이 남기신 한시 몇 편을 독자 여러분과 감상하면서 옷깃을 여미고 깊이 절을 올린다.

 

선열이시여! 이 땅의 어리석은 백성들을 일깨워 주소서.

 

a  전남 함평군 신광면 원산리 덕동재(갓점)에 있는 심남일 의병장 기념공원으로 이곳이 의병을 일으킨 곳이다.

전남 함평군 신광면 원산리 덕동재(갓점)에 있는 심남일 의병장 기념공원으로 이곳이 의병을 일으킨 곳이다. ⓒ 박도

전남 함평군 신광면 원산리 덕동재(갓점)에 있는 심남일 의병장 기념공원으로 이곳이 의병을 일으킨 곳이다. ⓒ 박도

 

의병을 일으키며  

 

초야에 글 읽는 이가 갑옷을 떨쳐입고

바람을 타고 남쪽으로 가니 말도 나는 듯 하구나.

왜놈들을 물리치지 못하면

맹세코 모래밭에 죽어 돌아오지 않으리.

 

擧義有感 (거의유감)

 

林下書生振鐵衣 (임하서생진철의)

乘風南渡馬如飛 (승풍남도마여비)

蠻夷若未掃平盡 (만이약미소평진)

一死沙場誓不歸 (일사사장서불귀)

 

옥중에서 고향 매화를 생각하다

 

봄이 와도 매화소식을 물을 곳이 없구나.

눈 쌓인 추운 창가에 몇 번이나 피었느냐?

이제 나의 고향 길은 돌아가기 어려우니

해해마다 꽃이나 잘 피기를 바라노라.

 

獄中憶故園梅  (옥중억고원매)

 

春來無處問梅花 (춘래무처문매화)

透雪寒窓放幾花 (투설한창방기화)

今我歸期難可必 (금아귀기난가필)

年年莫作未開花 (년년막작미개화)

 

 

옥중 시 4

 

초야에서 십년 동안 글 읽던 몸이

한번 전쟁에 나서니 죽음이 가벼웠네.

나라의 원수를 버려두고 천지가 어두워지니

내 죽는 날 어찌 눈을 감을 수 있으랴.

 

獄 中 詩 四

 

山林十載讀書生 (산림십재독서생)

一出風塵萬死輕 (일출풍진만사경)

未雪邦讐天地莫 (미설방수천지모)

泉坮異日目何瞑 (천대이일목하명)

2008.03.02 11:49ⓒ 2008 OhmyNews
#의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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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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