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기의 하늘을 날아올라 나는 다시 수도 아크라로 왔다. 일행이 도착하기 얼마 전 시내에 갑자기 비가 내렸다. 후두둑. 숙소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나는 너무 놀라 마당으로 뛰쳐나왔다. 거짓말같이 비가 내리고 있었다.
건기인데 어째서 비가 내리느냐는 나의 물음에 숙소에서 종사하시는 한 분이 어깨를 살짝 들어 올리며 손바닥을 보였다. '낸들 어찌 알겠느냐'는 표정이다. 건기에도 아주 가끔 비가 올 때가 있다던데 이날이 바로 그날이었다.
드디어 한국에서 방문팀이 오는 날이 되었다. 아크라 시내 타코타 공항은 아프리칸컵 최종 결승전 응원을 위해 도착한 이집트 응원단들로 점령되다시피했다. 상대편은 카메룬인데 카메룬 응원단은 모두 합해도, 내가 일행을 기다리는 두 시간 동안 채 열명을 다 못 세었다.
비는 곧 그쳤고 하늘은 다시 명징해졌다. 드디어 한국에서 온 동역자 사업 탐방팀이 출구를 빠져나왔다. 부산교육청·마산교육청·경기교육청에서 근무하는 교육계 인사들과 지역 언론사 및 월드비전 직원들 모두 합해 16명으로 된 탐방팀이었다.
며칠 동안 내가 지나갔던 그 노정을 그대로 밟으며 우리는 아크라~타말레~왈레왈레~볼가탕가~바우쿠~가루템페인으로 쉴새없이 내달렸다.
불에 타버린 도로변의 덤불 숲, 흙으로 지은 토담집, 마을 어귀의 망고나무, 그리고 자주색 셔츠와 밤색 바지를 입은 소년소녀들이 끝없이 이어지고 이어지며 가나의 풍경을 채워가고 있었다. 탐방팀에게 가루템페인 지역과 멜리가 학교에 대해서 간단히 설명을 해드렸다.
'가나 국토의 면적은 한반도의 1.1배입니다. 인구는 2300만명이며 1인당 GDP는 420달러 정도입니다. 화폐단위는 세디이며 1세디는 한화 천원에 조금 못 미칩니다. 90년대 초반까지 군사정부였지만, 소위 재임 시절 구데타를 일으킨 독재자가 다행히 수십 년 권좌를 순순히 민간정부에 이양하고 물러나면서부터 가나는 안정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가나는 서아프리카 국가 중에서는 정치, 경제적으로 가장 안정된 국가로 확실히 자리 매김을 하고 있습니다. 주요 자원은 코코아와 금, 보크사이트 등이 있습니다. 국가차원에서 교육의 중요성을 절감하여 대대적으로 교육개선사업을 하고자 노력하고 있지만 아직은 재정이 부족하여 도시에서 먼 외곽 지역에는 이렇다할 국가적 지원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반기문 총장 이전의 유엔 사무총장이었던 코피 아난이 바로 이 가나 출신입니다. 이곳 사람들의 이름에는 다 요일이 들어가 있습니다. 코피는 금요일이라는 뜻으로 금요일에 태어났음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이제 곧 만나게 될 멜리가 학교는 유치원·초등학교·중학교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총 학생 정원은 706명입니다. 그런데 교실은 초등학교용 3개, 중학교용 2개, 유치원용 1개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하루의 수업시간대를 몇 개로 쪼개어 계속 번갈아가며 수업을 진행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지원해주실 멜리가 학교 신축사업은 콘크리트 건물로 유치원 2개 교실, 초등학교 6개 교실, 중학교 3개 교실입니다. 이 지역의 자연을 고려해 보면 흙벽과 이엉지붕이 좋은 점도 많긴 하나 우기 때 폭우와 강풍에 너무 약하다 보니, 작년에만 해도 많은 토담집이 자연재해로 붕괴되었습니다. 통풍과 습도조절 등을 감안하여 최대한 콘크리트의 단점을 없앤 학교를 설계하도록 하겠습니다.'
몇 시간 동안 설명을 진행하고 서로 대화를 나누다 보니 우리는 어느새 멜리가 초등학교에 다 도착해 있었다.
500여 명이 넘는 아이들과 주민들이 운동장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우리는 참나무 밑에 둥그렇게 원형을 그어 자리를 마련했다. 멜리가 학교의 학생들·선생님들·지역 주민들·족장들·교육청 인사들과 지역의회 의원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가나에서는 공용어가 영어이긴 하지만 아직 어린 학생들에겐 부족어가 훨씬 친숙하여 우리는 한국어-영어-부족어 통역을 통해 인사를 나누었다.
하늘은 청명했고 바람은 시원했다. 지구 반대편에 사는 친구들끼리 인사를 나누었다. 오늘은 짧은 인사와 긴 스킨십이 필요한 날이다. 서둘러 간단한 행사를 마치고 우리는 운동회를 열기 위해 운동장으로 향했다.
500여명이 되는 학생들을 청군과 백군으로 나누었다. 백군은 가나 팀, 청군은 한국팀이다.
우리는 미리 준비해간 준비물들을 펼치고 나누어주며 운동회 대형을 만들었다. '밀가루 속에 담긴 사탕 먹기', '줄 잡고 단체로 점프하기', '기차 꼬리에 달린 풍선 터뜨리기', '승부차기'. 준비해간 수많은 경기 중 장마당 같은 혼란 속에서 겨우 건져낸 경기였다.
서먹하던 우리의 만남은 운동회가 시작되자마자 환호성과 열정의 도가니로 바뀌었다. 하얀 밀가루를 뒤집어쓰고 달리는 소년과 소녀 학생들. 아이들의 얼굴에 웃음이 넘쳐나는 순간 나는 감사의 날숨을 몇 번이고 내쉬었다.
아이들의 운동을 바라보기만 하기에 속이 답답해진 아주머니들이 성화를 했다. 운동장은 금세 학부형들의 난장이 되었다. 배턴을 부여잡고, 사탕을 물고, 밀가루가 가득한 대야에 얼굴을 사정없이 파묻는 학부형들. 즐겁게 참여해주는 모습이 고맙기만 하다.
운동회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꼬리에 달린 풍선 터뜨리기가 끝나고 어둠이 서서히 지면에 내렸고 승부차기를 하는 동안 해가 넘어가고 있었다.
나는 잠시 운동장을 벗어나와 하늘을 쳐다보았다.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참나무의 나뭇잎이 하늘에 손을 내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나뭇잎에는 바람이 걸려 있었다.
'아름답다.'
나뭇가지 사이로 부서지는 저녁 햇살이 나의 눈 속에 내려앉아 속삭이듯 간질였다. 내가 가장 큰 행복을 느낄 때, 바로 나뭇잎 사이로 떨어지는 햇빛을 받아마시며 하늘을 바라보는 순간이다.
오늘의 이 가을 운동회, 아니 건기 운동회가 잠시 왔다 떠나버리는 이방인들의 잔치로 끝나지 않도록 노력할 것이다.
우리의 만남이 더 깊이 지속되며 무르익어가도록. 오늘의 이 운동회는 첫 인사일 뿐이리라. 앞으로 펼쳐질 우리의 만남과 그 관계 속에 이 아이들이 어떻게 펄럭이며 성장해갈지 궁금하기만 하다.
a
▲ 아이들의 미소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라는 표현은 바로 이 순간을 위해서 아껴두었다. ⓒ 차승만
덧붙이는 글 | ※ 월드비전에서 진행하는 주요 탐방은 후원자 탐방(sponsorship tour)과 동역자 사업 탐방(partnership tour)으로 크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후원자 탐방은 월드비전에서 지원하고 있는 사업장에서 결연을 맺은 아동들을 꾸준히 후원해주시는 후원자님들이 직접 현지에 가서 아이들을 만나고 또 아이들이 사는 지역의 환경을 직접 체험하고 오는 것입니다. 동역자 사업 탐방은 아동에 대한 일대일 결연 외에, 추가로 한 지역에서 조금 큰 규모의 도움이 필요한 경우 현장을 직접 방문하여 확인한 후에 구체적인 사업 지원 내용과 금액을 정하기 위해 실시하는 프로그램입니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기사를 스크랩했습니다.
스크랩 페이지로 이동 하시겠습니까?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