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팩션 30] 선묘와 백주원

김갑수 대하소설 <제국과 인간> 제1편 상해의 영혼들

등록 2008.03.12 18:30수정 2008.03.12 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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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터에서 스쳐간 한 여인이 아니었다면 김태수의 삶은 그렇게 될 리가 없었다. 이런 것을 무책임하게 말해서 연기(緣起)라고 하는 것인지? 불가에서 삼라만상은 끝없는 연기의 그물 안에서만 존재한다고 했다. 연기의 고리를 다 끊어 놓으면 개체도 볼 수 없고 생명도 사라지는 것이라고 했다. 일체의 사물이 모두 그렇다고 했다.

중중무진 법계연기(重重無盡法界緣起)


일찍이 신라의 의상(義湘)도 이를 화두 삼아 지금 김태수가 있는 봉래의 바닷가를 드나들었다고 했다. 의상은 신라의 진골로 태어났다. 그의 성은 김태수와 같은 김씨라고 했다. 그는 삼국전쟁이 치열했던 시기에 살았다. 19세에 출가한 의상이 당나라 유학을 위해 목숨을 건 항해 끝에 다다른 곳이 이 산동성 봉래였다. 그 당시 이미 신라방이 있어 의상은 그곳에 여장을 풀었다. 아리따운 처녀 선묘(善妙)는 무슨 연유인지는 몰라도 신라방에 체류하고 있었다. 아마도 그녀는 신라방에 머물었던 동포의 후예인 듯싶었다.

두 사람은 마력에 쏠린 듯 사랑에 빠져 버렸다. 바다가 보이는 채운암(彩雲庵) 아래에서 그들은 손바닥으로 필담을 주고받았다. 선묘 덕분에 의상은 금세 중국어를 깨우치기도 했다. 하지만 사랑이 익어갈수록 의상의 고뇌는 깊어져 갔다. 그는 공부고 학문이고 모두 때려치우고 그녀와 붙어살아 볼까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작별은 예정되어 있었다. 그게 그네들의 연기(緣起)였다. 얼마 후 의상은 비정하게 종남산 지상사로 떠나 버린다.

지엄(智儼)은 중국 화엄종의 태두 같은 스님이었다. 그는 신라에서 유학 오는 승려를 일절 받지 않았다. 어느 날 그는 꿈에 이상한 장면을 보게 된다. 큰 나무가 동쪽에 서 있는데, 잎과 가지를 널리 퍼뜨려 서쪽까지 덮고 있었다. 그런데 그 위에 대붕(大鵬)이 깃을 내리고 있는 것이었다.

꿈을 깬 그는 마당에 물을 뿌리고 깨끗이 쓸었다. 그는 좌정한 채 귀인을 기다렸다. 그때 신라의 한 젊은 중이 찾아들었다. 지엄은 예를 갖춰 젊은 스님을 맞이한다. 선묘가 붙들어 지체한 시간이 아니었다면 의상은 지엄의 문하에 들어갈 수 없었을 것이었다. 의상의 학문은 일취월장했다. 그는 지엄의 수제자 법장을 능가해 버렸다. 법장은 훗날 중국 화엄종의 실질적 정립자로 추앙받게 되는 인물이다.

의상이 갑작스럽게 귀국을 결정한 것은 나라의 전쟁을 막기 위해서였다. 그때 당의 고종은 신라에서 파견한 김흠순과 김양도 등을 가두고 신라를 치려는 계획을 조신들에게 알렸다. 김흠순이 이것을 의상에게 귀띔하자 의상은 즉각 귀국하기로 마음먹었다. 구법(求法)의 염원을 간직한 수도승이었지만 조국의 위기를 끝내 방관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한시바삐 조국으로 가야 했던 의상은 중국에 올 때 내렸던 봉래 포구로 달려갔다. 그는 8년 전의 연인 선묘를 잊을 수가 없었다. 자연스레 그의 발길은 선묘와 사랑을 속삭였던 채운암으로 끌렸다.

의상은 선묘의 뒷모습을 보았다. 놀랍게도 그녀는 머리를 깎고 부처님 앞에 앉아 있었다. 의상은 소리 없이 뒷걸음질로 물러났다. 그가 포구에 다다랐을 때, 하늘과 바다에는 태풍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머뭇거리지 않고 배에 올랐다.


선묘는 의상이 왔다 간 것을 알고 있었다. 바닥가로 달려간 그녀는 연인이 탄 배가 가물가물 멀어질 때까지 넋을 놓은 채 보고 있었다. 그녀는 한 마디도 말없이 떠난 연인을 탓하지 않았다. 다만 하늘에 감돌기 시작하는 먹구름이 두려울 뿐이었다. 그녀는 이내 꽃잎처럼 바다에 몸을 던졌다. 죽어서 용이 되어 연인의 바닷길을 지키게 해 달라는 기도를 하늘에 올린 후였다.

백주원은 선묘가 머물렀던 채운사 암자 문턱에 앉아 먼 수평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장삼을 입고 가사를 걸치고 있었다. 급한 나머지 아무것도 챙겨 오지 않은 그녀의 얼굴에 화장이 있을 리가 없었다. 게다가 그녀의 머리는 삭발이었다. 그녀는 비구니의 행색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전혀 비구니 같아 보이지 않았다. 처음에는 누구나 그렇지만 유별나게 그녀는 수행자의 모습과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그녀는 마치 비구니로 분장한 영화배우 같았다. 멀리 바다에서 조국 쪽으로 가고 있는 배 한 척이 있었다. 그녀는 그 배가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 눈길을 거두지 않고 있었다.  

“18호에게, 그대는 앞으로 한국 정부의 외교 실력자가 되어야 하는 사람이다. 그대의 처신에 미래의 국운이 달려 있다. 철저히 비구니로 위장하라.”

언제나 그랬듯이 그녀는 신규식에게 이유를 묻지 않았다. 신규식은 그녀의 자상한 은인이자 무서운 상관이었다. 그녀는 아홉 살 때 아버지를 잃었다. 그러자 그의 가족은 한 사람도 없게 되었다. 그녀는 어머니의 얼굴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리움이란 모두 과거를 향하는 속성이 있는 것…. 그녀에게는 어머니와 공유한 과거가 없었다. 그래서인지 어머니가 그리웠던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다만 그녀는 아버지가 보고 싶어 울었던 적은 몇 번 있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갑오개혁 직후 경무청 판임관이었다. 다음해 그는 일본 경흥의숙으로 유학을 갔다. 그는 경흥의숙 특별교육부의 학생이 되었다. 이어서 동경공업고등학교를 거쳐 동경포병공창에서 견습을 마쳤다.

그는 한국 제1의 군기(軍器) 전문가가 되어 귀국한다. 귀국 때 그는 딸아이를 안고 왔는데 아무도 어머니가 누구인지 알지 못했다. 그는 포병참령, 군기창장을 지내다가 군기부령으로 승진했다. 그는 구한국 육군의 정3품으로서 최고위급 군인이었다.

그는 군기와 관련된 극비 사항을 아는 유일한 한국 군인이기도 했다. 그런데 을사조약이 체결된 이듬해 어느 날 그녀의 아버지는 귀가하지 않았다. 그리고 다음 날도 마찬가지였다. 어린 백주원은 유모와 함께 아버지의 근무처를 찾아갔다. 아무도 아버지의 행방을 아는 이가 없었다. 그렇게 아버지는 없어지고 말았다. 그 뒤로 아버지를 본 것은 꿈에서밖에 없었다.

그녀는 돈을 벌어 아버지를 찾아야 한다고 마음먹었다. 그러나 어린 데다 아무 연고도 없는 그녀가 할 일이라고는 없었다. 그녀는 자원해서 기생학교에 들어갔다. 기생 수업이 거의 끝나갈 무렵이었다. 아버지가 보고 싶어 울고 있을 때 한 남자가 찾아왔다. 그는 카이저수염을 하고 있었다. 그는 자기가 아버지의 부하였다고 말했다.

“동경에 가서 공부하지 않을래?”

신규식은 마치 사탕이라도 권하는 듯이 아무렇지도 않게 물었다. 그녀는 믿어지지 않았다. 그렇지만 주저 없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신규식은 백주원이 동경 메지로 여자학원 영문학부를 마칠 때까지 단 한 번의 착오나 위약이 없이 경제적으로 지원했다.

일본인 남학생은 물론 몇몇 교수까지도 그녀에게 유다른 친절함을 보였다. 얼굴도 못 본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것인지 아니면 어려서 아버지를 잃어서인지 그녀는 모든 남자를 이성으로 느끼는 성향이 있었다. 그러나 어느 시점에 그녀는 정숙한 처녀로 돌아오고는 했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신규식의 힘 때문이었다. 신규식은 그녀에게 정신적으로 지엄한 아버지의 구실을 했다.

백주원은 멀리서 나는 말울음 소리를 무심코 들었다. 그녀는 바다에서 눈길을 거두고 자신의 옷자락에서 무엇인가를 집어냈다. 옷에는 작은 꽃잎이 한 장 내려앉아 있었다. 그녀는 꽃잎을 들어 햇빛에 비쳐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녀는 빠른 속도로 가까워지고 있는 말 발굽 소리를 들었다. 그녀는 문턱 안으로 몸을 숨겼다.

갓을 쓴 조선 선비가 은빛 모시 두루마기를 들썩거리며 오고 있었다. 백주원은 말과 말 주인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그녀는 신발도 신지 않고 섬돌 아래로 내려섰다. 어느 사이에 김태수는 말에서 내려 목례를 보내고 있었다. 그는 무엇인가를 가슴에서 꺼내 백주원에게 들어 보였다. 옥빛 두건이었다.

“백주원씨, 맞으시지요?”
“김태수씨군요?”

이후로 두 사람은 오랫동안 마주보고 서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덧붙이는 글 | 제국주의에 도전하는 인간들의 야심찬 삶과 매혹적인 사랑을 그리는 소설입니다.


덧붙이는 글 제국주의에 도전하는 인간들의 야심찬 삶과 매혹적인 사랑을 그리는 소설입니다.
#선묘 #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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