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만에 친구같은 오촌아저씨를 만나다

돌아가신 어머니가 놔준 징검다리

등록 2008.02.25 08:45수정 2008.02.25 0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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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맛이 끝내주는 간장게장 ..

맛이 끝내주는 간장게장 .. ⓒ 정현순

▲ 맛이 끝내주는 간장게장 .. ⓒ 정현순

 

23일 저녁 오촌 아저씨가 싸준 간장게장을 풀어 한접시 담아냈다. 그것을 본 남편은 "웬 게장이야?" "아저씨가 오늘 당신 안 왔다고 엄청 섭섭해 하던데. 자 이거  아저씨가 직접 담가 보낸 간장게장이야 먹어봐" "이걸 진짜 그 아저씨가 담근 거래?" "그렇다니깐" 따끈한 밥에 게장반찬을 한 입 가득 넣은 남편이 맛있단다. 나도 맛을 봤다. 진짜 깊은 맛이 느껴지면서 밥이 자꾸만 먹고 싶어진다.

 

30년 만에 재회한 아저씨가 싸준 간장게장이 입안으로 퍼지면서 잊고 지냈던 유년 시절의 추억이 하나하나 머릿속에서 빛바랜 그림처럼 그려진다. 나에게도 그런 추억이 있었다니.  여름에는 속 옷 같은 짧은 반바지만 입고 개울가에서 물고기 잡던 일, 잠자리채 들고 동네를 휘젓고 다니던 일, 큰 나무 위로 오르락내리락 하면서 놀던 일 등 많은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치고 지나간다.

 

아저씨를 재회를 하게 된 것은 30년만이었다. 7년 전 딸아이 결혼식 때 친정어머니께서 연락을 했다고 한다. 그때 아저씨는 무척 바쁘다면서 결혼 며칠 전에 우리 집을 물어물어 찾아와 차 한 잔 마시고 축하금을 전한 후 가버렸다. 몇 십 년 만에 만났는데 그렇게 훌쩍 가버리다니 섭섭한 마음이 들었다.

 

그 후로 아저씨의 자식들(나에게는 육촌동생) 결혼식에도 갔다. 가끔씩 안부전화도 오고가고 했다. 그리곤 2년 전 친정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홀연히 와서 많은 도움을 준 아저씨. 어머니가 생존에 계실 때에는 아저씩 집에 가셔서 며칠씩 계시다 오시기도 했다. 그래서였을까? 아저씨도 무척 슬퍼하셨다. 장지에 갈 때도 아저씨가 본인의 차로 앞에서 에스코트를 하고 가기도 했다.

 

아저씨는 돌아가신 친정어머니와는 아주 가까운 사촌동생이었다. 아저씨가 어렸을 때는 우리 집과 가까운 곳에 살아 날마다 오고가고 했었다. 아저씨는 어머니(나에게는 할머니)가 일찍 돌아가셔서 우리친정어머니(아저씨에게는 사촌누나)의 젖을 먹고 자랐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아저씨와 나는 동갑나기였으니. 그렇게 아주 가깝게 살면서 성장을 했다.

 

아저씨와 나는 서로 이름을 불러가며 친구같은 어린 시절을 지냈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그런 것들이 모두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게 된 것이다. 어린 시절에는 아저씨와 친척이란 것을 알았지만 내가 아저씨라고 불러야한다는 것을 몰랐다. 아저씨가, 아저씨가 아닌 줄 몰랐기에 서로 이름을 부르면서 정말 재미있게 잘 놀았다.

 

동갑이기에 집안 어른들께서도 “아저씨라고 불러야지”라고 강요를 하지 않았던 것 같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20살이 될 무렵으로 기억한다. 친정어머니께서 “너는 언제까지 아저씨라고 안 부르고 이름을 부를 거니? 앞으로는 아저씨라고 해야지” 해서 멋쩍었지만 아저씨라고 부르게 되었다. 아저씨가 내 결혼식 때에는 오지 못했었다. 나도 아저씨 결혼식에 가지 못하고 말았다.

 

그렇게 서로 결혼하고, 아이 낳고, 사는 것이 바쁘게 살다보니 오랜 시간 동안 못 만나게 되었다. 나도 결혼을 하고나서 외가 행사에는 자연스럽게 참여를 하지 않게 되었다. 그래도 친정에 가면 난 친정어머니께 아저씨의 소식을 묻곤 해서 아저씨에게 일어나는 변화는 대충 알고 지내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친정어머니는 당신께서 돌아가실 것을 알기라도 했듯이 외가의 끈을 이어주는 준비를 조금씩 했던 것 같다. 만약 어머니께서 딸아이 결혼식에 아저씨한테 연락을 하지 않고 돌아가셨다면 자연스럽게 연락이 끊기고 말았을 것이다.  그 계기가 징검다리 역할을 단단히 하게 된 것이다.

 

아저씨는 경기도 사강에서 큰 횟집을 하고 라이온스클럽과 음식협회 등 여러 가지 직함을 가지고 있다. 친정어머니께서 돌아가신 후, 추석이 돌아왔을 때 고마움을 전하기 위해 동생과 올케가 처음으로 그 아저씨를 찾았다고 한다. 하지만 그 분위기가 너무나 설렁했다고 한다.

 

나보다 3살 어린 남동생은 어린시절 그 아저씨와의 추억이 없으니 그럴 수밖에. 올케는 더 말 할 나위도 없을 것이다. 어머니 돌아가시기 전 몇 번 본 것이 고작이었다. 아저씨는 나하고 같이 안 왔다고 섭섭해 하더란다. 동생의 그런 사정을 듣고 작년 설 명절부터 나와 남편이 함께 동행을 하게 되었다. 나도 아저씨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하고 싶었기에 동생이 함께 가자는 의견에 동참을 하게 된 것이다.

 

하여 자주는 못가지만 추석과 설날에 인사를 가기로 한 것이다. 그날도 우리가 간다는 소식을 듣고 방에 우리 자리를 만들어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가 도착하자마자 싱싱한 회와 매운탕 등 푸짐하게 한상이 차려졌다. 난 아저씨를 보자 마자 서해안 기름유출사고 때문에 지장이 없냐고 물었다. 아저씨는 아주 없지는 않다고 한다.하지만 큰 걱정은 하지 말라고 안심시키기도 했다.  

 

나와 만난 아저씨는 할 이야기가 많아 분위기가 아주 좋다고 동생과 올케가 전한다. 내가 보기에도 아저씨도 나와의 어린 시절 때의 이야기를 하면서 무척 즐거워하는 것 같았다. 어린 시절 아저씨와 같이 했던 시간이 많아서인가 오랜만에 술자리가 벌어져도 그다지 어색하거나 싫지가 않았다. 서로만 기억하는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하면서 “내가 언제 그랬지? 정말 그랬던가?” 기억을 더듬어 보면서 박장대소를 터뜨리기도 했다.

 

나도 오랜만에 내게도 있었던 유년의 언덕에서 추억의 시간을 보낼 수 있었던 행복한 시간이 되었다. 요즘은 사촌이상이 되면 먼 친척이란 생각에, 또 사는 것이 바쁘다는 생각에 왕래가 잦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본인들이 생각하기에 따라 오촌당숙도 멀다면 멀고 가깝다면 가까울 것이다.

 

어머니께서 우리들이 친척들과 연락이 끊어지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시고 작은 다리를  연결해 놓은 것을 지금은 알 것 같다. 당신이 안  계신 이 세상에서 우리들만큼이라도 많지 않은 친척들과 유대관계를 잘 가지라는 깊은 뜻이라는 것을.

 

나 역시 나이가 들수록 우리 아이들이 집안 친척들과 좀 더 좋은 관계를 맺기를 바라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오촌이 넘어가고 육촌 칠촌이 넘어서면 나도 헷갈리는 것이 사실이다. 우리 아이들과 아저씨의 아이들은 칠촌관계. 그렇다면 우리아이들이 아저씨의 아이들보고 아저씨 아줌마라고 해야 하나? 아저씨와 헤어지면서 다음에는 사위를 비롯해서  우리 아이들 모두를 데리고 오라고 한다. 그러기 전에 나도 촌수 공부를 좀 해야할 것 같다.

 

남편이 간장게장을 먹어보더니 “이거 팔지는 않는데?” “글쎄 팔 수도 있겠지” 아저씨는 간장게장 담그는 법을 당숙모에게도 안 가르쳐주고 아직까지 혼자만의 비결로 하고 있다고 한다. 딸아이한테 저녁반찬으로 먹으라고 한 그릇 갖다 주었더니 게 눈 감추 듯 먹었다고 한다. 난 아저씨와 만난 요즘에도 편하고 자연스럽게 반말을 한다. 친구같은 아저씨이기에. “친구같은 아저씨야! 직접 담갔다는 간장게장 정말 맛있게 잘 먹었어!”

2008.02.25 08:45ⓒ 2008 OhmyNews
#친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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